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4장은 하나님 말씀 중에서도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우리 주님의 위대한 말씀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장로교 저널(The Presbyterian Journal)>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오늘 밤 마태복음 4장에 딱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배가 자주 난파되는 위험한 해안가에 허름하고 작은 구조대가 하나 있었다. 건물이라고 해봤자 그저 오두막 하나에 보트 한 척 뿐이었지만, 헌신적인 구조대원 몇 명이 쉬지 않고 바다를 지켜보며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실종자를 찾아 나섰다. 이 작은 구조대는 수많은 생명을 구했고 덕분에 유명해졌다.”
“구조된 사람들과 인근 주민 중 일부가 이 구조대에 동참하여 시간과 돈과 노력을 보탰다. 새 보트도 사들이고 새로운 구조대원도 양성하면서 작은 구조대는 점점 커져갔다. 그런데 일부 대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건물이 너무 허술하고 장비도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바다에서 구조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인 만큼 좀 더 편안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응급용 간이침대를 새 침대로 바꾸고 건물을 넓히면서 좋은 가구들을 들여놓았다. 구조대는 어느새 구조대원들의 친목을 다지는 장소가 되었다. 클럽처럼 화려하게 꾸미고 호화로운 가구로 채웠다.”
“그러는 사이 인명구조를 위해 바다로 출동하려는 구조대원의 수가 점점 줄었다. 그래서 자신들을 대신해 출동할 대원들을 고용하게 되었다. 인명구조라는 주제는 여전히 클럽의 장식에 남아있었고, 입회식을 하는 방에는 의식용 구명보트가 있었다. 이 무렵 해안가에서 큰 배가 난파되었다. 고용된 대원들이 물에 젖어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왔다. 더러운 데다가 아프기까지 했다. 그중에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도 있고 노란 사람도 있었다.”
“멋지게 꾸며진 새 클럽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관리 위원회는 즉시 클럽 밖에 샤워장을 만들어서 난파선 조난자들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씻을 수 있게 했다. 다음번 모임에서 클럽 회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생명 구조 활동이 불쾌할 뿐만 아니라 클럽의 일상적인 친목 활동에 방해가 된다며 중단하자고 했다. 몇몇 회원들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며 반대했고, 아직도 인명 구조대라고 불린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결국 투표에서 패배했고, 바다에서 난파된 사람들의 목숨을 계속 구하고 싶다면 해안가를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구조대를 따로 차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결국 그렇게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 만든 구조대도 예전 구조대와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 이 구조대 역시 사교 클럽이 되었고, 또 다른 인명 구조대가 새로 세워졌다. 이런 역사가 계속 반복되었고, 오늘날 그 해안가를 방문해 보면 호화로운 클럽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다에서는 여전히 배가 자주 난파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익사하고 만다.”
교회의 역사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생명을 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하고 진실되며 고귀하고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죄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입니다. 지옥의 파도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은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계시는 일이기도 하죠. 요한일서 4장 19절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가지시는 일은 복음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께도, 예수님께도 중요한 일이지만 성령님께도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따르면 성령님이 오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임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복음 전도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사도 복음 전도입니다. 성령님의 가장 큰 관심사도 복음 전도, 즉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것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 역시 복음 전도였습니다. 특히 바울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을 토로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이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로마서 10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고린도전서 9장 20절부터 2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보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큰 관심사, 성령님의 가장 큰 관심사, 사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 그리고 초대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도 동일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도들이 흩어졌을 때도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잠언 11장 30절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잠언에서 "지혜로운"이라는 말은 의롭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의로운 자,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자는 바로 사람을 얻는 자, 즉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마지막 장인 12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영원토록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경공부 과정 중에
이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복음을 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무려 53번이나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28장의 지상대명령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애통하심이다. 복음전도는 멸망할 도시를 보며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의 가슴 아픈 외침이다. 복음전도는 바울의 울부짖음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복음전도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이다. ‘이 백성이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복음전도는 존 녹스의 울부짖음이다. '스코틀랜드를 제게 주옵소서, 아니면 죽음을 주옵소서.’ 요한 웨슬리의 울부짖음이다. '세상이 곧 나의 교구이다.’ 복음전도는 잃어버린 아들로 인해 밤새 흐느끼는 부모의 애통함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사명이며, 우리는 반드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복음전도는 큰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다른 이들을 얻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거부당해야 합니다.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가서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6장 2절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세상을 얻으려는 자, 세상에 다가가려는 자는 반드시 세상에서 거부당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도리어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데 쓰임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신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전도란 본질적으로 더 큰 자가 더 작은 자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자가 합당하지 않은 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냉혹한 적자생존 이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약한 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 사람들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오래된 책을 뒤적이는 걸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발견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항상 과거의 보물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늘 이런 위대한 진리들을 모든 시대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1877년에 쓰인 오래된 책을 보다가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전도하도록 격려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설교자였을 텐데, 세상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도록 열정적으로 호소했습니다. 아마도 교회를 향해 "클럽이 되지 말고 구조대가 되십시오"라고 말했을 겁니다. 매우 흥미로워 보이는 내용을 저자의 표현 그대로 읽겠습니다.
