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오전에는 (에베소서) 5장 18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17절까지 살펴봤죠. 오늘은 18절 말씀을 통해서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구절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매우 익숙한 구절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이해하기 원하는 모든 신자가 반드시 공부하고 알아야 할 영역입니다. 정말 중요한 구절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영역은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께 에베소서를 전체적으로 보여드리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에베소서를 최고급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1장, 2장, 3장에서는 자동차의 엔진에 중점을 두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세 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가 가진 동력 장치, 즉 부활의 능력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유산을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1장부터 3장 13절은 신자를 최고급 자동차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3장 14절부터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시동 버튼’을 설명합니다. 아무리 좋은 최고급 엔진이라도 시동을 켜지 않으면 소용이 없겠죠. 그래서 3장 13절, 14절 이후부터는 시동 버튼에 대해, 즉 엔진을 어떻게 켜는지, 시동을 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신다는 것을 살펴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동력이 생기고 엔진이 작동하게 하는 열쇠는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부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 이르면, 그러니까 차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4장은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알려줍니다. 즉 ‘합당한 행함’에 관한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차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차입니다. 아주 멋진 길에서 경이롭게 주행할 것입니다. 독특한 길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세상의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교만이 아니라 겸손이 있습니다. 불화가 아니라 연합이 있습니다. 사랑과 빛과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연합 안에서 행하고, 겸손 안에서 행하고, 독특함 안에서 행하고, 사랑 안에서 행하고, 빛 안에서 행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혜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있는 최고급 차가 달려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의 끝 부분에서 바울은 몇 가지 장애물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최고급 차를 타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에 따라 달리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6장 10절부터 나오는 사탄이죠. 우리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을 상대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고, 6장 18절이 말하듯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를 어떻게 강력하고 뛰어난 최고급 자동차로 설계하셨는지 그 전체적인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하고, 바울이 ‘합당한 행함’이라고 부르는 길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화합, 겸손, 독특함, 사랑, 빛, 지혜 안에서 행합니다. 그러다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와 기도라는 무기를 통해 사탄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연료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차가 움직이려면 연료를 넣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연료를 넣나요?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것이 신자의 연료입니다. 차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차량의 모든 부분이 아무리 제대로 되어 있어도 연료를 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전에 잡지에서 본 사진이 하나 떠오릅니다. 현대 기술 문명을 거부하고 소박한 농경생활을 하는 아미쉬파 농부가 어쩌다 차를 받게 되었는데, 차가 배달되자 차 범퍼를 말에 매달고는 멋지게 타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차량을 육신이라는 말에 매달아 성령의 연료 대신 육신의 말로 끌고 다닙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의 말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행하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에너지와 힘과 자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도 잘 닦여 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그 길로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동력을 받아야 합니다. 5장 18절부터 6장 9절까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이 충만함이 모든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의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성령 충만이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합니다. 19절입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20절입니다. “...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성령 충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21절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6장은 성령 충만이 집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합니다. 6장 5절은 직장이나 일터에서 종과 상전, 그러니까 직원과 사장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은 우리의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입니다.
지난주에 지혜로운 행함에 대해 살펴봤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잠시 복습해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매우 꼼꼼하고 세심하게 주변을 살피고 판단하면서 정확하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지혜 없는 자가 아니라 지혜 있는 자 같이 지혜 안에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지혜롭게 행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에 세월을 아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런 다음 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잘 들으십시오. 지혜롭게 행하는 마지막 요소는 성령 충만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요소입니다. 자동차를 말에 매달고는 말이 자동차를 끌게 하는 것만큼 바보같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을 육신의 말로 끌고 다니려 하면 안 됩니다. 어리석은 일이죠. 지혜 있는 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고, 이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성령으로 동력을 삼을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차와 고급 휘발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차에 기름을 넣지 않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주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와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이라는 하나님의 자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미 가진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부터 3장의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가장 위대한 연료의 원천, 즉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실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최고급 차량과 신성한 정유회사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차에 기름을 넣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하거나 성령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성령님께 맡겨야 합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점을 좀 더 살펴보겠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구절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바울이 제시하는 대조의 앞부분인 "술 취하지 말라"는 구절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주에 걸쳐서 첫번째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입니다.
바울은 ‘술 취함’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매우 명확한 대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심오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18절부터 20절 또는 21절까지의 이 부분을 보면, 세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18절은 대조, 18절 끝부분은 명령, 즉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이고, 그리고 19, 20, 21절은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 감사를 표현하는 것, 그리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명령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입니다. 이 부분도 앞으로 살펴볼 겁니다. 이에 앞서 오늘 오전과 다음 주 오전에는 이와 대조를 이루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를 살펴보겠습니다.
