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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아주 짧은 한 구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절 한 구절만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성경은 정말 여러모로 놀라운 책입니다. 성경의 놀라운 특성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 흥미로운 예를 몇 가지 들려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제엘 페터만(Ze-el Fetterman)이라는 이스라엘 사업가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말씀을 읽었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페터만은 이런 큰 화재가 발생했을 정도라면 지하에 가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가스가 있다면 석유도 있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이 추측은 정확했습니다. 1953년에 고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서 이스라엘 최초로 유정이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유회사인 ‘스탠다드 오일 컴퍼니(Standard Oil Company)’가 이집트, 그러니까 애굽에서 석유를 발견하고 유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지만, 처음에 그 고대 땅에서 왜 석유를 찾으려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 회사의 이사 중 한 명이 출애굽기 2장을 읽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3절에 주목하게 됐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사는 역청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석유가 있을 것이고, 모세 시대에 석유가 있었다면 지금도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습니다. 그래서 지질학자이자 석유 전문가인 찰스 위쳇(Charles Witchet)을 파견했고, 조사 결과 실제로 석유가 발견됐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를 말씀드리죠. 월드 크리스천 다이제스트(The World Christian Digest)지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항구도시인 하이파에서 한 경찰관이 밀수업자의 뒤를 쫓고 있었답니다. 밀수업자들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나귀가 끄는 수레로 도시를 돌아다녔답니다. 경찰관은 밀수업자들은 놓쳤지만 수레를 끌었던 나귀 몇 마리를 붙잡을 수 있었고, 며칠 동안 굶긴 후에 풀어줬답니다. 그랬더니 이사야 1장 3절의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이라는 말씀처럼, 굶주린 나귀들이 경찰관을 곧바로 밀수업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줬답니다.

이처럼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성경은 귀중하고도 특별한 책입니다. 제가 정말 큰 감동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프랑스의 한 소녀 이야깁니다. 이 소녀는 가난한 맹인이었는데, 점자로 된 마가복음을 구해 손끝으로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경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쉬지 않고 읽다가 굳은살이 생겨서 점자를 읽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더 잘 읽고 싶은 마음에 손끝의 피부를 벗겨내어 감각을 높이려 했지만, 오히려 신경을 다치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소중한 성경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울면서 마가복음에 입을 맞추고 "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술이 손가락보다 더 예민해서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밤 내내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새로운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성경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비할 데 없는 책입니다. 제 생각에는 성경에 이런 재미있는 경고문을 하나 붙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책은 습관을 만듭니다. 꾸준히 읽으면 불안이 줄어들고, 거짓말, 부정직, 나쁜 욕망, 미움,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더불어 기쁨, 평화, 사랑, 따뜻한 마음이 넘치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최고의 책입니다. 그 어떤 책도 성경의 탁월함에 근접할 수조차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까 읽어드린 오늘 본문에서 성경의 우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합니다. 선포된 말씀으로든 기록이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20절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 원칙 중 하나라는 점입니다. 16절부터 18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알려줍니다. 지난 시간에는 19절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을 살펴봤죠. 이제는 전혀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멸시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건강한 양떼 기르기의 일환입니다. 양들이 위대한 목자장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죠. 사도 바울은 교회 내의 관계에 대해 알려줍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관계, 성도들 간의 관계, 그리고 이제는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이 능력 있는 교회를 만드는 요소입니다. 이 마지막 명령들은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는 말씀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21절의 “범사에 헤아려”와 “좋은 것을 취하고”, 22절의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라는 말씀도 매우 명확합니다. 다만 두번째인 20절의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약간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어 구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 추가로 설명하자면, 19절부터 나오는 다섯 가지 명령문에서는 주어가 모두 문장 맨 앞에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범사에 헤아리라', '좋은 것을 취하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이렇게 각 문장 앞에 주어를 두어서 강조하는 헬라어 문법은 매우 강력한 의미를 전달할 때 사용합니다. 이제 이 구절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멸시하다"라는 단어는 격하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완전히 무가치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예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페테이아스(prophēteias)’는 좀 더 깊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성경 용어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선포된 것과 기록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는데,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인 ‘프로페테이아스(prophēteias)’는 신약성경에서 선포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 모두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문맥상으로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이 ‘예언’이라는 단어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고 다른 본문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선포된 예언을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록된 예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도록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2장에는 영적 은사들이 나오는데, 6절부터 시작됩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여기에서 사용된 ‘예언’은 ‘말하는 은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영적 은사를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말하는 은사’와 ‘봉사하는 은사’입니다. 이 ‘말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앞에 서서 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공개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이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주신 특별한 능력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언의 은사가 충만하게 나타났을 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두 가지 형태입니다. 먼저 ‘새로운 계시’의 형태로 예언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처음 듣는 말씀, 즉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나 이미 기록된 것을 다시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는 새로운 계시였는지, 아니면 이전에 계시된 것이었는지 구분되지 않습니다. 단지 공개적으로 선포되었다는 점만을 알려줍니다.