“현재 지구 인구를 16억 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1877년 기준으로 16억 명이라는 겁니다. “과대 추정일수도 있지만, 이 엄청난 숫자 중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단 한 명 있다고 해보자. 이 한 사람이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 다음 해에 단 두 명만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해보자. 이 두 명의 새신자들이 각각 자신들의 신앙생활 첫 해에 또 다른 두 명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져서 새신자마다 회심 후 1년 안에 두 명씩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면,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 시작해서 16억 명 전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계산해보면 놀랍게도 전 세계가 30년 반도 안 되는, 한 세대도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회심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기에 너무 큰 일일까? 교회가 이루기에는 너무 벅찬 일일까? 조건을 조금 다르게 설정해 보자. 전 세계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단 한 명뿐이라고 가정하는 대신, 실제와 더 가깝게 최소 2천만 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것도 실제 수치보다 훨씬 낮을 것이다. 이 2천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올해 안에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그리스도께 인도한다면, 1877년이 끝나기 전에 그 수는 두 배가 될 것이다. 만일 이런 복된 결실이 1878년에도 이어지고, 매년 지속된다면, 그렇게 각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고 노력함으로 매년 한 영혼씩 구원하는 데 쓰임받는다면, 1883년이 되기 전에 전 세계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늘에서는 장엄한 찬양이 울려 퍼질 것이며, 이 세상의 모든 나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주장은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을 말씀드리죠. 만일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한 사람이 두 명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각각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이 과정이 6개월마다 계속된다면, 6년 반 만에 샌페르난도 밸리 전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것이며, 그 후에 6개월 만에 로스앤젤레스의 나머지 지역도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로스앤젤레스 전체의 구원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논쟁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명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이 사명을 실제로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이 사명을 수행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등대의 뱃고동 소리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실제로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매주 주일마다 이곳에 서서 경적을 울리고 휘파람을 불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은 바다로 나가 영혼을 건져올리는 잘 훈련된 구조대원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여러분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자 헨리 워드 비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한 명의 목사가 한 명의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 즉 설교자가 '여러분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한 그런 설교를 해야 한다는 확신이 커진다.” 전도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개인 전도,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마태복음 4장 18절부터 22절에서 시작됩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신약에서는 이들이 생명을 구하는 최초의 팀이었고, 지상대명령을 이루기 위해 전도 훈련을 받은 첫번째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왕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다룹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마태복음 4장 12절부터 25절까지의 이 큰 부분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2절부터 25절에서는 왕의 공식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공식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마침내 왕이 오셨습니다. 오랜 준비의 시간과 세례 요한의 사역, 세례, 시험을 거친 후, 마침내 예수님께서 공식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갈릴리에 빛이 비추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서대로 진행되며,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늘 주제에 대한 개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실 분들은 주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은 12절부터 25절까지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우리가 주목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12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둘째로, 13절에서 16절을 보면 갈릴리라는 가장 적절한 장소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셋째로, 가장 적절한 선포로 시작하셨습니다. 17절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이 때부터 예수께서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시계와 달력 안에서 움직이셨습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가 바로 사역을 시작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고, 말씀을 들을 가능성과 필요가 가장 컸던 ‘이방의 갈릴리’가 가장 적절한 장소였으며, 당시 선포하신 말씀이 가장 적절한 말씀이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나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서, 가장 적절한 선포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적절한 동역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 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능력도 있으셨고 권리도 있으셨지만, 그것이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 하시려 하지 않으셨고, 또 설교만으로 이루시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듀리아 박사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병든 영혼에게는 의학 강의 이상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실 의학 강의를 넘어서서, 만나는 사람들의 영혼에 개인적인 처방을 전해줄 사람들이 필요하셨습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가 어떻게 첫 생명 구조대의 일원이 되었는지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중 일곱 명의 이야기를 알고 있죠. 