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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에베소서를 천천히 살펴보면서 이 놀라운 본문을 다루는 일곱 번째 시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시간 관계상 말씀을 바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부터 읽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이 놀라운 본문을 벌써 일곱 번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본문을 5시간, 6시간이나 봐야 하나 생각하실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이 본문에 담긴 풍성한 의미를 아직도 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가 보니, 아마 여러분도 그러실 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바닥이 없는 우물 같습니다. 더 깊이 길어올릴수록 더 맑고 풍성한 생수가 솟아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더 무궁무진해집니다. 더 깊이 파고들수록 눈앞에 더 많은 보물이 펼쳐집니다. 다함이 없습니다. 성경을 더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 주제와 깊이가 더욱 방대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목회자가 누리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알았다고 생각했다가 더 연구할수록 더 넓어지고 깊어져서, 벌써 여섯 번을 살펴보고 이제 일곱 번째를 보고 있는데도 이 말씀의 깊이를 다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핵심 진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의 핵심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합당하게 행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모든 경험이 성령 충만이라는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겁니다.

18절 하반절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즉 "계속해서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즉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님께 순종하고, 성령님의 지시를 따를 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할 수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충만함을 알 수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구원받았고, 성령으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는데,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육체로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났습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시작했으니 오직 성령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질수록,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지 않으시거나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는 발전이 멈추고 더 이상의 진보가 없습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성장은 바로 성령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흐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삶의 매 순간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핵심으로써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신약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에 대해 누가복음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또 요한복음 3장 34절은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정된 양만큼 주신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부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그 시대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았는데, 누가복음 1장은 세례 요한을 두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고 말합니다. 어머니 엘리사벳과 아버지 사가랴 역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신약성경을 더 살펴보면, 사도행전 4장에서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성령 충만을 받았지만, 4장 8절에서는 특별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6장에서는 초대교회의 첫 직분자들을 선출하는데, 이들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즉, 사도들 외에도 초대교회를 이끌고 성도들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였던 스데반 역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7장 55절에서 돌에 맞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그 후에 우리는 또 다른 놀라운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거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지는데, 바로 사울이었던 바울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입니다. "...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9절입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사도 바울 곁에는 놀라운 동역자가 있었는데, 바로 위로자로 알려진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세례 요한부터 예수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신약성경의 저자들까지, 성령 충만이라는 개념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없다면 그 어떤 성도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첫번째 기준입니다. 우리는 삶의 주도권을 성령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행했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그 능력으로 인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령님께 순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보다 더 큰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것을 경험하고 싶다면, 오직 성령 충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성령님의 능력에 순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죽고, 자기 뜻이 죽고, 죄를 고백하여 삶에서 제거하고, 성령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초대교회를 재현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늘 놀랍습니다. 제가 사는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지나간 시대에도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바로 전 세대에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강한 움직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인 제가 신학생이었을 때부터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큰 노력이 있었는데, 저 역시 그 노력의 일부였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체계를 다시 정립하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땠을까?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었을까? 방식은 무엇이었고, 어떤 방법을 사용했으며, 어떻게 기능했을까? 리더십은 어떤 구조였고, 평신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선교사들과 어떻게 협력했을까? 어떻게 위임하고 안수했으며 어떻게 징계가 이루어졌을까? 어떻게 세상에 다가갔고, 어떻게 전도하고 양육했을까?

우리는 늘 초대교회를 본받으려 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 1세기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여러 면에서 실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을 재현하는 핵심은 초대교회의 운영 방식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임하셨던 성령님, 이것이 전부입니다. 20세기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20세기 교회가 될 겁니다. 방법론을 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20세기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교회 구조 개편이라는 학문적인 면에 매달리기보다는 성령 충만한 삶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제가 에베소서에서 말씀드린 모든 것, 1장에서 3장까지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 4장에서 6장까지의 우리의 실천,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현될 수도,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를 다뤘습니다. 대조, 명령, 그리고 결과입니다. 18절의 대조를 보면, "술 취하지 말라"라고 하는데, 술 취함에는 방탕함, 곧 방종과 죽음에 이르는 타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교도들처럼 술에 취해서 신과 교제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과 교제합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조입니다.

