
가지고 계신 성경 고린도전서 12장을 펴 주십시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겠습니다. 오늘 저녁 전해드릴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지난 몇 년간 이 주제를 두고 기독교계는 수없이 많은 논의를 했습니다. 현재 기독교 안에서 교파주의와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데, 어떠한 조직적 형태도 배제한 채 ‘그리스도의 몸’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직이 전혀 없는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분명히 조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와 감독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직분에는 모두 동일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목회자를 뜻하는 것이지 위계질서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섬기는 집사도 있었고, 도시마다 안수를 받은 장로도 있었으며, 양떼를 돌보는 감독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조직이 필요했던 것은 각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조직이 존재했던 것이죠. 최근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사실 기독교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의무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와 의무,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겁니다.
사실 오늘날에는 조직과 구조가 너무 많아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기도 합니다. 많은 대형 교단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중심으로 모이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합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관계도, 생명력도 없이 단순한 조직 구조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그저 관계주의자들일 뿐입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요? 그리스도의 몸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을 통해 교회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는 구약에 나오는 비유인데, 특히 중요한 비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메모하실 분들은 적어두시면 좋겠습니다. 신약에서는 교회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세 가지 중요한 비유는 바로 신부, 포도원, 앙떼 혹은 양 무리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원래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표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요, 하나님의 포도원이요, 하나님의 양 무리였습니다. 이 모든 비유가 신약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의 가지이고,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 무리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녀로 일컬으십니다. 호세아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장가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약혼하시고 혼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영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계속해서 다른 신들을 좇아가는 영적 간음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신약에서도 교회는 포도나무로, 우리는 신부로 비유됩니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나 포도원이라는 비유는 이스라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포도원을 일구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을 나타내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심음으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였거늘.” 그리고 하나님은 망대를 세우시고 포도원을 지키셨습니다. 또한 포도즙을 짜는 틀을 만드셨습니다. 이사야에 따르면 하나님은 포도원을 돌보시며 의로운 열매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은 불의와 죄악, 압제라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세 번째 비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양떼로, 자신을 이스라엘의 목자로 표현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마치 양을 들어 안은 것처럼 말이죠.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난 후, 다시금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인도하시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처럼 목자와 양떼의 관계와 같았습니다.
이처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신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였는지 보여주고 있죠. 특별히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직접 돌보시고 다스리셨다는 겁니다. 직접 돌보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하시고 지키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신부로 택하시고, 포도원으로 일구시고, 양 떼로 돌보셨습니다.
이제 신약을 보면 예수님은 이런 비유들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더욱 강조하셨죠. 예를 들어볼까요? 먼저 구약의 신부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신랑이고 우리가 신부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신랑이다”라고 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이 비유를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궁극적인 목적도 설명했죠. 에베소서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부로 삼으신 이유는 우리를 자기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흠도 없고 주름도 없고 점도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게 하시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우리를 순결하고 깨끗한 처녀로 부르신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예수님의 관계는 신부와 신랑 관계입니다. 요한계시록 후반부를 보면 우리가 예수님과 영광 중에 함께 있게 될 때 잔치에 청함을 받습니다. 어떤 잔치인가요?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의 아라본(arrabōn)을 주셨다”고 합니다. 헬라어 ‘아라본’은 "약혼반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결혼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약혼반지이신 성령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혼인 비유는 바울의 서신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데, 요한의 환상, 즉 요한계시록 후반부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서 포도원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포도원이 이스라엘을 의미하지만,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의미를 확장하셨습니다. 같은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교회는 포도나무에 매달린 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농부이신 하나님께 가지치기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지이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으시고 목자의 비유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양떼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죠.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단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광야로 나가시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늑대로부터 지켜주십니다. 이 비유는 신약 전체에서 계속 확장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세 가지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셨습니다. 주된 비유이죠. 여기에 더해 네 가지가 더 있는데, 이것들은 구약에서는 암시되어 있다가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적용된 것들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에서 통치를 받습니다. ‘나라’란 누군가가 다스리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자녀, 형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적 나라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처럼 우리는 말 그대로 나라입니다.