술 취함과 포도주를 마시는 문제, 그러니까 술을 마시는 문제는 오늘날 큰 문제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모두가 마시지 말아야 한다. 술 마시는 것은 죄이다"라고 말이죠. 또 "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셨고 성경의 인물들도 그랬고 구약에서도 그랬다. 나는 단지 성경적이고 싶다. 성경적인 기독교인이 되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물론 약한 형제를 실족시킨다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약하다면 애초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강해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우리는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그런 일에는 절대 관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그런 일을 하는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보아라! 우리는 모범 신앙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다 아시다시피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음주의 허용에 관해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오늘과 다음주에 이 내용을 살펴볼 텐데, 오늘은 먼저 기초를 다지겠습니다. 다소 학문적인 부분을 살펴볼 것이고, 다음 시간에는 제가 만든 <그리스도인의 포도주 목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주에 다루겠습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이 여러분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18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에 취하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지혜의 정반대죠. 15절은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고 하고, 17절은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라고 하고, 18절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 가장 지혜가 없는 사람은 술에 취해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혜로운 일입니다. 반면에 술 취하는 것은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입니다. 이렇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이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명확한 사실입니다. 세상은 술에 취해 있습니다. 술 광고를 보면 항상 품위 있는 신사가 등장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술을 마시면 마치 품위 있는 사람이 된다는 느낌을 줍니다. 술 광고에 도랑에 누워 있는 침 흘리는 술 취한 사람이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알코올 중독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자, 이제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일반적인 의미였을 겁니다. 즉,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라는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기쁨을 찾고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기쁨과 위로를 얻고 싶다면, 술병 바닥에서 찾지 말고 성령 안에서 찾으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여러분의 자원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기뻐하고 싶어합니다. 즐거워하고 싶어합니다. 계속 비참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길 원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빼앗는 분이 아닙니다. "저기 즐겁게 지내는 자가 있군. 얼른 잡아가야겠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을 쏟아붓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하셨습니다. "행복한 사람은"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기쁨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일서 1장 4절에서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에서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소리쳤고 충만한 기쁨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탄생하신 날에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기뻐하기를 원하시지만, 잘못된 곳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올바른 곳에서 기쁨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상황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 상황에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려고 합니다. 마약에 완전히 취해 있던 한 아이에게 "이게 정말 네 문제에 대한 답이니?"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하지만 적어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제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라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도피하는 것이죠. 세상은 쾌락이라고 말하지만 도피입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행복해지려는 겁니다. 사람들은 위로받길 원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이런 방식으로 도피합니다.
언젠가 술병 하나를 봤습니다. 위스키의 일종인 것 같았습니다. '서던 컴포트'라고 쓰여 있더군요. ‘컴포트’란 한국말로 위로, 위안, 이런 뜻이죠. 하지만 술은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서던 컴포트'가 그렇게 잘 팔리는 걸 보면 참 놀랍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위로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위로자이십니다. 바울은 위로받고 싶고 기뻐하고 싶다면, 위로와 기쁨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 찾으라고 말합니다. 술병 밑바닥에서 찾는 것은 인간의 방식입니다. 술에서 깨면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취하는 것은 결코 염려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취함은 결코 근심을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단지 또 다른 걱정을 더할 뿐입니다. 더 많은 문제를 만들 뿐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알코올 중독은 질병이 아니라 죄입니다. 신체적 측면에서는 결국 병에 걸리게 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 따르면 알코올 중독과 술 취함은 죄입니다. 타락의 표현입니다. 죄로 다루어야 합니다. 만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영광으로 가득한 기쁨을 원한다면, 세상이 꿈꿀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원한다면, 바울은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해답을 술병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술을 마신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단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술 취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술 취함의 모든 예시는 재앙입니다. 좋은 경우가 없습니다. 결코 어떤 것도 더 좋게 만들지 않습니다. 결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롯은 술에 취해 딸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습니다. 나발은 술에 취해 경거망동 했습니다. 결정적인 시기에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셨습니다. 엘라는 술에 취해 시므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벤하닷과 동맹을 맺은 왕들은 함께 술에 취해서 모두 학살당했습니다. 오직 벤하닷만 살아남았고 그것도 (아합의) 죄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벨사살, 다니엘 5장을 보면 벨사살은 큰 잔치를 열고 포도주를 마시며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술에 취해 있는 동안 벨사살은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고린도인들은 술에 취해 성찬식을 모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를 병들게 하셨고 일부는 처형하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술 취함은 성경에서 항상 끔찍한 일, 자제력 없는 행동, 부도덕, 방탕한 행동, 무모하고 거친 행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술에 취하는 것이 음행, 부도덕과 연결되어 있음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제력 없는 무모한 행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술 취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말 그대로 전부 때려 부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으려고 했지만 저에게 술병을 던져서 벽에 부딪쳐서 깨졌습니다.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통제불능이었습니다. 