나머지 다섯 명의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예수님이 직접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팀원들을 택하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이 놀라운 사명에 동참할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택하셨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동역자들을 신중하게 택하십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동역자로 삼으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변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나님은 구약에서 유대 민족을 동역자로 택하시고,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을 비롯한 선지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신중하게 동역자를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동역자를 매우 신중하게 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입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3장 18절입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누가복음 6장 13절도 동일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동역자들을 고르실 때 매우 신중히 고르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예수님이 저도 사람을 낚는 어부로 택하셨을까요?” 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추수할 때가 된 밭에서 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가 확장되고 성장하면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구하는 일꾼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과 제자들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온 모든 사람이 사람을 낚는 어부에 해당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모든 민족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훨씬 더 멀리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열두 제자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유대, 사마리아를 거쳐 전 세계와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야말로 지금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선포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바로 정말 강조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님이 제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목사님, 요즘 전도를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요? 영적 삶의 새로운 깊이와 차원을 강조하시려는 건가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흐름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이걸 해야겠다, 저걸 해야겠다. 이 부분을 좀 강조해야겠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래야 하지만, 이곳은 예수님의 교회이고 예수님이 세워가시는 중입니다. 저는 그저 그 흐름 속에 있을 뿐이죠. 때로는 다른 분들이 지적해주실 때까지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최근에 전도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라고 하시면 "아, 그랬나요? 그런 것 같네요"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일종의 모험이죠.
제가 방향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레이스 교회가 전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좋은 교제도 나누었고, 귀한 진리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만의 풍성함에 너무 빠져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끼리 찬양하기에만 바빠서 다른 이들도 이 찬양을 들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릴 수 있죠. 이곳이 너무 좋은 나머지 저 바깥세상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요?
옛날에 루이지 타리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집에 생활용품이라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문가용 고급 바이올린이 246개나 발견됐습니다. 평생동안 다락방에 가득 차도록 모아둔 것이었죠. 그 중에서도 최상급 바이올린들은 낡은 서랍장 맨 아래칸에 있었습니다. 루이지는 바이올린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세상에서 음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바이올린들을 소중히 모으는 동안 세상은 한 번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전에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어떤 사람이 간직해두는 바람에 147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연주되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루이지 타리시오처럼 하고 있는건 아닐까요?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의 보물을 사랑하는 마음에 푹 빠진 나머지 세상이 우리의 음악을 듣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누군가 제게 도저히 믿기 힘든 통계를 알려주었습니다. 전체 기독교인 중에서 무려 95%가 단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위대한 영적 바이올린의 95%가 한 번도 연주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되 동시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디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무디가 시카고 미술관에서 <만세반석>이라는 그림을 봤답니다. 오늘 저녁에 룻이 연주했던 찬양과 같은 제목이죠. 한 사람이 바위에 박혀있는 십자가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작품입니다. 폭풍우 치는 바다, 파도가 바위를 때리는 가운데 십자가에 매달려 있습니다.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제가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몇년 후에 비슷한 그림을 하나 더 봤는데, 이번에는 폭풍 속에서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익사하는 사람에게 손을 뻗은 모습이었죠. 그 그림이 더 아름답더군요.”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S. D. 고든이 쓴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 가브리엘과 나누신 대화를 묘사하고 있죠.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께 전도 계획에 대해 여쭈어보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세상에 복음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단다. 그러면 들은 사람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할 것이고, 결국에는 온 세상이 복음을 듣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될 거야." 가브리엘이 "만일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요?"라고 묻자, 예수님이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다른 계획은 없단다. 나는 제자들을 믿고 있어. 내게 다른 계획은 없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18절입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앞서 개리가 말한 것처럼 갈릴리 바다는 정말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저도 '베드로 고기'를 먹었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만 발견되는 특별한 물고기이죠. 겉모습은 별로지만 맛은 정말 훌륭합니다. 갈릴리 호수에 가보셨던 분들은 그 아름다운 경관을 잘 아실 겁니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이죠. 갈릴리 바다는 사실 작은 호수입니다. 세계를 여행해 본 누가만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넓은 곳이 12킬로미터, 길이는 21킬로미터로 그리 크지 않습니다. 