신약에서는 우리를 또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한 가정,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형제 아닙니까?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가 공동 상속자라고 했고, 히브리서 2장에서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거듭나게 하셨고, 우리를 입양하셨고,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헬라어 아바는 '아빠'라는 뜻인데,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세번째입니다. 우리는 나라이자 가족일 뿐 아니라 건물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건물입니다. 물론 사람 손으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물입니다. 우리의 기초가 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는 이 기초 위에 세워졌는데, 사도들이 기초 바로 위에 있고 우리는 그 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네번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특별한 비유는 구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처음에 살펴본 세 가지는 구약에서 중요한 의미로 쓰였고, 그 다음 세 가지는 구약에서 어느 정도 암시되었지만, 이 비유는 구약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에는 이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특별한 위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교회 건물,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 건물은 부차적인 것일 뿐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장소일 뿐입니다.
교회는 물리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건물이지, 물리적인 건물이 아닙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우리는 코이노니아(koinōnia)로서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의 교제를 나눕니다. 이 특별한 비유는 오늘 저녁에 우리가 살펴볼 내용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에베소서를 한 구절씩 살펴보면서 계속 다룰 겁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리를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자, 에베소서로 가기 전에 먼저 고린도전서 12장을 보겠습니다. 몸에 관한 세 가지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니까 생각을 정리하시고 집중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멍하게 있지 마시고 함께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2장에 자세히 나와있는 몸의 특징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연합, 둘째는 다양성, 셋째는 조화입니다. 연합, 다양성, 조화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호성입니다. 연합, 다양성, 그리고 조화 또는 상호성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해야 할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교회가 이토록 무력해진 이유는 성도들이 몸된 지체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우선 하나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이자 가장 핵심이 되는 몸의 특징은 바로 연합, 하나됨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물리적인 몸, 육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육체적인 몸은 반드시 하나라는 것입니다. 몸이 있는데 몸에서 팔을 떼어내서 이쪽에 두고, 다리는 저쪽에 두고, 머리는 저 위에 두고, 심장은 또 다른 곳에, 발은 저쪽에 따로 떨어뜨려 놓은 다음에 몸더러 뭔가를 해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각기 흩어진 지체들에게 "너희들끼리 뭉쳐서 일해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몸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여야만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우리의 육체적 몸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내 손은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니까 잘라서 따로 내보내야겠다.” 손을 자르고 나면 더 이상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잘라내는 순간 죽어버리고 말 겁니다. 반드시 몸에 붙어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몸의 본질은 하나됨, 바로 연합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여러분,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이며 모든 지체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만약 우리가 분리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단위로 기능하지 않으면 아예 기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지시와 모든 지적 능력, 모든 에너지와 몸의 모든 부분을 기능하게 하는 모든 자원이 나옵니다. 머리는 곧 생명입니다. 손과 팔이 잘려도 머리가 있는 한 생명은 유지됩니다. 몸의 여러 부분이 잘리더라도 유지됩니다. 계속 잘라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잘리면 생명도 사라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완벽한 비유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리스도는 머리이십니다. 간결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이 머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교회의 머리로 여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한 몸, 하나됨, 그리고 모든 자원과 모든 힘과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시를 동일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서 받고 있습니다.