다음으로 명령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좀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알고 계셨나요? "잠깐만요, 저는 미래에도 관심이 있고 예언에도 관심이 많은데요"라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미래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우리가 미래에 도달한 적이 없다는 걸 느낀 적 있으신가요? 우리가 말할 때마다 우리 말소리가 들리죠? 이것이 지금의 현실, 사실입니다. 우리는 과거, 과거의 향수, 오래된 가구 같은 것들을 좋아하고, 1920년대 스타일로 옷을 입기도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거죠. 과거를 사랑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래, 우주선과 "스타워즈" 같은 것들, 그리고 이상한 생명체들,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와 같은 작가들의 공상 과학 소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망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과거를 사랑하는 이유는 좋은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벗어나려고 애써보지만 늘 실패하죠. 하지만 지금 여기서 바로잡아야 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하나님께 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 충만한 상태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제 결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패트리샤를 쫓아다니면서 자꾸 결혼하자고 하니까 패트리샤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결혼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실지 알고 있었습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패트리샤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느냐?" 이렇게 물으실 게 뻔했습니다.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패트리샤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느냐? 솔직히 대답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말 사랑하지만 앞으로는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패트리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죠. 제 말은, 그때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패트리샤를 사랑하는 건 분명했습니다.

결혼식에서 저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이 결혼 서약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미래를 알 수 없으니 하기 어려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지금 이 순간 패트리샤를 사랑하자, 매 순간 사랑하자'라고 다짐했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저는 아직도 '지금', ‘매 순간’, ‘지금’에 머물러 있고 여전히 패트리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패트리샤는 미래를 신경쓰지 않습니다. "여보, 날 사랑해요?"라고 패트리샤가 저에게 물을 때는 "몇 달 후에 다시 와서 물어봐요"라는 저의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또는 "그럼요, 그럴 계획이에요. 분명히 그렇게 계획하고 있어요. 곧 사랑하게 될 것 같아요." 이런 종류의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런 식의 대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의 다짐이나 앞으로의 사랑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성령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뿐입니다. 지금이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성령 충만함을 유지하라"가 바로 그 명령입니다. 세번째는 결과였습니다. 세 가지 결과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을 향한 것, 둘째는 하나님을 향한 것, 셋째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향해서는 노래하는 것,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는 무엇이었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번째도 있었습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잠시 후에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겁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 복을 받게 됩니다. 첫번째는 개인적인 결과입니다. 노래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쁨이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봤죠. 성령 충만한 사람의 마음에는 말 그대로 노래가 흘러넘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현실의 모든 세부사항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두번째 결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온전하고 건강하고 안정된 사람입니다.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마음이 노래로 가득 차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성격을 망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평안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습니다. 내면 또한 건강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큰 기쁨을 느끼고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해 필연적으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이 두번째 결과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말씀으로 가득하고, 순종하며 신실한데, 이런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침 예배를 시작하면서 시편 100편을 읽었습니다. "그의 문에 들어가며", 무엇과 함께 들어가라고 했습니까? "감사함으로"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감사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 없이 드리는 기도는 날개가 잘린 기도와 같아서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문에 들어가고, 찬송함으로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간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려야 한다." 이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제가 깨달은 바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예배는 바로 감사입니다. 제게 있어 예배의 핵심은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나 아름다운 오르간 연주가 아닙니다. 교회에 앉아서 웅장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귀하고, 가장 높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전한 예배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감사란 결국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좋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합니다. 