때로는 예언이 아주 실제적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실제적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1장 27절부터 28절을 보면 예언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선지자들, 그러니까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는데, 그 중 아가보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반드시 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아가보를 통해 아주 실제적인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리적인 것도 아니었고, 성경의 한 권이나 일부로 기록되어야 할 것도 아니었고, 신학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실제적인 예언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신약의 예언자들, 선지자들은 교회에서의 삶과 사역에 직접 연관된 실제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2절입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여기서 신약의 두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격려하고 권면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계시는 아니었지만, 성도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을 전했습니다. 아마 초자연적인 요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처럼 성령으로 말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이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하는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여전히 계시를 받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직접 말씀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말씀일 수도 있었고, 또는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것을 공개적으로 전하는 재선포일 수도 있었습니다. 기적적인 새로운 계시, 즉 실제적인 예언이든 교리적인 예언이든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은 초대교회 시대의 특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시대에도 대부분의 경우, 예언의 은사는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로마서 12장 6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죠. 잠시 그 구절을 다시 살펴보면서 매우 중요한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12장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NASB 성경에는 ‘자기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문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입니다. 원문에는 '자기’라는 소유격 대명사가 없습니다.

여기서 "분수"라는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아날로기아(analogia)’, ‘아날로기아’입니다. 우리가 쓰는 ‘유추, 유사점(analogy)’이라는 말의 어원입니다. A와 B가 유사하다는 것은 A와 B 사이에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그 진리는 이것과 유사하다”라고 말한다면, 둘 사이에 서로 일치하는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든 저것과 일치하는 것이죠. 종교개혁자들이 ‘아날로기아 스크립투라(analogia scriptura)’, 즉 성경은 항상 자체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결코 자체적으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 12장 6절에서 말하려는 바는 무엇입니까? 예언의 은사는 반드시 믿음과 올바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믿음과 올바른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주신 기독교 진리의 체계, 교리,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는 동의어로 여러 차례 사용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영어 성경에는 ‘이 믿음에 복종하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믿음은 교리, 즉 진리를 뜻합니다. 유다서는 우리가 믿음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곧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는 계시의 체계입니다. 또 유다서 1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라.”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서 12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예언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위해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믿음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과 일치하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보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끝부분 19장 10절입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여기서 ‘나’는 요한입니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천사가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 말씀의 계시와 일치합니다. 누군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우리가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성경입니다. 예언은 절대로 성경 말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예언의 은사는 기적의 은사와는 전혀 관계없는 목록에 들어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는 기적의 은사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기적의 은사들이 나오지만, 로마서 12장에는 없죠. 따라서 우리는 예언의 은사가 기적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의 은사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일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을 보면, 같은 은사가 다시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기적의 은사들을 다루는 구절 속에 섞여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사도시대에만 있었던 기적의 은사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예언의 은사가 여기서 기적의 은사들과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 사도시대에는 이 은사가 기적의 특성을 지닐 때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전에 받지 못했던 계시를 선지자가 하나님께 직접 받을 때가 있었죠. 그러니까 이 예언의 은사가 기적의 특성을 지닐 때가 있었습니다. 기적을 통한 계시의 시대가 사도들과 함께 끝나면서 이제 우리에게는 기적의 특성을 지니지 않은 은사만 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언의 은사란 성경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도시대의 선지자들이 새로운 계시를 전했던 때도 있었지만, 그 시대에도 대부분은 하나님이 이미 계시하신 것을 다시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 은사가 사용됩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이 은사를 이해해 보겠습니다. "왜 이 은사를 알아야 하나요?"라고 물으실 수 있는데, 12장 1절에서 바울이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은사를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매우 중요한 말씀이니까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개인이 아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영적 은사는 개인적으로 간절히 사모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가 함께 모여 영적 은사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말이죠. 즉, 각 신자가 은사가 없다고 해서 그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함께 모여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3절에서 말하듯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이 모든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언은 교회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도 바울은 다시금 예언이 이해할 수 있고, 의미가 있으며,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쭉 내려가서 같은 장 39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그리고 "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대에는 방언도 그 나름의 적절한 쓰임새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희가 모여서 무엇인가 사모하고자 한다면 예언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언이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언이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4장 37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누군가 자신을 선지자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내가 편지에 쓴 모든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말을 해야 하고 내 말에 완벽하게 동의해야 한다. 