다시 1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 몸이 되었는지 설명합니다. 몸의 연합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설명합니다. 13절입니다. “한 성령으로.” 여기에서 “한”이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사용되는지 보십시오. 12절을 보면 “몸은 하나”와 “한 몸”, 이렇게 두 번 사용됩니다. 13절에서 또 두 번 사용되고, 총 네 번이 사용됩니다. 한 단락 안에서 벌써 네 번이나 '한 몸'을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 하나됨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그 몸 안으로 들어왔고, 한 길을 통해 왔습니다. 그 길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제 그 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다시 보면 "한 성령으로 우리가 다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령 세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이 구절이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성령 세례란 하나님의 성령께서 믿는 자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3절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한 몸의 지체가 되었고, 한 성령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3절에서 말씀하듯이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한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다시 말해, 한 성령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우리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라는 사실, 우리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성령님이 내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실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지 않습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성령님이 계시나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님이 없는 신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을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여러분은 성령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셨습니다. 이로써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하나됨이 모두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 겁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한 몸이 되도록 세례를 주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모두 같은 한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하나됨은 인위적인 교파적 토대에 있지 않습니다. 단순히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한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하나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됨의 핵심입니다. 우리에게는 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제 안에 계신 성령님과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은 동일한 분이십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믿었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이 동일한 성령으로 거듭났고, 동일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으며, 여러분과 동일하게 그 성령님이 제 안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됨은 성령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육신의 뜻을 따르면 몸의 기능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몸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하나되어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령의 세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구주를 통해, 한 성령으로, 한 구원으로 같은 길을 걷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하나됨, 연합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됨으로 시작합니다. 모두가 그 하나됨 안에서 한 몸이 된 후에 흩어지는 것이 참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들어와서 같은 성령을 경험하고 같은 성령이 내주하시는데도 각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사역을 다시 몸을 하나로 모으고 연합하게 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입니다. 초특급 성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정말로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가 너무 차갑고 죽어있는 나머지 누군가가 정상 체온인 36.5도로 들어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열이 나서 아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 체온이다.” 아시겠나요? 우리의 체온이 너무 낮은 나머지 누군가 정상 체온을 갖고 들어오면, 우리는 그 사람이 과격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를 식혀야 한다, 통제불능이다’라고 말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하고 성령님의 사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사람 중에서 특출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오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것을 49번 하고 저것을 74번 해서 그래서 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다른 모든 지체들처럼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연합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아무도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기 왔으니 당신은 저 아래로 가서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모두 은혜로 되지 않았습니까? 행위로 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행위로 된 것이었다면 각자 자랑하느라 바빴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방식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은혜로 승리한 자들입니다. 자랑할 것도, 뽐낼 것도 없습니다. 일어나서 “내가 너희를 지배하겠다”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이분법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 위에 있는 것은 이 강단이 90센티미터 높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 위에 있는 유일한 이유이고, 만일 이것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한다면, 이제부터는 저 아래서 설교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 위에 있지 않고, 여러분도 다른 누군가의 위에 있지 않으며, 또 누군가의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신약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은사는 있지만 계급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조직도를 그린다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하나의 큰 원이 있을 뿐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계급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잠시 앞서 말씀드린 내용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교회에 대한 비유들을 살펴봤습니다. 모든 비유가 예외 없이 하나됨을 강조한다는 것을 발견하셨나요? 그걸 느끼셨나요?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복습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한 남편을 가진 한 아내입니다. 그렇죠? 우리는 몇 명의 목자가 있는 양떼일까요? 목자는 한 분입니다. 한 목자입니다. 우리는 한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입니다. 우리는 한 왕이 다스리는 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신 하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한 기초 위에 세워진 한 건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머리를 가진 한 몸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성경은 뚱뚱한 가지와 마른 가지, 또는 약한 양과 강한 양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전하는 의미는 하나됨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계급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상류층과 하류층을 나눌 자리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홀로 떨어져 있는 신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의 일부가 아닌 신자, 혼자서만 떨어져 있는 신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몸 안에 있습니다. 저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한 몸의 지체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몸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몸 안에 있습니다.
연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연합에 대한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에베소서 4장 4절 말씀을 공부하게 될 겁니다. 잘 들으십시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 한 분, 한 소망, 한 분, 하나, 한 분, 이렇게 ‘하나’가 반복되는 것이 보이십니까?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으로 잠시 돌아가서 설명드리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모두 나뉘어서는 이렇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는 아볼로파입니다.” “아볼로는 이제 구식이죠. 전 바울파입니다.” “둘 다 시대에 뒤쳐졌네요. 게바가 대세죠.” “저는 베드로를 따릅니다.”
