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오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계신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라는 주제로 짧은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잠시 멈추고 다루고 있죠. 저녁 예배에서 다루는 "사탄은 존재하는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주제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은 계신가?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를 주제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제를 살펴보면서 여러 성경 구절들을 찾아볼 겁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아주 유익한 책으로 A.W. 토저의 <거룩하신 이를 아는 지식(The Knowledge of the Holy)>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토저가 말하는 여러 내용 중에서,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이상으로 성장한 민족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영적 역사를 보아도 인간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개념보다 더 위대한 종교를 만들어낸 적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배는 예배자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순전한 예배가 되거나 저급한 예배가 된다. 이 때문에 교회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한 질문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며, 누군가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거나 행하는지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있는가이다.” 토저에 따르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며, 교회가 전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저도 토저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려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무신론자, 실천적 무신론자들이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전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전파하고 선포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라고 하면 보통 진흙집에서 작은 신상 앞에 절하는 모습이나, 화려한 이교도 신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는 모습을 떠올립니다만, 우상숭배는 그보다 훨씬 큰 개념입니다. 우상숭배란 하나님에 대해 사실이 아닌 다른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사실과 다른 하나님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단계는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단계는 기독교인들도 자주 저지르는 죄인데, 하나님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1절입니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너와 같다고 생각했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거나 마음대로 상상해서 만들었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해 합당하지 않은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선포하는 이유는 철학적으로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번에 우리는 첫번째로 "하나님은 계신가? 실제로 존재하시는가?"라는 질문을 했고, 이성과 계시, 그리고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두번째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단순히 떠다니는 에너지 덩어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한 분 안에 세 위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격체이시고, 삼위일체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째 주제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로 들어왔습니다. 이 존재하시는, 영적이신, 삼위일체이신 인격체는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속성’이라고 부르는 항목들로 분류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를 소개했고, 오늘 아침에는 몇 가지를 더 다룰 예정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것들만 다루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려는 모든 것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고 있을 뿐이죠. 하나님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훨씬 넘어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한 가지 주제로 30분 동안 이야기한다 해도 하나님의 본질을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묻는 겁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하기가 너무 어렵지만, "어떤 분이신가?"라고 물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비교해 가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만 맞추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인간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처럼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사랑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그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아는 것들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모습이나 형상을 말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은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것과 같다’는 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부정문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닌 지를 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께 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거룩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죄만 경험해봤기 때문에, 거룩함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는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것을 부정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한계가 있고, 제한적이며, 하나님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은 이런 것과 같은 분이다"라고 말하더라도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그 어떤 것과도 같지 않으십니다. 자, 이 설명을 듣고 머리가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강해를 잠시 멈추고 이 짧은 시리즈를 시작한다고 하니까 어떤 분이 저한테 이렇게 묻더라고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전부 다 다루실 겁니까?”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오, 저도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그럼 11개인가요, 아니면 13개인가요?"라고 물었고, 그래서 저는 "둘 다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믿는 바를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속성도 무한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님에 관한 전부라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참된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참된 모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를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진리도 무한하고 속성도 무한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무한함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죠. 그중에서 일부만 이해하면 됩니다.
