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오전에는 다시 에베소서 5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8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리고 있는데, 이 구절이 진리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이 없으신 분들은 교회에 비치된 성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제가 읽는 동안에 눈으로 따라 읽으시길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지난주에 우리는 에베소서 5장 18절을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이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는 것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예로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곁에 있을 때에 기적을 행하고, 기적을 말하며, 놀라운 용기를 보였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도 기적을 행하고, 기적을 말하고, 놀라운 용기를 보였습니다. 이 둘 사이의 평행이 흥미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에 있을 때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때, 동일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성령 충만은 어떤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이 아닙니다. 갑자기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란 매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하며 지금 여기에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 의식을 가지고 나 자신의 생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순간순간 이어지는 경험입니다. 미래를 위한 어떤 결심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내릴 결단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알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도 우리가 미래에 어떤 결단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가 “여보, 나 사랑해?”라고 물었을 때, 몇 주 뒤에 다시 확인해 보라고 대답하지는 않죠? 아내는 몇 주 뒤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을 겁니다. 바로 지금 알고 싶겠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미래보다는 현재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이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입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을 살아갈 뿐입니다. 결코 미래를 살지 못합니다. 계속 미래를 기대하지만 미래는 미래일 뿐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미래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를 살지도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거가 좋았다고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있고,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채워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길이 가능한 한 하나님의 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는 놀랍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죠.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순간순간 성령 충만을 온전히 결단할 때에 성숙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육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는 성장이 멈추고 아무런 진전이 없습니다. 진정한 성장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일어납니다. 위를 향해 성장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리에 멈췄다가 조금 나아갔다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입니다. 이를 통해 승리를 경험하고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로써 생명력이 넘치고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18절에 나오는 대조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방탕’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소티아(asōtia)’인데, 절망적이고 치료할 수 없는 병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조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술에 취해야 신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교도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우리는 술에 취해 더 높은 삶의 단계에 도달하거나, 더 큰 힘이나 능력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이교도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통해 위대한 능력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교도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를 다스리는 힘, 우리의 자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을 끌어올리는 원천은 성령 충만이지, 술 취함이 아닙니다.
이렇게 대조를 본 후에 명령을 보았습니다. 명령은 18절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 충만은 삶의 방식입니다. 한 번의 강력한 경험으로 평생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된 시간 동안만 효과가 있는 데오도란트처럼 한 번 뿌리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그렇게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 충만은 매 순간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걷기’에 비유하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한 걸음씩 맡길 때 일정한 속도로 걷게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내려야 하는 결정과 비슷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알람이 울리면 첫 선택을 하죠. 일어날까 더 누워있을까? 아프다고 거짓말을 할까 진실을 말할까? 어떻게 할까? 옷장 앞에서 두번째 선택을 합니다. 파란 셔츠를 입을까 갈색 셔츠를 입을까? 이렇게 삶이 이어집니다. 부엌으로 가면 또 다른 선택을 합니다. 아침 시리얼로 프루트 룹스를 먹을까 캡틴 크런치를 먹을까? 이처럼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선택이 끝나면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다스리시는 삶은 모든 발걸음을 하나님의 영께 맡기는 삶입니다. 한 번에 하나씩 결정을 내리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께 순종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매일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아침 시리얼은 건너뛰더라도 말씀은 꼭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게 하는 올바른 정보와 자료를 얻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걷기와 비슷합니다. 한 번에 한 걸음씩 내딛어야 하기 때문이죠. 갈라디아서로 가보겠습니다. 에베소서 바로 앞에 있죠.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다른 맥락에서도 이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 한 구절로 어떻게 이런 신학 체계를 세울 수가 있나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 한 구절에서 나올 수 있죠?" 하지만 이 구절에만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예시일 뿐입니다.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라는 이 진리는 신약 성경 전체에 퍼져있습니다. 신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도 보이고, 골로새서에도 있고, 에베소서에도 있고, 여기 갈라디아서에서도 찾을 수 있고,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오실 것을 말씀하신 부분에 있죠. 이처럼 성경 곳곳에서 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이 성령님의 사역을 설명하면서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영어 성경으로는 “걸으라”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입니다. 마치 걸음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죠. 성령님 안에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계속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계속해서 걸으라'는 것이죠. 이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렇게 행한다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의 죄된 본성과 악한 욕망을 이기고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은 바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님 안에서 걸어가는 것이죠.