여러분,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저는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늘 그렇듯이 군중 속에는 이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2절을 보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왜 이렇게 나누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사람을 따르고 저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제 3장 21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우리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 사람을 따를 거야. 나는 저 사람을 따를 거야. 나는 더 좋은 사람을 따를 거야.” 그렇게 누군가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바울은 모든 것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제 이런 분열에서 벗어나 하나됨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3장의 이 부분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우리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공동체가 독특하게 존재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었고, 그 동일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분리된 신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여러분의 삶은 제 삶이 시작되는 곳에서 이어지고, 그리스도의 온 몸은 그렇게 계속 이어져 갑니다. 끊임이 없습니다. 마치 끝없이 이어지는 사슬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의 교제 안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ekklēsia)’입니다. '불러내다'를 뜻하는 ‘에크 칼레오(ek kaleō)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신 자들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미 받은 그 신분에 걸맞은 인격과 행실을 갖춰가야 합니다. 우리는 따로 구별된 자들, 곧 성도들이며 거룩하게 구별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세상에서 나오도록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구별된 존재입니다. 거룩함에서 하나이고 사명에서도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같은 사명이 있습니다. 고난에서도 하나이고 영광에서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의 복을 받은 자인 우리의 지위와 관련해서는 교회 안에 구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고, 새로운 몸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존재입니다. 전에는 없었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국적의 장벽, 인종의 장벽, 계급의 장벽, 성별의 장벽을 모두 허무셨습니다. 한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해 모든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차별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친히 인도하시는 교회에서는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전하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는 곳이 아직도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반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10장 12절부터 13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모든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어떤 장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교양 없는 사람이든, 야만인이든, 교육받은 헬라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한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헬라어를 사용하여 우리를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구체적으로 다 살펴보지는 않을 겁니다. 동료 시민, 동료 상속자, 동료 구성원, 동료 참여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동료'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면서 '하나됨', '연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비유에서 이 '연합'이라는 주제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 중에서 최소한 우리 교회만이라도 이 하나됨을 느낄 수 있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아프면 저도 함께 아파하고, 제가 아플 때는 여러분도 함께 아파해 주셔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여러분도 제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 제가 사랑을 베풀고, 제게 사랑이 필요할 때 여러분이 사랑을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권면이 필요할 때는 제가 권면하고, 저에게 권면이 필요할 때는 여러분이 권면해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책망이 필요하다면 제가 책망하고, 저에게 책망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이 책망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제 아내를 제외한 모든 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제 아내가 너무 열심히 그렇게 하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 이미 충분히 그렇게 하고 있거든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스스로 고립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물줄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아시겠나요? 이것이 바로 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입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에 와서 자리에 앉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기쁘시죠?” 물론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교회 공동체의 물줄기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전혀 모른 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마비시키고 손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우리 나머지 사람들은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 절뚝거리며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공동체의 중심 속에 있어야 하고, 저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며, 저 또한 여러분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필사적으로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뭐라고 기도하시는지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많은 것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나요? 요한복음 17장 20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미래에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될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2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서로에게 매우 민감하라는 겁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이것이 바로 답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안에 주신 영광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임재야말로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근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동일한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 세상의 안일함을 깨뜨릴 수 있는 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될 때입니다.
만일 이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되어 서로의 영적 필요를 돌보고 깊은 하나됨을 경험하게 된다면, 세상은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으로 그 안에 담긴 모든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면 이 하나됨이 어떻게 이뤄지나요?" 그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겸손이 기초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되기를 기도하셨고, 바울 역시 같은 소원을 품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바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 되어 같은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보통 모든 지체들을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어떤 지체는 진심으로 사랑하며 대하고, 어떤 지체는 그저 그렇게 대하고, 또 어떤 지체는 겨우 참아주는 정도로 대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모두를 같은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건 어떤 마음인가요?” 어떤 마음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6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마음인지 아시겠습니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보이시나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지 아십니까?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가 하나 되는 방법은 예수님처럼 되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저를 낮추고 여러분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고난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겸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 생각하며 산다면 어떨까요?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도 돌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온 교회가 여러분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만 너무 신경쓰느라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지경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운다면,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돌봄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입니다. 저는 저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가 왜 저를 신경 써야 하나요? 저는 그저 여러분을 생각할 뿐입니다. 제게는 상처받은 자존심 따위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지 않을래요. 누구누구와는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끝이에요.”