타원형 모양인데 위쪽이 아래쪽보다 더 넓고, 해수면보다 188미터 아래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해까지 이어지는 계곡의 윗부분에 자리잡고 있죠. 참고로 사해는 해수면보다 약 420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하고 생산적인 땅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즉 오늘 성경 본문의 시대에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 대도시가 9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30년 경에는 티베리아라는 작은 마을 하나만 남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 호수가 수많은 어선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한 어선단에만 240척의 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로 12km, 세로 21.7km 정도 되는 호수에 그 많은 배가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호숫가를 거니시다가 두 형제를 만나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나중에 베드로라 불리게 된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안드레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르심의 두 번째 단계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공부하실 때 도움이 될 만한 전문적인 설명을 드리자면,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받은 부르심이 여러 번 나옵니다. 각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기록 목적에 맞게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기록했습니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 최소한 다섯 번 있었고, 그때마다 제자들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치 우리의 신앙생활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구원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더 깊은 헌신으로의 부르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 경우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을 특별한 방식으로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때가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레이스 교회나 다른 특정 사역처럼 구체적인 곳으로 부르심을 받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단계가 있을 수 있는데,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번째 부르심은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공부하실 수 있으니 지금은 살펴보지 않겠습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안드레, 요한, 시몬, 빌립, 나다나엘, 야고보가 구원에 이르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부르심이었고,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세례 요한이 "더 이상 나를 따르지 말고 저분을 따르라"고 했을 때였습니다. 두 제자가 그 말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갔습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이었죠.
이제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4장 19절은 두번째 단계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긴 했지만 잠시였습니다. 아직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죠. 그저 그 순간, 그 날, 그 시간에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영혼을 구원하도록 부름받았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부름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세번째 부르심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부르심 이후 사건입니다. 비슷한 점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잠시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이때의 부르심의 수준을 보여드리죠. 누가복음 5장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고기를 잡고 있었다는 것은 두번째 단계에서도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지 부르셨던 그 순간만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제 그 결단이 더욱 확고해질 차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단순히 일반적으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사람을 낚는 어부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다음 단계이며, 이때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 즉 갈릴리 바다라고도 불리는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누가는 이곳을 호수라고 불렀는데 더 넓은 세상을 다녀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 큰 바다들을 봤을 테니까 갈릴리 호수는 바다가 아니라는 걸 알았던 거죠.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정박해 있었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있었습니다. 그 중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제 차이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배 안에 계십니다. 마태복음의 상황과는 다른 것이죠.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10절에서 이를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잡힌 고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제자들은 주님 없이 스스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물고기를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물고기를 잡고 싶으냐? 내가 말하는 곳에 그물을 내리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거야.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나 없이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지 걱정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무엇을 하게 됩니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를 육지에 대고 어떻게 했나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바로 또 다른 차원의 헌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느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왔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그때부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어쩌면 평생 그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낚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또 다른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단순히 사람을 낚는 것을 넘어서서 공식적인 사도가 됩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입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제 제자들은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고, 병도 고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일반적인 부르심을 지나 전적 헌신으로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마침내 기적을 행하는 능력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단계의 부르심은 마태복음 10장 1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7절에서는 "가라"고 말씀하시며, 어떻게 가야 할지 모두에게 가르치셨고, 16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나가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진행 과정이 보이십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 후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공식적인 사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두번째 단계에 불과하지만 매우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제자 시몬과 안드레를 만나셨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습니다. 