자, 이제부터 하나님의 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첫번째로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다뤘습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부정문이라는 걸 눈치채셨나요? 하나님이 항상 동일하시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변하지 않으신다'라고 표현합니다. 부정문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변화라는 것만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시다고, 변하지 않으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말라기 3장 6절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야고보서 1장 17절입니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는 이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안정감을 주며 피난처가 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신자들에게는 이 교리가 두려움이 된다는 사실도 살펴봤습니다. 죄에 대한 변함없는 진노, 즉 심판의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두번째 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보셔야 할 하나님의 두번째 속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인 절대적 속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은혜와 자비, 사랑과 같은 우리와 관련된 속성들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두번째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계십니다. 신학자들은 ‘편재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 모든 곳에 계십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이 개념이 여러분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으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개념들은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좀더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무한한 공간을 모두 채우고 계십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4절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열왕기상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솔로몬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은 모든 것 이전에도 영원하시고, 모든 것 이후에도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모든 것 밖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제한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에 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끝이 없습니다. 그 어떤 한계도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한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조차도 지식이 부족했거나 스스로 무지함에 빠져서 하나님을 제한된 존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실제로 성전에 살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거처라고 여겼던 것이죠. 마치 거짓 신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열왕기상 8장 27절에서 하나님은 이 성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던 겁니다. 성전은 잠시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위엄이 머무는 자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본질이 거하는 곳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물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을 가둘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에 불과한데 그렇게까지 숭배할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시리아인은 자신들이 골짜기의 신을 모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는 산의 신이, 시리아인에게는 골짜기의 신이 있었던 겁니다. 시리아인은 골짜기에서 종교 의식을 행했고, 유대인은 늘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시리아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산에 계시거나 산 위에 있다고 여겨서, 산 위에 있을 경우를 대비해 신에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 역사를 보면 이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산에서 참 많은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호렙산, 시내산, 그리심산, 예루살렘, 모두 산이었죠. 선지자들도 산으로 올라갔고, 예수님도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고,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부 비평가들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산의 신을 숭배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골짜기의 신이 아닌 또 다른 신을 말이죠.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만큼이나 골짜기에서도 예배한 기록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살고 계시고 하늘에만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보통 푹신한 곳에 큰 빛나는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안개 같은 존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이 저 멀리 천상의 궁전 어딘가에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잘 알았고, 현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몇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제 그 문제들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번째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면, 부정한 것들과 접촉해서 부정해지셨을 텐데요. 하나님이 세상에 계시다면 부정한 것들과 접촉하셨을 텐데요."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과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죄인의 마음 속에는 감찰과 확신으로 계시고, 지옥에는 심판으로 계십니다. 영혼과 육체를 지옥에서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어디에나 계시지만 결코 부정해지지는 않으십니다. 예를 들어 태양 광선을 생각해보십시오. 햇빛이 들판의 거름더미 위를 비칠 때, 그 거름더미는 결코 빛줄기를 더럽히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 그대로이시며,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으시고, 어떤 것도 그분을 더럽히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해독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다니셨지만,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났을 때에도 성경은 예수님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 가운데 계셨지만 전혀 부정해지지 않으셨죠. 하나님도 예수님과 같습니다. 어떤 것에 닿아도 더러워지지 않는 햇빛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해독하실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다면, 성경에서 왜 누군가에게 더 가까이 계시거나 멀리 계시다고 하나요?" 실제로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사야 55장 6절은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 악인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하고,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이스라엘에게서 멀리 계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가깝고도 멀리 계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두 가지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바로 본질과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관계적으로는 특정한 위치에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는 본질적으로는 모든 곳에 있지만, 관계적으로는 오직 경건한 사람들 안에만 계시는 것입니다. 좀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아침 여기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고, 제 존재가 이 공간에 퍼져 있습니다. 제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리고, 제가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죠. 저는 본질적으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존 맥아더의 모습을 보고 계신 거죠.
그런데 관계적으로는, 저는 앞줄에 앉아있는 서너 명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제 아내와 아들들이 그렇죠. 나머지 가족들, 친척들, 매우 가까운 친구들도 있습니다. 관계적으로 보면 저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이고, 본질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곳에 계시지만, 관계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거하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이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3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하고, 골로새서에서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관계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관계적으로 우리 안에 계시기 전에 먼저 본질적으로 계셔야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죄를 깨닫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항상 모든 곳에 계십니다. 어디론가 가실 필요가 없으신 것은 이미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1장에서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도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론가 내려오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이미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어디에나 계시며, 관계적으로는 자녀들의 삶 속에 함께 계십니다. 또 다른 측면을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언약궤 위 그룹들의 날개 사이에 거하신다, 또 성전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는 솔로몬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위엄의 보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시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시기 위해 성전을 세우신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보좌는 교회, 즉 신자들의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예루살렘의 보좌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에 묘사된 보좌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상징일 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이 하나님의 본질을 가두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놀랍고도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도 바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피조물 안에 계시지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 교리를 실제로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먼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 본질적으로나 관계적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든 못 느끼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어디 계신가요?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요"라고 외치는 순간이 있겠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히브리서 13장에서 "내가 결코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빌립보서 4장 5절 하반절부터 6절입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재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님, 주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며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 우주 안의 어느 누구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자는 관계적으로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에녹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걷다가 에녹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끊이지 않는 교제, 이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영원에서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편재성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입니다.