이런 태도는 겸손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자존심입니다. 그저 표면으로 드러난 자존심일 뿐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지만, 그저 서 계시기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도 그저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감히 나한테 이렇게 하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예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너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너희가 뭔가를 얻을 수 있다면, 너희에게 유익이 되고 복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고난을 받을 거야. 난 오직 너희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지.’ 좀 낯설게 들리시나요?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몸이라는 개념의 전부입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 이게 전부입니다. 아시겠나요? 바로 이겁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지체를 생각함으로써 하나가 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잘한 문제들로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생각이 항상 자신을 향하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저 누군가의 삶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참아야 하나요? 밟히기만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면 밟히십시오, 밟히십시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린도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지금 소송 중이신 분은 안 계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6장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실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 7절부터 8절입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고소하고, 법정에 가서 공개적으로 다투는 것을 꾸짖고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고린도전서 6장 7절입니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그냥 당해주라는 겁니다.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래도 참고 당하십시오.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냥 속아주라고 합니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그냥 당하고 속아 주십시오. 그저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그 마음이 너무 커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게 되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런 것도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여러분을 속일 수 있지만, 다른 형제가 여러분을 일으켜 세워줄 겁니다. 베푸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베푼 만큼 받게 되고, 자신이 나눈 사랑만큼 돌려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서로를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겸손이 바로 핵심입니다. 만약 두 번째 핵심이 있다면 겸손과 동등한 것으로서 결코 이 둘이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입니다. 정말 가슴 벅찬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하기 전까지만 좋아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사랑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황과 무관합니다. 사랑은 그저 아무에게나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리에 누가 있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재밌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는 아내를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이는 마치 “나는 아내를 싫어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치 작은 밸브가 있어서 “자, 이제부터 내 마음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사랑 여덟 방울만 뿌릴 거야”라고 하고는 밸브를 잠그는 것과 같습니다. 주 안에서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무엇인가요? 계명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 계명이 될 수 있나요?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없는데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다음 구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님이 참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에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저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잘 들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는 밖으로 나가거나 큰 부흥회를 열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전도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원칙이 겸손이라면, 우리가 하나된 것을 보여주는 표시는 사랑 아니겠습니까? 사랑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여러분은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을 너무 지키려고만 해서 뭔가 잘못될 때마다 보복하고 반응하고 쓴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모든 것이 여러분 마음에 들지 않고, 교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이 자매님이나 저 형제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힘드십니까? 여러분이 이런 분이십니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이 넘쳐서, 주변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그 사랑을 부어주는 그런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하나됨의 원칙은 겸손이며, 하나됨의 표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형제에게 다가가서 "형제님, 제가 형제님에 대해 쓴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형제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또한 "형제님, 용서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며, "형제님,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 사랑이며, 돈과 명예나 지위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에 따라 성장하기도 하고 후퇴하기도 할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만일 다른 성도에 대해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을 품고 계시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고백한 후에 그 성도에게 가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에게는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사랑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제 실제로도 하나가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삶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미 있는 하나됨을 실천해 나갑시다.
몸에 대한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몸의 첫번째 특징이 하나됨이라면, 두번째는 다양성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4절입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무엇입니까? “여럿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됨은 우리의 기초이고, 다양성은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렇죠? 물론 몸은 하나입니다. 하지만 팔과 손가락과 여러 신체 기관들, 귀와 눈과 몸의 모든 지체가 각각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따로 움직이면서도 하나로 작동합니다. 14절에서 말하듯이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입니다. 몸 안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로마서 12장은 “우리는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고 그 은사에 맞는 믿음의 분량도 받았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영적 은사를 주실 때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믿음도 함께 주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은사만 주시고 사용할 믿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굉장히 답답할 겁니다. 반대로 받은 은사보다 너무 큰 믿음을 주신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은사와 믿음을 딱 맞게 주셔서, 받은 은사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십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다양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해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간단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여러분, 은사는 단순한 재능이 아닙니다. 타고난 능력도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잘 보십시오. 성령님이 주시는 거룩한 은사이며, 여러분이 받은 선물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그렇습니다. 몸에는 이런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한 가지를 하면 여러분은 또 다른 것을 할 수 있고, 다른 분들도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섬기면서 교회라는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갑니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몸에 장애가 생기고 불구가 됩니다.
