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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모든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적입니다. 잠언 9장 10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비로소 지혜로워질 수 있고, 거룩하신 분을 알아야 명철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 최고의 목적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우리 주님은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시면서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의미입니다. 영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때로는 그다지 지혜롭지 않아 보였던 사람에게서 귀중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바로 솔로몬과 다윗입니다. 다윗은 때로 매우 지혜로운 말을 했습니다. 역대상 28장 9절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정말 좋은 충고입니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존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의 가장 높은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이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가장 높은 목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알기 원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죠. 호세아 6장을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채로 제사만 드렸죠.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은 그 어떤 외적인 것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 알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높은 목표이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떻게 하면 시각적으로 더 잘 보여드릴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냈는지가 떠올랐습니다. 에스겔 1장에 하나님의 현현이 나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1장은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에스겔은 자신이 본 하나님의 현현을 이야기하며 예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의 마지막을 보면, 지금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8장 35절입니다.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히브리어로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현현으로 시작해서, 영원한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1장 1절에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48장 35절에서 하나님으로 마무리하는데, 그 사이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시작과 끝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에스겔은 그 중간에서 무엇을 반복해서 말하려는 것일까?” 그래서 에스겔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알기 바라시는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6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눈으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6장 7절입니다. 여러 절을 읽어 내려갈텐데, 제가 읽는 부분은 각 절의 처음이나 중간, 끝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읽습니다. 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 10절입니다.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3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7장 4절 하반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9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이제 건너뛰고 11장 12절로 갑니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12장 16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20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3장 9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절입니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21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23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4장 8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러분, 여기에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보이시나요? 15장 7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20장 12절로 더 가보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고.” 20절입니다.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26절입니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라.” 38절입니다. “너희가 나는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42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4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22장 16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24장 24절입니다.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27절입니다.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요점을 구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에스겔서 끝까지 이 표현이 반복됩니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39장에서만 두 번, 38장에서 한 번, 이렇게 계속되다가 40장에서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천년왕국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이 모든 것은 '너희가 내가 여호와임을 알게 하려는' 하나의 큰 예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마치 덤불 속에 숨어있는 부활절 토끼처럼 우리가 찾아다니면 "이제 가까워졌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드러내 보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한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솔로몬도 잠언 2장 3절에서 지혜로운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 아들아,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하나님에 대해 계시된 모든 것을 아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란다. 바로 하나님 알기를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란다. 돈이나 성공, 혹은 다른 것을 추구한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없단다. 내 아들아, 은을 구하듯 하나님을 찾고 감춰진 보물을 찾듯 구한다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기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이죠.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계신가?'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첫 두 질문에 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 질문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속성이나 성품으로 정의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성경에서 계시된 속성뿐입니다. 하나님께 몇 가지 속성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기억하십니까? 몇 가지입니까? 무한개입니다. 셀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 중 일부만이 계시되었을 뿐입니다. 그 계시된 것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만 선택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자,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편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의식으로 동시에 모든 곳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셋째, 지난 주일에 살펴봤죠,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다른 일만큼 쉽게 하실 수 있으며,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항상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십니다.

이제 오늘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 두 가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시편 147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한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무한합니다. 하나님은 알 수 있는 것도 아시고, 알 수 없는 것도 아십니다. 디모데전서 1장 17절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유다서 1장 25절도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27절에서 바울은 “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천사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몇 가지를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하나님만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비할 데 없는, 무한한 지혜와 이해력과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배우신 적이 없다는 사실, 여러분 아십니까? 기도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죠. “하나님, 병상에 있는 장모님 상황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래, 메모해 둘게.” 이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필요한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놀랄 만한 일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도 배우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누가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 40장 13절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누가 하나님을 가르쳤습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11장 3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가르쳤습니까? 아무도 없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여기 앉아있는 우리 대부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가장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는데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믿기 힘든 일이죠. 제가 곧 말씀드릴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하심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또 다른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사야 48장이 모두 설명해 줍니다. 이사야 48장 8절입니다.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나니.” 하나님 말씀을 전혀 듣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그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께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네가 정녕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 불린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음을 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사람을 사람으로 보실까요?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모태에서부터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모든 것을 아십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너희를 안다. 너희는 처음부터 썩은 열매였다. 모태에서부터 나를 배역했다. 나는 죄를 미워하지만 너희를 구원했다. 너희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나의 속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세상에 나의 사랑의 속성을 보이고, 천사들에게는 나의 지혜의 속성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모두 나를 위한 것이다.”