두번째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진리를 말씀드리죠. 하나님의 편재성의 실제적인 면은 바로 도우심입니다. 위로만이 아닌 실제적인 도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지자로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고 하셨을 때, 출애굽기 4장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 "하지만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 알고 계시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으리라."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임재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은 옆에서 지켜보시다가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벌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우리의 섬김을 도우시기 위해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저 위로가 되는 말씀이 아닌 섬김을 위한 도우심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전도할 자신이 없어요.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목사에게 전도의 책임을 맡기려 합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말씀해 주시면 안될까요?" 하지만 그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제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죠.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차이는, 저는 월급을 받는 판매원이고 여러분은 만족한 고객이라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월급을 받고 선한 일을 하지만, 여러분은 대가 없이 선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제가 가진 것과 동일한 능력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으리라." 가서, 전파하고,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이것은 위로가 아닌 도우심입니다. 섬김을 위한 지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편재성 교리는 신자의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편재성은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입니다. 사탄이 저를 공격하려 할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린도전서 10장 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겨낼 힘을 주시지 않는 시험은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다르게 적용됩니다. 각자의 영적 성숙도가 다르고, 같은 유혹이라도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같은 유혹이나 시험 앞에서도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이겨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신자가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 그 신자와 함께 계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하나님은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넷째로,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편재성이라는 교리는 우리를 거룩하게 살도록 이끕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생각으로 짓든, 말로 짓든, 행동으로 짓든, 모두 하나님 앞에서 짓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죄를 짓고 싶어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밖의 경우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세상을 다니다 보면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매우 당황스러워할 만한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을 목격하곤 합니다. 그러면 정말 빠르게 도망갑니다. 충분히 빠르진 않지만 말이죠. "아, 존 목사님, 그게 말이죠..." 이해하시죠? 이런 일이 저에게 자주 일어납니다. 제가 누군가의 잘못을 발견하는 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누구라고 다르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마다 마치 구름을 타고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서 바로 그 자리에서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지 않습니까?
다윗이 마침내 올바른 길로 돌아왔을 때, "제가 주의 목전에 악을 행했습니다. 제가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어땠습니까? 욥이 올바르게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욥기 31장 4절입니다.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제가 올바르게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즉,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것만으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처럼 간결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하지 않을 행동들은 가장 기본적인 단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지 않을 일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편재성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에게는 어떨까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불신자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1편 8절입니다. "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를 찾아내리이다." 도망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도망칠 수 없고, 빠져나갈 길도 없으며, 피할 곳도 없습니다.
아모스 9장과 오바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아모스 9장 2절입니다.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칼을 명령하여 죽이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내가 찾아낼 것이다. 오바댜 1장 4절입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숨을 곳이 없습니다. 불경건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망치려 해도, 교회에 가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종교적 대화를 피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이 모두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기 26장입니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에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욥기 34장 21절입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 잠언 15장 11절입니다. "스올과 아바돈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리요"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보실 수 있다면,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더 잘 보실 수 있겠습니까?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즉, 빛의 속도로, 초속 30만 km, 태양까지 8분만에 가는 빠른 속도로 날아가더라도 도망칠 수 없다는 겁니다.