좋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보십시오. 다양성과 통일성이 함께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여기서부터 은사가 나오죠. 어떤 사람은 지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은 지식을 받아서 말씀을 잘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믿음도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어떤 사람에게는 믿음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보통의 믿음을 넘어서는 믿음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에도 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중에는 일시적인 것도 있고 영구적인 것도 있습니다. 또 불신자들을 위한 것도 있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은사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11절입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서로를 섬기고 함께 사역할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에게 없는 것을 채울 수 있도록,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고 여러분은 또 다른 은사로 저를 도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 은사들을 놀랍도록 균형있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그만큼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런 은사의 다양성이 오히려 하나됨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시겠나요? 에베소서 4장 11절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은사의 다양성이 하나됨을 가져옵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가 서로를 섬기고 모든 사람이 섬김을 받으며 서로의 은사를 완벽하게 주고받을 때, 우리가 다 함께 성숙해지지 않겠습니까? 모든 은사의 완전한 조화가 모든 지체에게 부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되어갑니다. 여러분이 저를 섬기고 제가 여러분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함께 섬기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의 완전하고 성숙한 몸으로 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성이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의 영적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 복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주일학교에 지원했더니 3학년 교사는 필요없다고 하더라고요.” 안타깝네요. 3학년 교사가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 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경우에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은 “조직의 필요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적 은사가 있다면 반드시 사용해야 합니다. "자리가 없어요"라고 하시겠지만, 아니요, 있습니다. 돕는 은사가 있다면, 가서 누군가를 도우세요. 교회 조직이 꼭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가서 하면 됩니다.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면 반을 만들어서라도 가르치세요. 한두 명이더라도 동네에서 가르침이 필요한 누군가를 찾아보세요.
전도의 은사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분들을 찾아가 전도하시면 됩니다. 교회 조직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영적 은사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그저 앉아있기만 합니다. 누군가는 지금 여러분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조직이 여러분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 주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누군가를 찾아가서 여러분의 은사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만일 여러분의 은사로 섬길 대상을 찾지 못하신다면, 아마도 처음부터 교회 공동체 중심에 있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장식장에 모셔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제 은사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은사 목록을 살펴보십시오. 기도하면서 은사들을 공부하고, 여러분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성령님의 축복 가운데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시라면 목사와 교사는 될 수 없다는 걸 아실 겁니다. 그러니 제외하시면 됩니다.
둘째,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전도의 은사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돕는 은사가 있을 수 있고, 뛰어난 조직력이 있다면 행정이나 지도의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잘 살펴보시고, 정직한 마음으로 알고자 한다면 성령님이 반드시 알려주실 것입니다. 교회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대해 걱정하지 마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서 섬기시면 됩니다. 제가 한 그리스도인을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고 해 봅시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일이 많은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정말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가 바빠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수업도 있고 이런저런 일도 해야 합니다.” 제가 뭐라고 말할까요? “아, 훌륭합니다. 계속 하십시오.”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는데 이 조직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저 의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섬기시는 분들은 이곳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두신 곳이니 은사를 사용하십시오. 하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거나 교회 조직 안에서 할 일을 찾지 못했다면, 그냥 가서 누군가를 섬기시면 됩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을 찾으세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오늘밤 이 교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누군가와 친해져서 그분 집에 가거나, 낮에 만나서 함께 앉아서 가르치면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새신자들이 많아서 가르칠 것도 많습니다. 섬김의 기회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의 은사가 긍휼을 베풀거나 위로하는 것이라면 아픈 분들을 찾아가 보십시오. 명단이 있으니까 사무실에 연락하시면 됩니다. 직접 찾아가 보십시오. 교회의 조직이 갖춰지기를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의 은사를 사용하십시오. 빨리 빨리 그렇게 하십시오.