첫번째는 낚싯대와 릴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당시에는 실이 달린 막대기를 사용했죠. 그렇게 낚싯줄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저인망 방식입니다. 배 한 척 혹은 두 척으로 그물 네 모서리에 밧줄을 매달아서 바다에 던지는 방식인데, 물속 깊이 가라앉도록 밑부분에 추를 달았습니다. 그렇게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죠. 위쪽 밧줄을 잡아당기면 그물은 물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이 저인망 방식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배가 움직이면 그물은 바다 속에서 거대한 원뿔 모양이 됩니다. 끝부분의 추 때문에 원뿔 모양으로 가라앉으면서 깊은 바닷속의 물고기들을 쓸어담는 거죠. 이 때 끝부분의 밧줄을 단단히 묶으면 물고기들이 잡혔습니다. 세번째 방식은 투망인데요, 이 투망 방식이 본문에서 제자들이 사용하던 방식입니다. 저인망 방식인 ‘사게네(sagēnē)’가 아니라 던지는 방식의 그물이었죠. 투망에 사용된 그물은 직경 약 3미터 정도인 원형 그물이었는데 제자들은 능숙하게 다뤘을 겁니다. 호숫가나 호수 가장자리에서 그물을 던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죠. 무릎 높이의 물에서 끝에 돌 등으로 추를 매단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물이 가라앉아서 물고기들을 둘러싸면 밧줄을 당겨서 끌어올렸죠.
제자들은 이렇게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왜 이런 설명을 하시는 거죠?"라고 물으실 수 있겠는데, 제가 보기에는 매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이 단어는 ‘암피블레스트론(amphiblēstron)’인데요, 여기서 ‘양서류(amphibious)’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해안가에 서서 물속으로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와 관련이 있죠. 하지만 저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투망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큰 그물을 던져서 많은 물고기를 한꺼번에 잡는 것처럼요. 저는 이 비유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한 마리씩 잡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죠. 말하자면 예수님은 너희가 많은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은 전도를 생각하실 때 많은 이들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습니다. 21절입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이렇게 주님은 네 명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들은 말하자면 원석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거칠고 투박한 어부들이었죠. 당연히 어느 정도의 거친 면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다른 제자들도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습니다. 특히 영적인 분별력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 몇 달 동안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인들이 '마샬(mashal)'이라고 부르는 비유로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러면 제자들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영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매우 부족했던 것이죠.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도 그저 귓전으로 스쳐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셨고,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하나 다 풀어서 설명해 주셔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더구나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5절입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무리가 배고파지기 전에 빨리 보내자는 거죠. 자기들이 먹여야 할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을 대접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죠.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는 겸손도 없었습니다.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죠. 아마도 예수님 곁에 있다 보니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하다고 여겼나 봅니다. 마태복음 18장을 보면 어린아이가 왔을 때도 반겨주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용서하는 마음도 부족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490번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계속 졸기만 했으니까요. 용기도 별로 없었습니다. 목자가 매를 맞자 양들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영적 통찰력도, 동정심도, 겸손함도, 용서하는 마음도 없고, 기도할 때 끈기도 없었습니다. 겁쟁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를 통해 주님이 우리 같은 사람도 어떻게 변화시키실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도 놀랍게 변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는 뭔가를 보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제자들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보셨습니다. 자신이 하시는 일을 알고 계셨고,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정확히 보신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묵상하면서 든 생각은, 예수님이 어부들을 택하신 것이 유대교 제도 전체에 대한 일종의 책망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랍비들을 제자로 택하지 않으셨을까요? 위대하고, 뛰어나며, 총명하고, 지식이 풍부한 랍비들이나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 말입니다. 어부들이라니요? 이들이 뭘 알았겠습니까? 학교도 다니지 않았을 텐데요. 아마 글을 읽지조차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지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의지하셨습니다. 인간의 영향력보다, 형식적인 종교보다, 교육보다, 의식보다 더 나은 것을 보셨습니다. 바울은 지혜로운 자, 능한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위대한 마태복음 주석가 매튜 브로더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부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신 것은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은 전통에 덜 물들어 있었기에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데 더 적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보통 사람이었다. 아마도 열두 제자 모두가 랍비 학교에서 교육받지 않은 비교적 소박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도행전 4장 13절입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갈릴리 촌구석 사람들이 뭘 알겠냐는 겁니다.