도둑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도둑질을 합니다. 간음하는 자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간음을 저지릅니다. 거짓말쟁이는 아무도 모를 거라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3절에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사야 6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15장 3절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변함이 없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개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부정문을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욥기 9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하나님은 엘 샤다이라 불리시는데, 엘은 하나님의 이름이고 샤다이는 전능하다는 뜻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입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고 강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이 능력이 있다고 말할 때의 의미는,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정말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는 우주를 만드시는 것이 나비를 만드시는 것보다 더 어렵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모든 일을 똑같이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라고 물으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실 때 노력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또 이렇게 물으시겠죠. "하나님께서 정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에요? 정말 전혀 노력하지 않으신다는 건가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주일 아침에 일어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또 이 자리에 서서 3시간 정도 뛰어다니고 팔을 휘두르면서 모두를 향해 외치면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겠구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머리가 엄청난 속도로 돌아가면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단백질 음료를 마시고 비타민을 먹은 뒤에 힘차게 나섭니다. 3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죠. 아내에게 "마누라”라고 하다가,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데 사실, "패트리샤, 뭐 좀 먹어야겠어요"라고 말을 합니다. 보충을 해야 하거든요. 왜 그럴까요? 제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다 써버렸기 때문에 보충이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보충이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보충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디서 보충을 하시겠습니까? 이미 어디에나 계시는데요. 하나님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0장 28절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에너지가 줄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어떤 일이든 가장 잘 하실 수 있으며, 쉽게 하실 수 있고, 게다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아시겠나요? 하나님은 능력뿐 아니라 권위도 가지고 계셔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 능력에는 그 능력을 사용할 권위가 함께 있는 법입니다. 잘 알아두십시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뜻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능력으로도, 권리로도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뜻하시는 것은 능력과 권리로 무엇이든 하실 것이며, 오직 자신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만을 뜻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자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죄를 용납하실 수 없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사랑하실 수 없고, 무죄한 사람을 벌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늘 하나님의 본질,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 115편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제가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그건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하는데요"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구원으로의 택하심과 바로, 야곱과 에서의 비교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 왜 그렇게 하셨나요?"라고 따지면, 바울은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있겠냐"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권리입니다. 하나님께 따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다른 일만큼이나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만을 원하시며, 결코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죄를 사랑하실 수 없고, 자신의 말씀을 어기실 수 없고, 행하신 일을 잊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위격에 합당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역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이루어졌다고 전합니다. 시편 33편 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창조된 우주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자를 분열시켜 큰 혼란과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 우주를 폭발시킬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근접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신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어떤 조언도 받지 않고 이 모든 것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돕지 않았습니다. 조언을 얻기 위해 한 사람이라도 먼저 창조하셨을 법도 한데 말이죠.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조언을 드리고 싶어하니까요. 이사야 44장 24절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간에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4장 17절에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면 실제로 존재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창조를 통해 드러납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만물을 보존하시는 것에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두고 성경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피곤하지 않으시다고 하면서 왜 일곱째 날에 쉬셨어요?" 사실 하나님은 정말로 쉬신 것이 아닙니다. 전혀 쉬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정말 쉬셨다면, 처음 6일 동안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전부 무너졌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피곤해지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인간을 위한 생활방식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끊임없이 흐르기에, 일곱째 날에도 다른 6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붙드시며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말하듯이 말이죠.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또한 세번째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구원에서 나타납니다. 어쩌면 창조보다 구원에서 더 큰 능력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때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적해야 할 마귀도, 이겨내야 할 죽음도, 용서받아야 할 죄도, 제거해야 할 죄의 뿌리도, 닫아야 할 지옥도,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고통도 없었습니다. 창조가 그러했다면, 구원에는 이 모든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인간을 구원하신 위대한 능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을 보면, 하나님은 "능한 자나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을 향해 세우셨고, 사도행전 초반부를 보면 이들이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부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의인이든 불의한 자든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만큼 큰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아시나요? "믿는 자들이 부활한다는 건 알았는데, 불의한 자들도 부활한다는 게 사실인가요?"라고 물으실 텐데요, 그렇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을 보시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큰 흰 보좌 심판에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데,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그곳에 있게 됩니다. 무덤과 바다에 묻혀있던 자들이 모두 일어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부활의 능력입니까. 