여러분, 제가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는 감추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대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걸 아십니까? 심지어 여러분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에게는 별 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여러분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왜 머리카락을 세실까요? 실제로 세실 필요도 없으십니다. 본질적으로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단순히 증명하시려고 머리카락 장부를 기록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배우거나 찾아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겉모습을 넘어 더 깊은 것까지 아십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 앞에서는 마치 유리처럼 투명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입니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여러분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가릴 수 없습니다. 겉모습을 보시는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도 똑같이 보고 계십니다. 구름이나 어둠, 밤도 하나님의 눈을 가리지 못합니다. 시편 139편 12절입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제 생각에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은 대부분의 죄가 음침한 곳에서 행해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는 밝은 빛 속에 있습니다. 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뭔가를 숨길 수는 없습니다.

속삭인다고 해서 하나님 귀에 안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39편 4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삭임도 훤히 들으십니다. “제 생각도 다 아시나요?”라는 질문이 떠오르겠죠.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 지식을 벗어나는 아주 작은 생각도 떠올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66장 18절입니다.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자신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까지도 아시기 때문에 누구의 증언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니고데모는 입으로는 한 가지를 물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것을 궁금해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묻지도 않은 마음속의 질문에 답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집안의 어떤 곳에도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는 없습니다. 다시 이사야 66장 18절입니다.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하나님은 모두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시는 모든 것은 옳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2장 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올바르고 진실되게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호세아 13장 12절 말씀을 인생 말씀으로 삼았습니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 구절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작은 일이 몇 가지라도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구절은 무슨 의미인가요? 하나님이 모든 죄를 다 아시지는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라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성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기록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무슨 뜻일까?"라고 궁금해하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죄가 미래에 있을 심판의 날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할부 계획과도 같습니다. 지금 죄를 짓고 나중에 그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세상을 둘러보면 알 수 있죠. 때로는 경건한 사람들이 오히려 불신자보다 더 힘들어 보입니다. 왜 때로는 악한 자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까요? 하지만 영원히 번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에브라임처럼 죄가 일시적으로 감춰져 있는데 앞으로 올 심판의 날을 위해 쌓여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2장 5절부터 6절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죄를 지으면서 미래의 어느 날을 위해 죄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심판의 날이 오면, 지금은 감춰져 있거나 미래를 위해 묶여있는 그 죄들이 모두 드러나고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정말 모든 것을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지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지혜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정의하면, 지혜는 거룩한 뜻을 가지고 행하시는 전지하심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시는 모든 일에 완전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시작부터 끝을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 사이의 모든 과정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를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죠.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완전한 지혜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적인 전지하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정말 모든 것을요.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에서부터 생명체의 아주 작은 세계에 이르기까지 창조물을 보면 그 지혜가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정말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우주를 만드시고, 그 모든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이루어내는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울 따름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 과정의 모든 결과는 하나님의 지혜를 완벽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4편 2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에베소서 1장 11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 곧 하나님의 뜻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또한 구원이, 구속이 지혜의 행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약한 자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사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과 문벌 좋은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통해서 살펴본 바 있죠. 또 에베소서 3장 10절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를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제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제게 큰 위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궁금해하실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저를 알고 계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저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닌데도 저를 아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하니까요.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아마도 세상에는 그저 조용히 살아가는, 유명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말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아실까? 나는 그저 조용히 살아갈 뿐인데…”

말라기 시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실 때였고, 선지자 말라기는 강력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도 이 심판 속에 휘말릴 수 있겠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다가 우리를 잊으실 수도 있잖아.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고 계실까?" 말라기 3장 16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이들은 계속해서 걱정스럽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계실까?" 계속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기념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누가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지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게 정말 기쁩니다. 하나님은 존 맥아더를 아시고,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도 아시며, 그래서 제 이름이 그 책에 있다는 것도 아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저를 그 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 하나님의 지식을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저를 아시고, 제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아십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시편 56편 8절입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무슨 뜻일까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동양에서는 애곡하는 자들, 울음꾼을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울었죠. 어떤 울음꾼은 눈물을 병에 담아서 보여줬습니다. 그러면 이들에게 돈을 지불했는데, 아마도 자신이 제대로 일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었을 겁니다. 눈물이 담긴 병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식이었죠. 이렇게 와서 애곡하는 자들이 있었고, 눈물을 병에 담아서 울었다는 증명으로 남겼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의 눈물을 하나님의 병에 담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제 눈물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저를 아실 뿐만 아니라, 제가 흘린 눈물도 모두 아십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겪는 모든 시련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 여러분의 눈물을 하나님의 병에 담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하나님은 아주 큰 병을 가지고 계실 텐데, 어쩌면 그 눈물로 바다를 채우셔서 바다가 짠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하나님의 병에 담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하나님은 제 불안과 아픔을 아실 뿐만 아니라 제가 누구인지도, 제 모든 필요까지도 아십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는 새보다 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저를 아십니다. 제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의 눈물을 아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의 필요를 아시고, 그 모든 것을 돌보십니다. 저는 새보다 귀하고, 백합보다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피었다 내일 지는 풀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저를, 저의 불안을, 저의 시련을, 저의 눈물을, 저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들으십시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실수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무한한 속성과 무한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데 여러분이 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실수하셨다고 말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아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실수라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부족함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첫번째로 위로가 됩니다. 