19절을 보겠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 만일 유명 인사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누구누구가 믿음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칠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올림픽 선수단을 택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선수들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위대한 천재들을 택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어부들을 택하셨을 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심령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저는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정말 위대한 약속 아닙니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내가 친히 그렇게 하리라.’ 요한복음 1장에서 보았듯이 제자들은 이미 신자였고, 이 말씀은 두 번째 단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줄 임무가 있다.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이해했습니다. 매우 생생한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낚시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낚시를 잘 모릅니다. 그물 낚시에 대해서는 더 모르죠. 하지만 사람을 낚는 데 낚시 기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습니다. 좋은 어부들에게는 특별한 자질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인내심입니다. 그렇죠? "나는 낚시를 도저히 못 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부들은 기다리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도 사람을 낚는 데 능숙해지려면 그래야 합니다.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어부에게는 끈기가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죠.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가서 돌아와서는 "음, 오늘은 아무것도 못 잡았지만, 다시 가보자" 하면서 또 갑니다. 끈질깁니다.
어부들이 가진 세번째 자질은 용기입니다. "내 배는 너무 작고 바다는 너무 크다"라는 말도 있죠.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거친 바다와 맞서 싸웁니다.
어부들에게는 적절한 순간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다고 합니다. 실력 있는 어부에게 물어보면 언제 어디서 물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잘 알려주죠. 마찬가지로 좋은 전도자도 때와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합니다. 실력 있는 어부들은 항상 물고기 시야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하지 않습니까? 제가 어릴 때 찰리 삼촌과 동부 지역으로 낚시를 갔습니다. 제가 밖으로 몸을 내미니까 삼촌이 배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자꾸 밖을 내다보니까 삼촌은 아마도 물고기들이 저를 보고 도망갈까 봐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배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안 돼. 보이면 안 되는 거야. 물고기를 잡으려면 네가 안 보여야 해."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전도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심지어 그림자까지도 감추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시선이 향하도록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는 인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잖니. 끈기가 무엇인지, 용기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단다. 적절한 때를 보는 눈도 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법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겠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가르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전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직접 데리고 나가서 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전도 폭발" 사역이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 여러분 모두 나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세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가르쳐야 합니다. 정말 잘 가르쳐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끼를 꿰는 법조차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릴을 감는 법을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그물 던지는 법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법을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요? 3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잠시 제자들과 시간을 보내며 기본기를 다진 다음, 마태복음 10장에서처럼 둘씩 짝지어 내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은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돌아올 때마다 반드시 보고를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둘씩 짝지어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마침내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떠나니 너희 스스로 하거라. 모든 과정이 끝났다.” 예수님의 훈련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명을 알려주시고,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셨다가 다시 돌아와서 보고하게 하셨습니다. 돌아와서는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일이, 저기서 저런 일이 일어났습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보내셨고, 제자들은 또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훈련이 끝나고 예수님은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훈련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이 영혼을 얻는 어부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분석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간단히 몇 가지 깨달음을 나누겠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먼저 들어보십시오.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셨을까요? 제자들은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설교만 45번 하신 게 아닙니다. 행하셨고, 제자들은 보면서 배웠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들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항상 사람들 속에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군중이 있는 곳에 계셨고 죄인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늘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정도였죠.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기에 제자들은 자신도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편애하지 않으셨습니다. 화려한 사람들과만 어울리지 않으셨고, 부자들하고만 다니지도 않으셨으며, 유명한 사람들이나 종교인들하고만 어울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회당장 야이로가 찾아왔을 때도 시간을 내셨지만 창녀와도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가까이 계시면서 모든 이를 똑같이 대하셨습니다.