이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존 목사님,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실제적인 부분을 살펴보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이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 예배의 기초가 됩니다. 이 교리의 실제적인 의미는 열왕기하 17장 36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읽습니다.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여 그를 예배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그분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배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능력은 예배의 기초일 뿐 아니라, 매일의 확신과 신뢰의 기초가 됩니다. 제가 부족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마다, 저는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을 떠올립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날마다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9절이죠. 20절도 읽겠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일상의 기초가 됩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부활 소망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죽음에서 부활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휴거되지 않는다면 죽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장례식장에 가보면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신을 가져와서 피를 빼내고 방부처리 용액을 주입합니다. 그렇게 누워 있는 시신에 염을 한 후에 관에 넣죠. 누군가에게 "언젠가 이 시신이 무덤에서 나올 거예요"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모르시나 본데 저 시신은 절대로 움직일 리가 없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정말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관이 열려있는데, 죽은 자가 거기 누워있습니다. 슬픔 뿐입니다. 땅에 묻고 흙을 덮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이 일어나서 "이 사랑하는 형제는 언젠가 땅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뒤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립니다. "어떻게 그걸 알죠? 누가 그걸 해낼 수 있나요?"라고 하면서 말이죠. 고린도전서 15장을 보십시오. 부활에 대한 저의 확신은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고 52절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에게 이 승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 예배의 기초이며, 매일의 힘의 근원이고, 미래의 부활 소망의 토대입니다.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위로의 근원이 됩니다. 제 앞에 놓인 문제로 걱정스러울 때마다 저는 하나님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이 해결하시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편 121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다음 구절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실 수 있다면, 제 일도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습니다. 확신과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교리는 예배의 기초이고, 일상적 신뢰의 근거이며, 부활 소망의 토대이고, 위로의 근원이며, 또한 우리의 승리의 기초입니다. 에베소서 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원수와 싸우려면 하나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적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질 때 직접 싸우지 마십시오. 사령관이신 하나님께 알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승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드렸죠. 사탄은 놀라운 존재이고 강력하지만, 주님의 발 아래 있습니다. 사탄이 있어야 할 자리, 하나님이 사탄을 두신 곳에 말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라는 교리는 확신의 토대가 됩니다. 저는 구원을 확신하는데, 사람들이 종종 그 구원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냐고 묻습니다. 저는 늘 그렇다고 대답을 하죠. 그러면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묻는데,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은 저를 지키시기에 충분히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저를 빼앗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보다 더 강한 존재일 텐데, 그런 존재는 없죠." 요한복음 10장 29절, 먼저 28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왜 그럴까요?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존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것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바울은 모든 가능한 것들을 나열합니다. 권세자들, 천사들 등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 확신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 그 절대적인 전능하심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 확신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아는 데서 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전능하심의 교리는 겸손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될 수 없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처럼 전능하심의 교리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10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영어 성경에는 “질투하시게 하겠느냐”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한번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즉,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면,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더 강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맞서 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불경건한 사람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실 때는 그 대상과 맞서 싸우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누군가와 싸우실 때는 반드시 이기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이 결국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그들이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다면 아무런 방어책이 없습니다. 정말 아무런 방어책이 없습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더 강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 9장 4절입니다.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10장 7절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무도 주님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도 저를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입니다.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심판의 능력을 쏟아부으실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10장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라고 말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며, 진정한 하나님을 믿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같은 진리가 두 가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불변성과 편재성, 전능하심이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이 됩니다, 그렇죠? 기쁨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불신자에게는 그 동일한 사실이 두려움이 됩니다. 보십시오.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주에는 우리가 저지른 모든 끔찍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어떻게 우리를 받아주시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린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제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여러분이 나아오기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사실이 두려움이 아닌 복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과 그 말씀 안에 있는 진리, 그리고 우리 삶에 미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 성령님께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 이들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어질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는 성도들, 지금 참석하고 있는 성도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귀한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립니다. 우리 자신과 오늘 말씀을 주님께 드리오며,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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