감사는 눈앞의 상황을 넘어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하고,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게 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최고의 찬양입니다. "하나님, 저는 힘든 시기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도, 결혼 생활이 힘들 때도, 직장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저를 위한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려는 뜻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주신 것도 감사하고 거두신 것도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성숙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때로는 축복으로, 때로는 시련으로 다가오지만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함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어떤 고통이나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11절입니다.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왜일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실까요?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이유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궁극적인 반응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삶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감사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라고 표현했고, 그 장의 마지막에서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마무리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감사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감사가 하나님을 모든 것의 근원이자 주권자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감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언제 감사해야 할까요? 20절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 앞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항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감사해야 합니까? 항상입니다. "아이고, 제 처지를 모르시는군요"라고 하시겠지만, 그래도 "항상"입니다. "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항상"입니다. "십대 아이들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시나봐요?" 그래도 "항상"입니다. "이 끔찍한 직장을 좀 보셨습니까," "저에게 얼마나 불공평하게 대우하는지 아세요?" "그 사람들이 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세요?" 많은 이야기를 하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항상," "항상," "항상," "항상"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관하고 계시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빚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 귀한 말씀이 나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시겠다구요? 그렇다면 먼저 이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에베소서 5장 17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20절은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식보다 뱀의 이빨이 더 날카로울까." "배은망덕함이여, 너 대리석처럼 차가운 마음을 가진 악마여." 셰익스피어도 배은망덕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어려움과 시련을 주실 때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야고보서 1장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고 불평하며 투덜거리려고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일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 감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속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오. 스스로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는 가장 쉬운 유형입니다. 복을 받은 후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저도 그런 사람이에요"라고 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쉬운 일이죠?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감사하게 되죠. "많이 아팠는데 주님께서 치료해 주셔서 이제 건강해졌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주님께서 새 집을 허락해 주셨어요" 또는 "직장을 잃었는데 주님께서 새 직장을 주셨어요." 이렇게 말입니다. 복을 받은 후에 감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제일 쉬운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부어주시면 "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되죠. 가장 쉬운 유형의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이 감사는 성경적인 감사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받은 후에 감사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도착했을 때의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바다가 갈라져서 건너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죠. 바로가 애굽 군대 전체를 그 갈라진 바다로 진군시키자 물벽이 무너져서 모두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8절입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시체들이 모두 해변으로 떠밀려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그 후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먼저 크나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15장 1절에서 말하듯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죠?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이 노래는 19절까지 이어집니다. 복을 받은 후의 감사 찬양입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행하신 일에 감사합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리시도다.”

바로 이것이 복을 받은 후의 감사입니다. 요한계시록 15장에서도 이 감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환난이라 불리는 피바다에 잠긴 세상에 주님께서 강력한 심판으로 임하시고 일곱 재앙이 쏟아지는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2절에는 짐승을 이긴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보이십니까? 승리한 후에, 전쟁에서 이긴 후에, 정복을 마친 후에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 바로 감사드릴 때입니다. 우리는 늘 승리를 경험합니다. 이미 지나간 전쟁들이 있고, 이미 이룬 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항상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을 받은 후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복을 받은 후에는 감사하기 쉽지 않습니까?