세번째입니다. 예수님의 영혼 구원 방식에서 보이는 세번째 특징은 놀라운 민감성입니다. 열린 마음을 순식간에 알아보실 수 있었죠. 여러분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가요? 열린 마음을 알아보는 법을 아시나요?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군중 속에 계실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밀치고 있어서 거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었던 거죠. 이렇게 꼼짝없이 갇혀 계셨는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갑자기 돌아서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말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예수님께 손을 댔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다.” 알고 보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랍비들의 옷자락에 달린 네 개의 술 중 하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열린 마음을 아시고 군중 속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혈루병을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민감하셨습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열린 마음을 가진 단 한 사람을 알아보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께 민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실 수 있다는 걸 아시나요? 여러분이 성령 안에서 행하신다면, 하나님의 영이 준비된 사람에게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편애하는 일도 없으셨고 민감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넷째로,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공개적인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그냥 슬쩍 도망가게 두지 않으셨죠. 아까 말씀드린 마가복음 5장의 혈루병 앓는 여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직접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도망갈 수 없게 하신 거죠.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치유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 여인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는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마가는 기록했지만 누가는 의사였기에 생략한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무리가 에워싸 밀고 있는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시면 어떡하냐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군중 속에서 찾아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서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진정한 영향을 미치려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입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랑과 자비하심이었습니다. 이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죠.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죄 많은 여인, 수많은 남자들에게 상처받은 여인, 가장 비천한 창녀였던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또 어떻습니까? 마태복음의 여러 경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신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죄인들을 향해 한없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늘 시간을 내어주셨죠. 주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늘 바쁘고, 늘 어디론가 가야 하고, 늘 큰 프로젝트가 있고, 늘 참석해야 하는 회의가 있습니다. 사역할 시간은 많은데, 정작 사람들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간을 내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야이로가 찾아왔을 때도 시간을 내셨습니다. 야이로가 자기 딸의 이야기를 길게 하는 동안에도 귀 기울여 들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시간을 내고, 차별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개적인 고백을 이끌어내고, 사랑과 온유함으로 대하는 법을 가르치셨죠. 그리고 어부로서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인내심, 끈기, 용기, 적절한 때를 볼 수 있는 안목,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까지요. 어떤 사람의 말처럼 "전도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전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적 삶의 다른 모든 부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께 직접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모두 우리 교회 목회자 짐 조지를 아실 겁니다. 몇 년 전에 우리는 심방하고 전도할 목회자 한 분을 고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킬 사람을 구했습니다. 만약 그때 목회자 한 명만 구했다면, 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남았을까요? 전도하는 사람 한 명뿐이었겠죠.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영혼을 얻는 훈련된 사람들이 2-3백명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이제 정말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2절은 다른 제자들, 곧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는 이 부분이 정말 좋습니다. 즉각적인 순종이지요. 제리가 말했듯이, 이것은 권위를 보여줍니다. 해변을 걸으며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이 따랐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벼룩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처럼 쇠약하고 왜소하고 쪼그라든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말씀의 설명과는 전혀 맞지가 않는구나.’
건장한 어부들에게 다가가서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아버지까지 떠나서 따랐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순종입니다. 이들에게 영혼을 향한 큰 열정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특별한 열정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영혼을 향한 열정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십니까? 먼저 순종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됩니다. 순종하세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순종은 열정이라는 불을 지피는 불씨와 같습니다. 영혼을 향한 열정을 얻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해 마음이 불타오르게 하려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한 걸음 내딛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순종이라는 작은 불씨를 큰 불길로 키우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위대한 원주민 선교사로 20대에 생을 마감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내가 주님을 위해 불꽃이 될 수 있다면." 헨리 마틴은 "이제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설교자 알렉산더 맥라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얼마나 긍휼한지에 따라 쓰임받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어디서 시작될까요? 이런 열정은 어디서 올까요? 하나님을 위해 불타오르고자 하는 이 열망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바로 순종이라는 작은 불씨에서 시작됩니다.
코틀랜드 마이어는 저서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서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에 관하여 말합니다. 맥체인은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설교자로 2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맥체인이 가는 곳마다 스코틀랜드가 흔들렸다. 맥체인이 입을 여는 곳마다 영적인 능력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수천 명이 맥체인을 따라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왔다.”