우리 내면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실 수 있겠는데, 육체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죄가 발을 붙이는 곳이라는 겁니다. 사탄이 유혹하러 들어오는 통로이고, 우리의 인간적인 부분 중에서 죄에 노출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비록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내가 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지만,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이고 땅의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육체가 바로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발을 붙이는 곳입니다. 선한 것에 반하는 인간의 요소입니다.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요소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고 싶을 때조차 계속해서 방해를 받아서 원하는 바를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바를 행하게 된다고 말한 바로 그 부분이 육체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육체가 있는데, 육체를 다루는 방법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영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걸어가고,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늘 예수님을 의식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늘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육체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유혹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체를 따르면 어떻게 될까요? 저항이 없는 쉬운 길을 택해서 성경 공부도 하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도 갖지 않고,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삶의 통제권을 내어주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산다면, 1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육체의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육체의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음행입니다. 몇몇 성경본문에는 간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음행이라는 말은 간음을 포함하는 성적인 죄를 의미합니다. 더러운 것은 전반적인 불결한 삶을 뜻합니다. 호색은 옛 성경에서 방탕함이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음란한 욕망, 즉 모든 종류의 성적 도착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상 숭배가 있고, 주술은 이방 종교와 관련이 있는데, 때로는 약물과도 관련됩니다. 여기에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 분열함은 반역을 의미합니다, 이단, 투기, 살인, 술 취함, 방탕함 등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육체가 낳은 결과물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비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육체에 굴복하고, 성령 안에서 걷지 않고,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허락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이렇습니다. 성령님 안에서 걷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악한 일을 행하면 하나님의 율법의 보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을 따라 걸으면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일을 따르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결과를 감당해야 합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성령님은 선한 것을 원하시고 육체는 성령님을 대적하는데,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체를 따르면 곧바로 그런 결과들이 삶에 나타나고, 하나님의 율법 아래 들어가 그에 따른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반면에, 22절을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의 삶을 성령님의 다스림에 맡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매일 주님과 기도로 교제하며,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거합니다.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성령을 따라 걸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인데, 이런 것들을 금지하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율법의 결과나 정죄 아래 놓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삶에는 벌이 없습니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 기쁨과 평안이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면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걸으십시오. 정말 간단합니다. 25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살고 있다면, 실제로도 성령으로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 안에 살면서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이 말이 됩니까? 처음에 그리스도를 원했다면 지금도 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와서 육체로 완전해지려고 하십니까? 성령 안에 산다면, 성령 안에서 행하여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잠재력을 온전히 이루십시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동일하게 말했습니다. 성령 안에 살고, 성령 안에서 행하며,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이제 세번째 요점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다룰 주제는 바로 '결과'입니다. 대조, 명령, 그리고 결과입니다. 결과란 무엇일까요? 성령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 결과는 에베소서의 마지막까지 이어집니다. 나머지 부분이 모두 성령 충만의 결과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 중 세 가지 주된 결과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나머지를 마저 설명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1월부터 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19절에 나오는 '찬양'입니다. 둘째는 20절의 '감사'입니다. 셋째는 21절의 '복종'입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주요 변화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번째인 '복종'이 5장 22절부터 6장 9절까지의 모든 내용의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전체가 21절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6장 10절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를 통해 성령 안에서 걷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탄이 와서 방해하려 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에베소서 나머지 부분 전체가 성령 충만함에 대한 반응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의 핵심이자 절정입니다. 모든 내용이 이 지점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서 걷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이러한 변화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제부터 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즉 찬양입니다. 개인적인 것으로서 나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의 첫번째 결과는 우리 안에서 저절로 나오는 찬양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첫번째는 매우 개인적입니다. 바울이 설명한 방식, 성령님이 바울에게 감동을 주셔서 이렇게 표현하게 하신 것이 참 아름답습니다. 성령 안에서 걸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의 삶이 변합니다.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감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세번째는 복종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모든 관계가 올바르게 됩니다. 나 자신과도 올바른 관계, 하나님과도 올바른 관계, 다른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습니다. 그렇죠? 내면이 올바르고, 하나님과 올바르고, 다른 모든 사람과 올바른 것이 바로 삶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과 올바를 때 찬양이 나오고, 하나님과 올바를 때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다른 사람들과 올바를 때 복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으신 방식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모든 관계가 이 세 가지 간결한 진리 안에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첫번째 결과가 우리 자신을 향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반응을 이토록 세심하게 고려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시 한번 경이롭게 느껴집니다. 마치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복이 있나니, 행복하리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것과 같습니다. 계속해서 “복이 있나니, 행복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항상 첫번째로 "이것은 너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을 위한 부분과 다른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첫번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모두 다루려는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래, 찬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매우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이 엄청난 신학적 진리를 볼 때마다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라고 하면, "산더러 '옮기우라' 하면 산이 옮겨질 겁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물론 성령 충만하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노래하게 된다고 합니다. "글쎄요, 뭔가 빠진 것 같은데요"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음치인데요. 그런데도 이 말씀이 저를 위한 건가요?"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음정에 맞춰 노래해야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또 누군가가 우리의 노래를 들어야 한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렇죠?