이제 두번째 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으로 올 승리를 확신하면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감사를 드리는 능력입니다. 첫번째는 일이 끝난 후의 감사이고, 두번째는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드리는 감사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를 축하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 문제가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 문제가 닥치기도 전에 승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계실 때,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매우 걱정했습니다. 41절을 보겠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앞으로 하실 일을 감사드린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믿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시자 나사로가 나왔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한 단계 높은 영적 성숙입니다.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감사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여러분도 미리 감사를 드리는 그런 사람이십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고 이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승리를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죽음을 앞두고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제 가족이 죽어가는 것이 보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보입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 주님, 부활의 생명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까?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의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정말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암몬과 모압이라는 두 강력한 적과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면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여호사밧은 신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 모든 것을 아뢰었습니다. "주님, 이 전쟁은 주님의 것입니다. 저희 힘으로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마음을 쏟아내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셨던 것처럼 저희에게도 그렇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놀라운 기적을 행해주셔야 합니다. 주님, 이 일을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가오는 것이 보이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에 여호사밧은 주님께 감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여호사밧 왕이여, 너무 뻔뻔하지 않습니까? 아직 전쟁도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 주님을 찬양하시렵니까?" "그렇다. 먼저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실제로 백성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20절에 나옵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한 승리를 주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실제로 이렇게 했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이스라엘은 해병대가 아닌 성가대를 선봉에 세웠습니다. 군대보다 찬양대를 앞세웠습니다. "주님, 주님은 정말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평생 음악만 해온 사람들이 큰 전쟁이 시작될 때에 "성가대, 전열의 맨 앞에 서시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믿기 힘든 일이죠.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작을 했겠지만, 곧 안정을 찾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놀랍지 않습니까? 마치 집단자살과도 같습니다. 서로를 쳐서 죽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아마 이스라엘 진영이었을 겁니다.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지라." 시체 무더기를 발견한 겁니다.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이 가서 적군의 물건을 탈취할새 본즉 그 가운데에 재물과 의복과 보물이 많이 있으므로 각기 탈취하는데 그 물건이 너무 많아 능히 가져갈 수 없을 만큼 많으므로 사흘 동안에 거두어들이고." 하나님께서 그 땅의 전리품을 약속하셨으니 당연히 그들의 것이었죠. 놀라운 점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싸울 필요도 없었다는 겁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더니, 승리가 저절로 유다 백성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감사하는 것은 해결된 후에 감사하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하나님은 이것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가 감사하기를 바라시는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도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닥칠 문제를 생각하고 무너지고 흔들린다면,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겁니다. 복을 받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건 쉽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감사드리는 건 더 어렵죠.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번째 유형의 감사입니다. 가장 어려운 감사는 패배가 눈앞에 보이는 싸움의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정말 힘든 일이죠. 지나고 나서도, 승리를 예상하면서도 할 수 있지만, 패배의 순간에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다니엘 시대의 왕은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예배나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그 대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도 정말 놀랍습니다. 요나처럼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지 상상이 되시나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만 생각하실 테지만, 거대한 물고기에게 삼켜진 후에 위액 속에서 떠다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더 끔찍한 건, 정신이 또렷한 채로 떠다녔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는, 2장을 보면,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말하자면 요나는 거대한 물고기의 위산이 가득한 뱃속 한가운데서 "감사합니다,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건 믿음이 좋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가 너무 마음에 드셔서 그 거대한 물고기를 건드리셨고, 그러자 곧바로 요나를 토해냈습니다. 그것도 그냥 아무 데나 토해낸 게 아니라, 정확히 요나가 가야 할 바로 그 장소에 토해냈습니다. 거대한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람이 있었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감사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끔찍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겪는 시련은 그리 심한 것이 아니다. 아직 피를 흘릴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40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매를 맞으면서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를 보십시오. 두 사람은 다리가 최대로 벌어진 채로 차꼬에 묶여 있었습니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감옥에 갇혀 박해를 받으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감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감사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냅니다. 예배에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만일 복을 받은 뒤에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주실 승리를 기대하면서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감사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 시련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매우 소수의 그리스도인만이 속해 있는 성숙한 수준에 이른 것입니다.

8개월 전부터 우리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조니 에어렉슨(Joni Eareckson)은 전신마비를 겪게 된 사고에 관해 쓴 멋진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감사한 마음이 들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순종의 문제이다." 이해가 되십니까? 감사한 마음이 들어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과 환경과 운명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에게 큰 변화가 생깁니다. 우리의 태도에 정말 큰 변화가 생깁니다.