두번째로는 확신을 줍니다. 어릴 때는 전지하심이라는 교리가 참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늘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뭘 하는지 우리는 모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아신단다.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아시기 때문이지.” 아까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말씀드렸죠? 이렇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때는 전지하심이라는 교리가 정말 부담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요한복음 21장을 공부하고, 또 조금 성장하면서 베드로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자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확신시키려 했던 것 기억하시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 계속 물어보시자, 마침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교리에, 하나님의 어떤 속성에 의지했을까요? 바로 전지하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전지하심은 놀라운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에서 지켜보시며 감시하신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반쪽짜리 이해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지 않는다면, 어떤 날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조차 모르실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만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쓴다는 것조차 모르실 겁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날들이 많을 겁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제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다는 걸 하나님이 어떻게 아실까요? 하나님은 정말 많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 마음까지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게 얼마나 큰 확신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실수를 저지를 때조차 제 사랑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 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해볼 점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바로 훈계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하신다는 걸 아신다면 지금 하지 않는 일 중에서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걸 모르시고, 절대 알아내지도 못하실 거라는 걸 안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걸 다 적자면 종이가 모자랄 것 같네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전지하심의 교리가 가져오는 세번째 실제적인 유익은 바로 훈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교실을 떠나지 않으시는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면서도 늘 사랑으로 훈계하시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장 아픈 곳이 어딘지, 죄가 무엇인지, 가장 썩은 부분이 어딘지 알고 싶다면,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을 때 무엇을 할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마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방으로 올라가서, 그 보좌 앞에 서서, 하나님 면전에서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몸으로 행한 모든 일들을 언젠가는 설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있죠. 또 고린도전서 4장 5절은 그날이 오면 어둠 속에 감춰진 모든 것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길과 생각, 태도, 모든 것을요.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훈계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신다면 저는 죄를 짓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훈계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제 마음을 아신다는 확신과, 제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아시고, 제 눈물을 보시며, 제 필요를 아시고,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그리스도인은 어떨까요? 이들에게 전지하심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비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을 보면서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의미로 들릴까요? 먼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위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만약 속임수를 써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연기에 속으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위선은 완전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면서 이스라엘의 민낯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셨습니까? 가면을 완전히 벗기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들은 말씀이 끝날 무렵에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전도서의 지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전도서 12장 1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겉치레에 속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가면을 보시고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무엇을 보시죠?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그리스도를 모르신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그 어떤 속임수도 통하지 않습니다. 위선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나 하나님을 모르는 분들께 두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확한 심판이 약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로마서 2장 2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최후의 심판과 불못, 그리고 누가 지옥에 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심판은 반드시 공정한 심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에 대해 완벽히 알고 계시기에 진리대로 심판하실 것이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16장 17절입니다.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숨길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심판은 진리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을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용서받지 못한 상태인지도 아십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만 다녔는지도 아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선행만 해왔는지도 아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지 없는지도 아십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아왔는지 아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제가 속이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불신자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진정으로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하나님의 지혜에 동참해야 합니다. 마치 솔로몬이 아들에게 “지식을 얻으라”고 반복해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특히 8장 1절부터 36절까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여기에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의 지식을 좇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9절입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그러니까 불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위선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대로 심판하실 것이니 인간의 지혜를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어디에나 계시며,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아십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제 생각에 거룩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겁니다. 마치 왕관 위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그야말로 궁극적인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천사들이 노래할 때 "영원하시다, 영원하시다, 영원하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하시다, 신실하시다, 신실하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우시다, 지혜로우시다, 지혜로우시다.” 혹은 능하시다, 능하시다, 능하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표하는 면류관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출애굽기 15장 11절입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누가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럽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거룩이 주님의 이름임을 여러분 아십니까? 시편 111편 9절입니다.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거룩이 그분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욥기 6장 10절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는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8절에서는 네 생물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쳤습니다. 사무엘상 2장 2절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말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는 방법은 죄와 비교하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제 생각에 성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이사야 6장입니다. 지금 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습니다.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기억하시겠지만 그 천사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핀 숯을 집어서 이사야의 입술에 갖다 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기 전에,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는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부터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심하게 떨었습니다. 그야말로 극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하심을 마주하는 순간 자신의 죄성 때문에 존재 자체가 흔들렸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자신의 죄와 비교해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이해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죄를 알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사야는 높이 들린 하나님을 보고 난 뒤에야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제서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는 거룩함과 부정함이라는 극단적인 간극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정하고,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를 비교할 때 존재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을 마땅히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거룩한 기준에 맞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체가 기준이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거룩하십니다.