성령 충만한 삶의 첫번째 결과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 노래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노래란 영혼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음주에는 제가 정말 놀라운 것들을 보여드릴 겁니다. 성령 안에서 휘파람을 불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정말 대단한 일이죠. 다음주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씀의 헬라어 어근은 ‘새처럼 지저귀다’라는 뜻인데, 다음주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러분 중에는 노래하는 것보다 지저귀는 것이 더 나은 분들도 계실 겁니다. 어쨌든 이 말씀은 신자가 성령 안에서 걸을 때 내면의 기쁨이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음악으로 표현된다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음악을 심어 놓으셨는데 그 음악이 성령 충만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누군가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노래할 때는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음정이 맞든지 안 맞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 오전예배에 한 청년이 와서 자기를 소개했는데, 처음 보는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이름은 랜디 멘든홀(Randy Mendenhall)입니다"라고 하길래, "아, 네, 랜디. 제가 편지를 여러 번 보냈죠"라고 했더니 "맞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랜디는 솔레다드 교도소에 거의 3년, 아니 2년 조금 넘게 수감되어 있다가 이제 막 출소한 상태였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갔을 때 누군가가 우리 설교 테이프를 전해줬고, 설교를 들어보고는 더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렇게 테이프를 받아서 듣다가 그리스도께 나아와 삶을 헌신하고 성경 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우리 테이프가 그 교도소에 널리 퍼져있어서 수감자들이 매일 자기 감옥에서 테이프를 듣는데,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간증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편지도 써주시고 테이프도 다 보내주셨으니, 제가 만든 간증 테이프를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좋아요, 랜디"라고 제가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걸 받아서 차에서 운전하면서 들었습니다. 테이프는 "먼저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랜디는 2주 전에 출소하면서 모든 수감자들에게 작별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있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랜디는 첫 마디에서 음정을 잡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피아노도 기타도 없이 그냥 노래를 불렀습니다. 분명히 콘크리트 바닥이 있는 단단한 시멘트 건물 안에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소리가 울리고 메아리쳤기 때문입니다. 랜디는 노래를 또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한 곡을 다 부르고 나서는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라고 하더니 15분 가량을 계속 노래만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제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나고, 눈물이 고였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없어도 괜찮았습니다. 피아노나 오르간이 없어도 괜찮았습니다. 음정이 맞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랜디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노래한다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모든 재능을 다 모으고 악기, 배경음악, 음향 효과를 비롯한 모든 것을 동원했음에도 하나님의 영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 같은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이런 겁니다. 랜디의 마음 속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랜디의 삶 가운데 일하심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죠. 랜디는 교도소로 돌아가 수감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랜디의 내면에는 노래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노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노래죠. 에베소에서 유행했던 악한 영들의 종교와 관련된 광란의 이교도 음악과 비교해보십시오.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달콤한 찬양과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가 모여서 부르는 노래는 우리가 전에 듣던 노래들과는 다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새로워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입니다. 만약 음악이 정말로 영혼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음악은 세상의 음악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도 같은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은혜를 품고 주님께 노래하게 됩니다. 항상 마음에서 시작해서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죠.