“맥체인이 설교했던 곳이 궁금했던 한 여행자가 스코틀랜드의 마을로 가서 오래된 교회를 발견했다. 백발의 늙은 관리인이 교회 안으로 안내했다. 관리인은 여행자를 맥체인의 서재로 데려갔다. ‘저 의자에 앉으세요’라고 관리인이 말했다. 여행자는 잠시 망설이다 의자에 앉았다.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는 성경책이 펼쳐져 있었다. 관리인은 말했다. ‘성경책 위에 머리를 숙이고 우십시오. 맥체인 목사님은 설교 전에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여행자를 성경이 놓인 강단으로 안내했다. 관리인은 말했다. '여기 서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세요.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시기 전에 항상 그렇게 하셨습니다.'”
코틀랜드 마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맥체인에게는 잃어버린 영혼들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한 이토록 깊은 열정이 있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사람들을 구주께로 이끄는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는가?”
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제게는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데요"라고 하시는데요, 시작점이 어디일까요? 바로 순종을 실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불을 지핍니다. 주님은, 잘 들으십시오, 주님을 도와드릴 특별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잘 훈련된 구조대원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편안한 모임이 아닙니다. 그런 건 주님께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미 그런 것들을 충분히 해왔습니다. 주님은 잘 훈련된 구조대원을 원하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네,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요? 잘 들으십시오. 첫째,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팀원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전도 사역에 참여해서 배우십시오.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전도와 관련된 모든 내용에 밑줄을 긋고 정리하고 배우십시오. 먼저 신자가 되고, 준비된 사람이 되십시오.
셋째, 관심을 가지십시오.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십시오. 이를 위해 책을 읽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순종에서 시작되니까 순종하셔야 합니다. 나가서 실천하십시오. 열정이 없더라도 일단 행동하십시오. 이웃에게 다가가보십시오. 늘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말들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본보기라는 걸 기억하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또한 본받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믿는 자가 되고, 준비된 사람이 되고, 관심을 가지고, 순종하며, 예수님을 따르고, 좋은 본보기를 통해 배우십시오. 예수님은 이처럼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말씀으로, 적절한 동역자들과 함께 시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빛이 비추기 시작했으니 이제 우리가 그 빛을 세상 곳곳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데이브 호킹과 브루스 피터슨과 같이 대학에 다녔습니다. 브루스 피터슨은 현재 우리 교회 집사님이시고, 데이브 호킹은 롱비치에 있는 그레이스 브레드런 교회의 목사님이십니다. 또 한 명은 에드 버드인데, 현재 로스 가토스에 있는 갈보리침례교회의 부목사님이십니다. 지금은 동부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네 명이 모여서 4중창단을 만들었습니다. 주제곡도 있었는데, 그 제목은 “우리 작은 불을 켜서”였습니다. 늘 이 곡을 불렀는데, 사실 바리톤 파트만 제가 너무 많이 불러서 지금은 주 멜로디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입니다. 이 곡이 주제가였습니다.
저는 이 찬양의 제목이 정말로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우리 작은 불을 켜서”라고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누군가 와서 “작은 불”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좋은 찬송가입니다.” 그런데 작은 불이란 무엇일까요? 이 찬송가가 D. L. 무디가 들려준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시나요?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무디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폭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 한 배가 클리블랜드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항구에는 두 쌍의 등대가 있었다. 하나는 높은 절벽 위에, 다른 하나는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이 두 등대를 보고 배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항해사에게 절벽 위의 큰 등대만 보였고 해안가의 작은 등대는 보이지 않았다. 항해사는 바위에 부딪힐 위험이 있으니 차라리 호수로 되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선장에게 물었다. 하지만 선장은 호수의 폭풍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어떻게든 항구로 들어가보자고 했다.
결국 항구에 도착하긴 했지만 난파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폭풍 때문에 해안가의 작은 등대가 꺼졌기 때문이었다.” 무디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늘의 큰 등대는 언제나처럼 밝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은 등대는 어떻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부르셔서 이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님을 위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