저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또 묶여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모습도 봤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술에 취하면 항상 비극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교회의 지도자나 장로가 되려면 술을 즐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을 하는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술 취하는 자는 섬길 자격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전에는 그렇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보시다시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가증한 우상 숭배, 성적 문란함은 모두 술 취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술에 취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만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술에 취하는 사람이라면 사귀지도 말아야 합니다. 10절로 돌아가보면, 만일 그런 사람이 불신자라면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6장 9절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다시 말해서 과거에 술에 취해 있었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술에 취한다면, 즉 오늘날 알코올 중독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술을 계속 마신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자칭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술에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술 취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술에 취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술 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군가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제 음주 습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술을 다시 마실 수는 있겠지만, 만일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면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이죠. 아마도 시간이 흘러서 그럴 수도 있겠죠. 제가 알기로는 그리스도인 중에도 처음에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어느 시점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결국 죄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죠. 그런 사람들이 정말 구원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죠. 죄에 빠진 사람들도 때로는 주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만일 여러분이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술 취하는 자로 남아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차이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스스로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이번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계속 말씀드렸습니다. 이 영역에서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영역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정말로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기쁨과 위로와 해결책이 생길 것이고 더 이상 술이 필요하지 않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수 있고,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키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음주 문제가 있었던 많은 분들을 하나님이 놀랍게 변화시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복종했다면, 여러분의 회심이 진실하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또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있다. 너희의 기쁨과 즐거움을 술병 밑바닥에서 찾지 말고, 놀라우신 성령님께 찾으라." 하지만 잘 들으십시오.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저 부차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주된 의미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말하는 주된 요점은 종교입니다. 바울은 지금 종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 체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술 취함은 이방 종교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은 신들과 교제하는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술에 취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비 종교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종교 체계의 뿌리입니다. 황홀경을 통해 신들과 교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광란, 황홀경, 빙글빙글 도는 수도승들, 자기 최면, 귀신에 씌이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황홀경, 헬라어로는 "엑스타시아(ekstasia)"와 "엔투시아스모스(enthusiasmos)"라고 불렀습니다. 자신들을 문자 그대로의 광란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또 마셨습니다. 이렇게 술에 취해야 신들과 교제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듣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 이후로 사람들은 마약이나 술에 취하면 더 높은 의식 수준에 도달하고, 의식이 높아지며, 문자 그대로 종교적인 방식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비주의자들, 동양 신비주의, 오컬트,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 종교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더 수준 높은 종교적 의식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교 역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거의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가 처했던 문화적 측면에서 어떻게 이런 사상이 나왔는지, 어떻게 관련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위대한 신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 제우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제우스는 위대하고 강력한 신이었습니다.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아이를 갖게 했습니다. 서로 만나지도 않고 이렇게 했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제우스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는 자는 즉시 제우스의 영광에 의해서 타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하나님 아버지를 모방한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우스와 세멜레는 결코 만난 적이 없지만 세멜레가 제우스의 아이를 갖게 됐답니다. 세멜레는 아이의 아버지를 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의 존재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에서 즉시 타 죽었습니다. 제우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자궁에서 빼내서 자신의 허벅지에 꿰매넣었답니다. 아기는 제우스의 허벅지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자란 후에 태어났답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닙니다. 이 아기 신이 태어났고 제우스의 운명에 따라 이 아기 신은 세계, 즉 지구의 통치자가 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신은 지구를 통치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이미 지구에는 타이탄이라고 불리는 존재들, 하위 신들이 있었습니다. 타이탄들은 땅의 아들들로서 지구를 다스렸습니다. 제우스의 아들이 내려와서 지구를 장악하려 하자 타이탄들은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고는 먹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제우스는 아기의 심장을 구해내서 삼키고는 아기를 다시 낳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이야기 아닙니까? 실제로 그리스 신화에 있는 내용입니다. 원본에서 읽은 겁니다. 제우스가 심장을 삼킨 후에 아이가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디오니소스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 디오니소스라는 이름이 그리스 종교와 바빌론의 고대 신비 종교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디오니소스는 매우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관한 어떤 이야기를 읽어도 어디에서나 이 이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제우스는 지구의 최고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가 태어났습니다. 제우스는 타이탄에게 분노해서 번개로 모든 타이탄을 폭파시켰습니다. 타이탄이 재로 변했고 그 재에서 인류가 나왔답니다. 이게 끝입니다.