야고보서 5장에는 정말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노래, 찬양은 언제나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되어 흘러나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에게 새 노래를 주는 것이죠. 이 새로움은 단순히 시간상의 새로운 '네오스(neos)'가 아니라, 전에는 없었던 새로움인 '카이노스(kainos)'입니다. 이제 막 나와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종류와 성격, 본질에서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정말 특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들어본 찬양 중에는 세상 노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우리가 들은 것 같은 찬양은 세상의 어떤 음악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노래입니다. 참고로 성경에는 새 노래라는 표현이 아홉 번 정도 나오는데, 매번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보여드리기 위해 잠시 시편을 보겠습니다. 시편 33편 1절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우리가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왜 그래야 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 40편 3절도 마찬가지입니다. 2절부터 보겠습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아시겠죠? 시편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96편 1절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여기에서도 구원의 노래가 언급됩니다. 98편 1절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왜 그렇습니까?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시편 끝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44편 9절입니다.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149편 1절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이 노래는 항상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새 노래의 본질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5장 9절입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이 새 노래는 무엇입니까?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새 노래는 언제나 구속의 노래, 구원의 노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바로 새 노래입니다.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구원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이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구원이 우리에게 새 노래를 주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때 그 노래가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모세의 노래는 구원의 노래였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이 또한 구원의 모습 아닙니까? 바다를 가르셔서 통과하게 하시고 바로의 군대를 물에 빠뜨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15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함께 모여 여호와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하셨을 때, 사사기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이라는 두 놀라운 사람의 손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셨을 때 성경의 첫번째 듀엣이 등장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사사기 5장에서 듀엣을 부른 것입니다. 구원을 노래하는 듀엣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노래한 것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이며, 하나님께서 속박과 죄와 고난에서 놀랍게 구원하신 자들의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십니까? 정말 하나님은 음악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천사들은 타락 이전에도 노래했고, 결국 마지막에 천국은 영원히 노래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음악을 사랑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조금 정보를 드리자면, 구약 시대 성전에서 직무를 맡은 사람은 3만 8천명이었습니다. 3만 8천명입니다. 그 중에서 4천명이 노래하는 자였습니다. 거의 아홉 명 중에 한 명이 노래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음악을 사랑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0절부터 21절에 최초의 여성 합창단이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맞습니다. 지휘자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 여성 합창단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십니까? 제가 찾은 최초의 남성 합창단은 사무엘상 10장 5절에 나오는데, 선지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모두 모여서 남성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에, 그 찬양을 들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가사가 신학적으로 얼마나 정확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선지자들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정말 특별한 남성 합창을 듣고 싶다면, 설교자들의 찬양을 들어보십시오. 제가 무디 목회자 컨퍼런스에서 목사님 천 2백 명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남성 합창단입니다. 회중 찬양을 했습니다. 역대상 13장 8절입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저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노래했다는 부분이 참 좋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큰 소리를 좋아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큰 소리의 음악을 좋아하십니다. 제가 가끔 집에서 찬양을 크게 틀면 아내가 "소리 좀 줄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여보, 그건 영적인 말이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크지만 시끄럽지 않은 소리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드리는 큰 소리의 찬양을 좋아하신다는 말입니다.
역대상 16장 4절부터 5절을 보면 다윗이 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은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그 찬양대가 얼마나 대단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역대상 23장 5절을 보면 솔로몬의 성전에는 무려 4천 명으로 이루어진 찬양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4천 명의 훈련된 사람들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웅장했을까요. 에스라를 보면, 스룹바벨이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 바벨론 포로라는 끔찍한 시기를 겪은 후였음에도 가장 먼저 한 일이 찬양대를 구성한 것이었습니다. 에스라 2장에 나오는, 2백 명 정도로 구성된 작은 규모였지만 찬양대였습니다.