언제 감사드려야 할까요? 항상입니다. 무엇에 감사드려야 할까요? 무엇에 대해 항상 감사드려야 할까요? 범사, 모든 일입니다. "모든 일이라구요? 정말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건가요? 힘들고 어려운 일까지도요?" 네, 그렇습니다. 여러 시련을 겪을 때도 모든 일을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왜냐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제가 정리해둔 목록이 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성경에 구체적으로 감사해야 한다고 명시된 약 40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간단히 언급하고 넘길 단순한 내용이 아닙니다. 각각의 항목마다 그 안에서 수백 가지의 감사할 거리를 발견할 수 있는 큰 주제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모든 일에,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의 충만함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이 나열되어 있고,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의 구원과 성령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행복한 때와 마찬가지로 감사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또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유형밖에 없는데,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네, 겸손한 사람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주 작은 일도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에서 감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 문제는 감사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증상일 뿐이죠. 진짜 문제는 교만입니다. "하나님, 제가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정말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교만의 문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겸손이 성령 충만의 일부라는 것을 아십니까? 자기 자신을 부인할 때만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죽이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께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성령 충만으로 이어지는 겸손입니다. 따라서 그 충만함에서 나오는 감사 역시 겸손에서 나옵니다. 이는 우리를 모든 죄의 근원이자 전체를 부패시키는 첫번째 죄인 교만으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사탄이 바로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을 둘러보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 안 되지, 내가 가져야 해"라고 말했죠.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 내가 나를 높이겠다, 내가..."라며 계속해서 "나, 나, 나"를 반복했습니다. 심지어 에덴동산의 하와도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똑같았습니다. 나, 나, 나... 항상 그랬죠. 이 교만이 바로 죄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감사하지 못한다면, 단순히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려 하기보다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여러분을 성령 충만의 개념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부인하며 성령께 순종할 때에만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 모든 것에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남편은 완벽하지 않아. 어쩌다 이런 사람과 결혼하게 된 거지?" 남편도 마찬가지로 "내 아내는 뭔가 부족해. 분명 세상에는 더 좋은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남자들이 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또 이런 말도 합니다. "내 직장은 이상적이지 않아, 대우도 제대로 못 받고, 가족들도 나를 제대로 대해주지 않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도 않고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아." 이렇게 인생을 쓰디쓰고 신랄하게 바라보면서 불평하게 되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신이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야 해." "나는 완벽한 직장을 가져야 해." "모든 사람이 나를 최고로 대우해줘야 해." 이 모든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진 한 결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만이 꺾이고 먼지처럼 낮아질 때, 그때서야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 감사해야 할까요?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범사에,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할까요? 잘 보십시오. 놀라운 말씀입니다. 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라는 것은 우리의 감사가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부합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제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저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모든 것의 놀라운 진리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찬양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찬양하신다는 것을요. 그리고 우리가 감사할 때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 감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저는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제 삶의 좋은 일은 물론이거니와 나쁜 일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저를 만들어가는 데 쓰임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끝입니다" 이렇게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중보해 주시는 그리스도도 없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도 없고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도 아니라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받게 될 것들이 감사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반대로, 우리 삶이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녀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계속해서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자신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면, 이 모든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면,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드릴 이유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매우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듯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감사하신 것처럼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감사를 표현하신다면 예수님의 방식으로 감사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하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서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시고, 요한복음 6장 23절에서도, 요한복음 11장 41절에서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감사하며 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보면 왜 그러셨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이 되어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멸시받고 거부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 어떤 일도 당할 이유가 없으셨음에도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영광을 받으실 분이 겸손으로 행하셨고, 사랑을 받으실 분이 미움을 받으셨으며, 경배를 받으실 분이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찬양을 받으실 분이 조롱을 받으셨고,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으며, 거룩하신 분이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시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 올 일을 보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 놓인 기쁨이 있었기에 십자가도 견디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십시오. 우리는 겸손해야 마땅한데 영광을 받고, 미움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거절당해야 하는데 자녀가 되었습니다. 조롱받아야 하는데 사랑을 받고, 가난해야 하는데 부요하게 되었으며, 죄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삶이 조금만 틀어져도 불평부터 합니다, 그렇죠? 말도 안되는 일이죠.