그리스인, 그러니까 헬라인들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지구를 통제하게 되었고, 디오니소스가 지구를 통제함에 따라 종교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디오니소스가 발전시킨 종교는 인간이 불태워진 타이탄들의 재에서 일어난 승천의 종교였습니다. 이 인간들은 신성한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신들과 교감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황홀경과 감정의 종교였습니다. 광란의 음악, 미친 춤, 성적 도착이 있는 그런 종교였습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술에 취한 채로 일어났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두 함께 모여 음악이 시작되면 춤을 추고 광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생식기 부위를 절단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남근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종류의 일을 벌이면서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취하고, 신비한 황소의 날고기를 먹는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결국 큰 소리로 디오니소스를 부르며 “오소서, 구세주여”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교도들은 이런 방식으로 신을 숭배했습니다. 음악, 광란적인 춤, 황홀경, 엔투시아스모스(enthusiasmos), 성적 도착행위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모든 행위는 술에 취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으로 알려지게 된 겁니다. 포도주의 신이죠. 그러니까 이 술취함의 핵심은 진정한 종교를 위조한 사악하고 이교도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고 말할 때, 단순히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지 소소한 재미 이상의 훨씬 더 깊은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모조품입니다. 사탄은 이처럼 술 취함을 통해 사람의 마음과 몸을 가둡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스어로는 디오니소스, 라틴어로는 바쿠스입니다. 같은 신입니다. B-A-C-C-H-U-S입니다. ‘바쿠스 축제(바카날리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술에 취하는 축제입니다. 바쿠스는 포도주의 신입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바쿠스는 술에 취해 즐거워 보이는 포도주의 신입니다. 바쿠스 주변에는 님프들이 있었습니다. 님프들은 하얀 옷을 입은 작은 여인들로 묘사되었습니다. 또 옆에는 플룻을 연주하는 사티로스들이 있었습니다. 님프들과 사티로스들, 그리고 유쾌한 포도주의 신 바쿠스는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와 동일한 신이었습니다. 숭배 방식도 동일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성지를 방문하면서 아랍 국가들, 레바논, 베이루트, 시리아, 요르단 등지에 갔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발벡(Baalbek)이라는 도시에도 갔습니다. 바알(Baal)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인데, 놀라운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암석으로 만든 긴 돌이 기둥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발벡에는 주요 신전 세 개가 같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세 신전 중 가장 잘 남아 있는 신전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 즉 바쿠스를 위한 신전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이곳이 종교 의식을 위해 모이던 장소라고 저한테 설명해 주었습니다.
세 개의 신전은 각각 동일한 숭배 표현의 세 가지 다른 요소를 나타내는데, 그 절정은 바쿠스 신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 다가가면 거대한 기둥과 난간, 그리고 다양한 석재 조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무엇인지 알기 어렵지만 가까이 갈수록 그 모든 조각이 포도잎과 포도송이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전 전체가 문자 그대로 포도와 덩굴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것이 숭배를 표현하는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술취함을 상징했습니다. 심지어 포도주가 넘쳐 흐를 때, 즉 흘린 포도주나 토해낸 포도주가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도록 신전을 설계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술에 취해 벌이는 난잡한 축제였습니다. 성적 행위도 함께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말 이면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단순한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과거는 술 취함을 통해 신들과 교감하던 곳에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감하기를 원한다면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전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위적인 것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종교 의식의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성령 충만함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부패는 고린도 교회에도 존재했습니다. 잠시 고린도전서 10장을 함께 보겠습니다. 사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성도들이 악한 체계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끊을 수 없었던 거죠. 이교도 사회에서 경험하던 부패를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면서 파벌을 형성했던 교인들은 교회에서도 파벌을 형성했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면서 영웅을 숭배했던 교인들은 교회에서도 영웅 숭배를 했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면서 철학자들에게 매료되었던 교인들은 교회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면서 서로를 고소했던 교인들은 교회에서도 서로를 고소했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며 교만하고 자아 중심적이고 무관심했던 교인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며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교인들은 교회에 와서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교도로 살아가며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었던 교인들은 신자가 되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교회에서 성령의 진정한 은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이유는, 이교도적 방식에서 영향을 받아 오염시키고 부패시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의 방언이나 예언 등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이교 세계에서 벌어지던 일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전체 혼란의 근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모든 것이 모조품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교 사상을 교회로 끌고 들어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부패시켰습니다.