레위인 중 일부 제사장들은 전문적인 음악가가 되도록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음악적 재능이 있다면 그 방향으로 적극 독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사가 우리 모두의 찬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12장을 보면 순서를 따라 노래하는 교창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뻐하시는 찬양의 형태인데, 두 찬양대가 서로 마주보고 서서 주고받으며 노래하는 방식이죠. 하나님께서 이 방식을 좋아하시는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찬양대는 다양한 악기도 사용했습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찾아보니 현악기, 관악기, 심지어 드럼도 있었습니다. "드럼이 성경에 나온다고요?"라고 놀라실 수도 있겠는데요. 네, 성경에 드럼이 나옵니다. 멤브라노폰(membranophones)이라고 하는 타악기인데, 손으로 들고 연주하는 방식입니다. 탬버린(timbrel)과 종(bells) 같은 타악기도 있었죠. 현악기로는 하프와 비슷한 아소르(asor), 줄을 뜯지 않고 채로 치는 덜시머(dulcimer), 일반적인 하프(harp), 그리고 손으로 들 수 있는 큰 크기의 리라(lyre)인 색벗(sackbut)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들으신 것 같은 트럼펫(trumpet), 코로넷(coronet), 플룻(flute), 파이프 오르간(pipe organ) 같은 관악기도 있습니다. 음악에 서툰 사람들을 위해서는 양의 뿔(ram’s horn)도 있는데, 그냥 불기만 하면 되는 아주 단순한 악기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악기들이 있었던 것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인데, 음악이야말로 영혼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다음주에 살펴보겠지만, 신약에도 악기를 사용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음주에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만찬에서, 그러니까 예수님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마지막 만찬 후에 마지막으로 찬송을 부르셨다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초대교회의 찬송이 나옵니다. 다음주에 보게 되겠지만, 빌립보서를 비롯한 신약의 다른 말씀에도 찬송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모든 신자가 함께 모여서, 24절입니다,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가사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계속해서 함께 노래를 이어나갔습니다. 이처럼 신약에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불렀던 찬송의 가사가 남아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무엇을 했나요? 찬송을 불렀죠? 그렇습니다. 찬송을 불렀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으로 찬송하고 또” 무엇으로요? “마음으로 찬송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 각자가 찬송을 불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여덟 명이 동시에 독창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조율하기가 매우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질서있게 정리해야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음악과 함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 년 동안 다스리실 것입니다. 저주가 풀리고 천사들이 다시 찬양을 부르게 될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고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으로 통치하시게 될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실 일이 바로 천년왕국에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에스겔 40장 이후를 보면 에스겔이 이 성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지으실 성전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죠.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엄청나게 큰 성가대석을 만드신다는 겁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성가대원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게 보이네요. 주님의 재림이 더욱 기다려지시나 봅니다. 천년왕국 성전에는 성가대석이 있을 텐데요, 규모를 보면 양쪽에 하나씩 있습니다. 아마도 교창 성가대가 될 것 같습니다. 노래하는 자의 방이 두 개 있어서 이쪽에 하나 저쪽에 하나 있을 것인데요, 그 크기가 양쪽 방에 각각 수천 명이 들어가서 서로 주고받으며 찬양할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음악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것은 구원의 새 노래, 성령 충만한 삶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입니다. 바로 그런 음악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미래에는 항상 노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시면, 놀라운 성가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어떤 성가대인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14만 4천 명의 성가대가 하늘의 거문고, 그러니까 하프 연주자들과 함께 노래부르는 장면을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노래일까요. 정말 대단할 겁니다. 15장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15장 3절에서 다시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음악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표현 방식과 내용 모두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나타내는 그런 음악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에베소서 5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은 좀 옆길로 샌 이야기였습니다. 에베소서 5장을 보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두 가지 정도를 살펴보고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함께 모일 때, 교회는 이런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먼저 노래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사이에서 노래하는 것일까요? 첫번째 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짚고 넘어가려는 것뿐입니다. "시와 찬미로 서로 화답하며" 우리는 누구를 향해 노래합니까? 우리 자신을 향해, 서로를 향해 부르고, 19절 마지막을 보면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해 부릅니다. 즉, 우리의 찬양은 성도들 가운데서 주님을 향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꼭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점은, 성도들의 찬양은 항상 성도들 사이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전도를 위한 찬양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음악을 사용하셔서 누군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음악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다가가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반드시 복음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찬양이 반응을 이끌어내는 감동적인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하나님께서 전도의 도구로 설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찬양 전도팀이 있습니다" 또는 "우리는 노방 찬양팀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요, 저는 그것이 진정한 전도인지 확신이 없습니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 찬양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음악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가 부르는 찬양을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모르는 사람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표현하도록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음악이고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음악을 우리들 사이에서 주님을 향해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찬양의 주된 용도입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공동체적 나눔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하는 삶을 기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찬양은 세상을 위한 음악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노래를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우리의 노래를 세상의 언어로 바꾸려는 그런 노래가 전도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실제로 이것은 성경이 알려주는 음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노래해야 합니다.
교회가 노래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천 오백년 동안 교회 음악을 빼앗았다는 걸 아십니까? 교회에게서 음악을 완전히 빼앗았습니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음악은 없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곡가들이었다는 걸 아십니까? 위대한 종교 개혁가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음악을 교회로 되돌리고, 사람들이 다시 노래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찬양 없이 지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그레이스 교회에 모일 때 노래하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서로 함께 있을 때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노래하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누구 사이에서 노래하는가'라는 질문의 답입니다.