세번째는 조화입니다. 우리의 몸이 꼭 갖춰야 할 마지막 요소는 바로 조화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은사로 섬기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듭니다. 15절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몸에 조화가 없다면 정말 우스꽝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겁니다. "난 너무 보잘것없어서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17절입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눈이었다면 정말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난 그저 발에 불과해."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다양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계급이 없기에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여러분만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사들은 제 은사나 다른 어떤 사람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교회라는 몸에 백퍼센트 꼭 필요한 것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은 하나됨을 위한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각자의 은사를 발견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할 다른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겸손입니다. 21절입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태도를 말하는 겁니다. "너 아무것도 아니잖아, 너 거기 있어. 난 머리라고." 저는 뒤에 나오는 22절이 참 좋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다시 말해서 이런 의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죠. "저는 코예요. 제가 있어서 얼굴이 더 잘생겨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 가장 중요한 건 코가 아닙니다. 우리를 어딘가로 이동하게 해주는 발이 더 중요하죠. 코를 다치는 것보다는 발을 다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이게 바로 이 말씀의 요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사람들이에요. 모든 사람이 우리를 보죠"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더 중요한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섬기다 보면 이 진리를 깨닫게 되실 겁니다.
우리 교회 예배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누군가가 이들을 꾸준히 섬겨 왔다는 겁니다. 몸에 붙어 있는 발이나 손이 되어 묵묵히 수고해왔던 것입니다. 제가 앞에 서서 눈에 띄게 말하는 입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뭔가를 증명하는 건 아닙니다. 저의 은사가 여러분의 은사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은사가 여러분의 은사보다 덜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23절입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멋지거나 화려하지 않은 부분들이 실제로는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난 몸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의 자만심을 한 방에 무너뜨립니다.
24절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아름다운 지체는 무엇을 합니까? 그냥 보기 좋은 것뿐일까요?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보기에는 흉하고 전혀 예쁘지 않은 내장 기관들이 바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겉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우리 몸에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기능을 하죠. "우리가 멋진 부분이지 너희는 그저 그래"라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25절입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분쟁 없이 "지체들이 서로를" 어떻게 하라고 하나요?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차이가 없습니다,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여러분은 이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특별한 지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양성입니다. 이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건강한 몸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체계나 조직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지체로서의 더 깊은 연합, 더 많은 몸된 교회의 사역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이제 이 기도에 반응합시다. 우리의 연합은 성령 안에서의 연합이지, 교단이나 교회나 조직의 연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서로의 필요를 살피며, 자신의 이익을 전혀 생각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고, 각자의 영적 은사로 서로를 섬기기 시작할 때 진정한 영적 연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매일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렇게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니 예수님은 정말 살아계신 분이군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녁 저희에게 주신 말씀에 감사합니다. 조금 간략히 살펴봤지만, 주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진리를 알고 계시는 주님, 몸에 대해 가르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몸에 능력과 자원과 지혜와 열정을 불어넣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어떻게 기능해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밖으로 나가서 우리의 은사로 섬길 수 있는 곳을 찾게 도와주셔서,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게 하시고, 몸이 건강하게 하여 주시며, 하나 되어 온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배를 마치면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저와 함께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제 자리를 깨닫길 원합니다. 저에게 세 가지를 가르쳐 주옵소서. 첫째, 겸손하게 하옵소서. 둘째, 사랑하게 하옵소서. 셋째, 제 은사를 알게 하시고 사용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겸손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며, 은사를 알고 사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 이상의 은사를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합니다. 지금 바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성령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몸이 작동하고 필요에 민감해지려면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함께 일해야만 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가 되어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도록 이 진리들을 우리 마음 깊이 새겨 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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