초대 교회와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가장 귀한 예배이자 아름다운 기념식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찬식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설계하셨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도록 설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하도록 설계하신 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술 취함을 통해 신들과 교류하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성찬식 때에도 술에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10장 16절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한 떡, 한 피, 한 몸에 참여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단일성의 근거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우리가 이 둘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말하듯, 하나의 떡과 하나의 몸으로서 말이죠. 하나의 몸을 그렇게 나눌 수 없습니다. 주의 떡을 먹고 주의 잔을 마시고 나서 술에 취하고 우상을 숭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21절에서 말하듯,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뒤섞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노엽게 만들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주님보다 더 강해야 할 겁니다.
바로 그것이 요점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아름다운 성찬의 잔인 주님의 잔을 마셨다가, 술 취함의 잔인 귀신의 잔을 마시며, 술 취함을 통해 가장 높은 수준의 종교적 의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고린도 교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순히 기념의 잔을 마심으로써 종교적,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대조입니까.
11장 19절로 가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해집니다. 바울은 그들 가운데 이단이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드러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헬라어를 직역하면 “너희가 함께 모여서 먹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입니다. 너희가 함께 모일 때, 그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모두에게 “자, 이제 성찬식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성찬식이라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각자 자기 식사를 먼저 하는 것은 일종의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배고픈 상태로 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술에 취해 있습니다. 이들이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식탁이 아니라 귀신의 식탁입니다. 과거에 했던 방식대로, 이교도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 뒤에 숨겨진 문제였습니다. 바울은 참된 예배와 참된 성찬이라는 신성한 현실과 사탄의 모조품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바울은 “이전에 했던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에서는 이를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술 취함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약물을 통해 종교적 초의식 수준에 도달하는 신비주의에 빠졌던 적이 있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가짜 종교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바울은 순전한 종교 체계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의 모조품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채우심으로써 하실 수 있는 일의 모조품을 만들지 마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요.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사탄은 하나님의 흉내를 내면서 언제나 인위적인 가짜 기쁨, 가짜 교제, 가짜 성찬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에베소서 5장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재미있는 점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것이 종교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문맥 때문입니다. 이교도 종교에서는 술에 취한 뒤에 예배 의식으로 들어갔습니다. 술에 취하면 노래와 춤과 광란의 활동에 빠졌습니다.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18절 다음에 19절에서 진정한 기독교 예배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예배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모든 일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영적이고 진정한 예배와 사탄이 만들어낸 거짓 예배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요점입니다. 잘 아시겠죠?
술에 취해야 품위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돋보이지 않습니다. 술에 취한다고 특별해지지 않습니다. 사탄의 오래된 거짓말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 모든 문명이 술 취하는 방법을 발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항상 사람들이 술 취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에콰도르의 정글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발로 밟고 돌로 갈아 만든 무언가를 마시고 비틀거리는 원주민들을 보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문화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랍권에서도 보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보았습니다. 제가 가본 모든 곳에서, 제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서 말입니다. 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것이 저주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셨을 때, 땅의 열매도 부패해서 사탄이 파괴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그 안에는 방탕함이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방탕함"이라는 단어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헬라어로 아소티아(Asōtia)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방종을 의미합니다. 통제되지 않는 방종. 술 취하지 말라는 것은 술취함이 통제되지 않는 방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소티아(asōtia)를 번역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음탕"입니다. 음탕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 얼마나 아름다운 대조입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간결한 대조인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무엇이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어디에서 기쁨을 찾습니까? 어디에서 유쾌함을 찾습니까? 어디에서 위안을 찾습니까? 술병에서 찾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세상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지 말라고는 하지만, 그냥 마시기만 하고 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부분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다음 주일 아침에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일곱 가지 원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에베소서 한 가운데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고 있는 이 작은 구절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정말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세상이 결코 알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기쁨, 위안, 흥분, 성취,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원천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은 것들로 자신을 채우고자 합니다. 포도주, 술, 돈, 쾌락, 소유물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고 그 상태를 유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세상의 거짓과 숙취가 아니라, 시편과 찬송과 영적인 노래로 서로 말하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고 찬양하며, 감사드리고 서로에게 복종하며, 남편과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돌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오늘 본문에서 흘러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옵소서.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채우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를 비워 성령이 그 빈자리에 충만히 채워질 수 있게 하옵소서.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교제할 수 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적 의식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넘치게 하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다음 시간에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할 때,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성도들을 준비시켜 주옵소서. 오늘 아침에 말씀으로 우리와 교제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