두번째 질문입니다. 노래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노래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다시 19절을 살펴보면,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구절이 나오고, 이어서 “마음으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in your heart”인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in”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명사의 격에 의해 암시되는 것이죠. 그 격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번주에 제가 오래된 헬라어 성경을 꺼내서 조금 살펴보았는데요, 그 단어가 위치를 나타내는 조격일 수도 있고, 수단을 나타내는 조격일 수도 있고, 원인을 나타내는 조격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인으로서의 조격으로 사용된 아주 유사한 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면, 우리의 마음으로 인하여 주님께 노래하고 찬송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노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노래가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대로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노래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시편 137편 1절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습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으로 노래할 수 없을 때 입술로도 노래부르지 않았습니다. 노래할 수 없었던 겁니다. 바벨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존경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은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저 보여주기식 공연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노래할 수 없다면 입술로도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연주할 음악이 없으니 수금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었습니다.
마음에 노래가 없다면, 입술로도 진정성 있게 노래할 수 없습니다. 돈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명성을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없이 노래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그건 주님이 듣고 싶어하시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종류의 노래를 부른다면 부르지 마십시오. 아침에 그레이스 교회에 와서 모든 사람이 노래하기 때문에 노래하지만 하나님께 쓴 마음을 품고 있고 하나님께 화가 나 있다면, 노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노래를 듣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또는 솔로로 노래할 기회가 있거나 연주회를 할 기회가 있지만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면, 하지 마십시오.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래는 구원받은 자들의 노래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아모스 5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즉,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너희 음악을 듣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의 노래, 성령 충만한 삶에서 나오는 노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모릅니다. 노래는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음악은 달라야만 합니다. 성령님은 매우 특별하신 분이기에, 우리의 음악은 세상의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래는 세상의 노래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못할 경험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안데스 산맥 고지대에 있는 작은 마을을 둘러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슈버트씨 가족과 함께 사륜구동 차를 타고 달렸는데, 산비탈에서 풀을 뜯는 라마들과 비포장도로 곳곳에서 원주민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켄이 "마을을 구경해 봅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을을 걸어다녔습니다. 모두가 진흙으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었습니다. 마을 중앙에는 진흙길이 있었고 모든 하수가 진흙길 가운데로 흘러내렸습니다. 정말 낙후되고 원시적인 곳이었습니다.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동물들과 그곳에서 자라나는 작물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해발 4천 5백미터 높이에 위치한 아주 외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마을을 걸으면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마을 곳곳에 기어다니는 작은 기니아 닭을 잡아서 목을 비틀고는 끓고 있는 냄비에 계속 넣고 끓이면서, 배고플 때마다 꺼내 먹었습니다. 마을 끝에 다다랐을 때, 온통 진흙 오두막들뿐인 그곳에서 갑자기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놀랍게도 “죄짐 맡은 우리 구주”라는 찬송가였습니다. 물론 가사는 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더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창문이 없는 진흙으로 지어진 작은 건물에 도착했습니다. 초가지붕이 있었습니다. 켄이 “앞쪽으로 가 봐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쪽으로 갔는데, 모두가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앉을 수 없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마치 정어리통조림에 들어있는 것처럼 빽빽하게 서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문 밖에까지 나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언어로 “죄짐 맡은 우리 구주”를 최대한 큰 소리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찬양은 서양 음악이었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원주민들이 만든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그런 음악을 모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곳은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곳, 아무런 결과도 없었던 곳이었는데, 결국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원주민들이 급격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대대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에 원주민들은 작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작은 교회 안에 빼곡히 서서 찬송가를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모두가 새로운 노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노래였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삶을 표현하는 노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첫번째 변화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로 인해서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의 첫번째 결과가 나 자신에게 나타난다는 점에도 정말 감사합니다.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주에는 성령 충만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함께 모여 구원받은 자들과 함께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기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오늘은 저희에게 주신 재능 있는 찬양팀, 잭 콜먼(Jack Coleman), 레지(Reggie), 메리 제인(Mary Jane)과 스티브(Steve)를 비롯한 찬양팀 구성원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들이 주님의 계획에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의 마음 속 노래에 방향을 제시하고 조율하며 인도하는 데 놀랍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위대한 찬양을 작곡한 모든 이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를 채우시는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언제나 성령 안에서 걷게 하옵소서.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심지어 박해를 받거나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해도, 우리가 성령 안에서 걸으며 항상 찬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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