중세의 한 전설에 따르면 두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한 천사는 주님으로부터 사람들의 모든 간구를 모으라는 임무를 받았고, 다른 천사는 감사를 모으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간구를 모으러 간 천사는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들고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감사를 모으러 간 천사는 손에 몇 개만 들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설일 뿐입니다. 전설은 보통 과장되고 허황되기 마련이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게 과장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늘 구하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마치 "자기 욕심만 챙기는 종, 존"이라고 서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감사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성도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죄일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감사해야 할까요? 항상 해야 합니다.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범사에, 모든 것에 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하나님 아버지께 해야 합니다. 2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저는 바울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애로운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선물을 베푸시는 자상한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강조합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받는 것들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노래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통해 베푸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십니다.

최근에 저는 어떤 분에게 도움을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필요를 채워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이렇게 도움을 드렸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것이 늘 즐거운데, 이번에는 정말 따뜻한 감사 편지를 받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 편지가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뿐이었다는 점입니다. 편지 전체를 통해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감사를 드렸습니다. 보시다시피 이 분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감사를 표현하다 보면 때로는 아첨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볼 때에 우리는 에베소서 5장 20절의 관점을 갖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자신을 향해서는 노래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이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 30편, 50편, 69편, 92편, 95편, 100편, 105편, 116편 등 수많은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고 거듭 말합니다. 로마서 1장 21절은 이교도들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보이시나요? 감사하지 않는 것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세상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입니다.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구약시대 레위인 제사장 중에는 오직 백성들을 이끌고 감사를 드리는 일만 하는 제사장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들이 감사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칠칠절, 초막절, 나팔절, 오순절, 유월절 등 모든 기념 절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백성을 사랑과 은혜로 돌보신 하나님께 국가적 차원에서 감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이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감사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시면 감사와 관련해서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전혀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감사하지 않는 부류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여깁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입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이것 봐. 내가 이렇게 큰 수확을 얻었구나,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쌓아두려 했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남은 인생을 가진 것을 누리며 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을 자기가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이뤘으니 앞으로는 내 업적을 누리며 살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 네가 죽으리라고 하십니다. 오늘 밤 죽게 될 것인데,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시지 않으면 땅도 곡식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요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것에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가 했다고만 생각하고, 자기 재산을 스스로 벌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했다고 여기고, 자기 열정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일을 했다고 생각할 뿐, 하나님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결코 감사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감사하기는 하지만 위선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을 보십시오. 위선적인 감사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에는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또 다른 비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자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자기를 경배하기 때문에 사실상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감사하나이다." 잘 들으십시오. 이 사람의 마음에는 전혀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 외에 그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아, 나 자신이 이렇게까지 훌륭하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 이런 식입니다.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선적이고 위선적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세 번째 부류인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인데, 제가 빨리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몇 명이라고요? 한 명입니다. 열 명 중 고작 한 명 뿐이라고요?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열 명 중 한 명만 감사를 드렸다니요? 게다가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혼혈에다 사회에서 멸시받던 자였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다시 말해서 병 고침을 받은 것은 열 명이지만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한 명이라는 뜻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사회적 외톨이로 만든 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 뿐입니다. 반면에 이 훌륭한 한 명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드렸습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차이가 보이십니까? 우리 중에도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만 만족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에 관심을 두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있어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이 계시다면 영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런던의 한 선교사가 낡은 아파트로 심방을 갔습니다. 한 여인이 말기 암으로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방은 좁고 추웠습니다. 여인은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이 여인을 돕고자 뭐가 필요한지 물었을 때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제겐 정말 필요한 게 다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까요." 선교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썼다고 합니다. "런던 도심 빈민가의 한복판에서 찬란한 고백이 울려 퍼졌다. '내겐 그리스도가 계시니,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다락방에서 죽어가는 한 외로운 여인,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인이 말했다. '내겐 그리스도가 계시니,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이 말을 들은 이는 세상의 창고에서 뭐라도 가져오려 달려갔지만, 죽어가는 여인에게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 여인은 마지막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겐 그리스도가 계시니,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죄인된 우리여, 높고 낮음과 부유함과 가난함을 떠나서, 감사함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겐 그리스도가 계시니, 무엇이 더 필요하리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늘 우리를 채우시니 감사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겸손해진 마음에서 솟아나는 감사로 항상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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