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시고, 실수하지 않으시며,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반드시 올바른 이유가 있거나 올바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은 일만 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는 정도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무한히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하심은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요구되는 조건입니다. 천사들이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즉시 내쫓으시고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된 곳을 마련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마찬가지로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곳,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임재 안에,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으려면 반드시 거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목사님, 어떻게 제가 거룩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주시고 우리를 거룩한 존재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제 여러분은 거룩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조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봐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죄에 대한 증오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의 본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혐오하시고 미워하십니다. 하박국 1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악을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계십니다. 죄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산헤립 왕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성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산헤립의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대비되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악한 애굽인들이 익사하는 장면에서 무엇이 그들을 익사시켰는지 아십니까?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겠습니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이 익사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입니다. 그들의 악을 용납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아모스 5장에는 이런 강력한 말씀이 있습니다.“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이 불순한 마음에서 나올 때는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 모든 것을 미워하니 그칠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장 불쾌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십니다. 시편 11편 7절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죄를 미워하신다는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놀라운 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절대적으로 미워하시며,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저를 아시고 제 죄를 미워하시면서도 저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전지하심, 그리고 사랑이 모두 동시에 작용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깨달음입니까. 하나님은 저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시고 제 안의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만, 그럼에도 저를 사랑하십니다. 암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은 사랑하지만 암은 미워합니다. 그래서 몸을 지키고 건강하게 유지하며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면서, 동시에 암을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암은 미워하지만 몸 전체를 미워하지는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인간을 보실 때 그 존재는 사랑하시지만 죄는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의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선택한다면 죄를 허용하실 수는 있지만, 죄 자체를 의도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누구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 짓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이 죄 짓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죄 많은 삶을 살다가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회심 이야기를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라고 하면서 믿게 될 거니까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셨다가 나중에 할 말이 생기게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설득력 있게 들리지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의 죄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시험하고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입니다.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먼저 창조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2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거룩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창조에서 드러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도덕법에서 나타납니다. 인간이 망가뜨리고 지워버리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는 도덕법은 하나님이 거룩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2절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도덕법을 제정하심으로써 스스로가 의롭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존재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창조와 도덕법뿐만 아니라, 제사법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여러 동물들을 제물로 드리게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했고,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도덕성과 거룩하심을 증명하는 것이었죠.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창조와 도덕법, 제사법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죄에 대한 심판에서도 드러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보면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유다서 4절에서는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을 거슬러 행한 불경건한 행위로 인해 정죄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벌하셔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십자가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예수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시지 않았나요?"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분의 거룩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증거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셔서 그 거룩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고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6절을 보면 우리가 간과하기 쉽지만 매우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즉, 만일 단순한 제사였다면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죽으셔야 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들어보십시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 자신이 오셨고, 하나님 자신이 나타나셨습니다.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너무나 완전해서 죄를 짊어지고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최고의 희생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대가를 요구했고, 결국 하나님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거룩함의 실제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불신자들에게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삶에서 거룩함을 요구하며,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에베소서 4장은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은 여러분이 거룩하기를 원하시며,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입니다. 반면, 만일 여러분이 불신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 작용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이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심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반드시 공의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명확하게 나와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바로 거룩함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거룩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실제로 이 위치에 걸맞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위치적으로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거룩할 때 세상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19절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그 차이를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면, 죄와 씨름하며 경건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고 있다면, 바른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욥기 22장의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삶에 죄가 있을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 얼굴을 들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처럼 여러분도 삶에 죄가 있을 때 기도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끼셨나요? 욥기 2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멀리하면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죄책감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거룩해짐으로써 세상과 구별됩니다. 우리는 거룩해짐으로써 담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룩해짐으로써 평안을 누립니다. 이사야 57장 21절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0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편 51편의 다윗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정한 마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잠언 13장 20절이 말하는 것처럼 지혜로운 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들과 생각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 말씀들이 우리 삶에서 열매 맺게 하여 주옵소서. 이 진리들을 우리 마음 속에 새겨 주옵소서. 주님의 축복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저녁에 다시 모여 원수에 대해 더 배우고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게 하옵소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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