내가 쓴 글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과 일치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14장 2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다시 말해서 비신자가 교회에 왔을 때 우리가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듣고 이해하여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전도의 효과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언이란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효과가 있고, 교회를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도 시대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터가 세워지고 오랜 세월이 지난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예언이 선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되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프로페테이아스(prophēteias)’라는 단어가 기록된 계시로 사용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이 부분을 자세히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을 보면 동일한 ‘프로페테이아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이사야를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은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라고 하면서, 이사야 6장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이라는 단어는 말이 아닌 기록을 의미합니다. 선포된 말씀이 아닌 기록된 말씀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여기서는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을 보면, 26절에 매우 흥미로운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이는 복음과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며, 25절에 나오는 새 언약을 가리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즉,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은 예언하는 사역을 맡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고 글로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도 하고 기록하기도 했고, 혹은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예언이라는 단어가 선포하는 것과 기록으로 남기는 것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베드로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9절입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20절은 이를 "성경의 예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언, 성경의 예언이라는 같은 용어가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의미합니다. 20절의 "성경의 예언"이라는 표현은 당시 구약 전체를 하나로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구약은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예언된 계시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신약도 포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언은 언제든지”, 그러니까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언을 성경, 즉 기록된 성경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1장을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듣기만 하셔도 됩니다. 요한은 계시록에 대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계시록을 예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계시록 마지막 장에서도 요한은 10절, 18절, 19절에서 세 번이나 계시록을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프로페테이아스(prophēteias)라는 단어는 때로 선지자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하지만, 언제나 성경 말씀과 완벽히 일치해야 했습니다. 또 때로는 예언이 성경 말씀 자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든 예언은 성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언은 성경 그 자체이거나,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은 곧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읽든 선포되는 것을 듣든, 가벼이 여기거나 그 중요성을 낮추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음식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욥기 23장 12절이죠. 예레미야는 매일 기쁨으로 말씀을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여호수아는 1장 8절에서 놀라운 가르침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신명기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헌신해야 하는지 아주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삶을 채우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높이고 받들어야 합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9편 1절부터 2절이죠. 다윗은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명령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은 곧 성경을 경외심을 갖고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4절,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 비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합당하게 높일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으며, 통나무나 돌과 같고, 눈도 입도 감각도 마음도 사용할 수 없는 생명 없는 조각상과 같다. 성령에 의해 눈뜨고 회심하고 거듭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성경의 진정한 본질은 맛보지 못한 채 겉핥기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성경학자라고 자처하는 학계의 모든 이들을 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죠.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에게 매를 맞게 되었다. 아버지가 매를 가지러 간 사이, 소년은 바지 밑에 식탁보 여러 장을 넣었다. 아버지가 돌아와 매질을 했지만, 식탁보가 매의 충격을 흡수해서 소년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이 어린 소년이 바로 성경학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바지에 사전, 주석서, 성구사전들을 덧대어 넣는다. 그 결과 이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지 못한다. 학문적 도구들로 자신을 보호하여 그 능력을 무력화시키니, 결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학문적 도구들은 필요한 순간에만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연애편지를 각종 사전을 동원해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성경학자들이 바지에서 책들을 꺼내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때서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은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오직 성령님이 마음에 거하시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라는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미국과 전 세계의 신학교, 대학교, 교회에 있지만, 마음이 너무나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지 않으며, 성령님이 이들 안에 거하시지 않기에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알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실성, 신빙성, 권위, 영감성, 무오성을 부인하는 이들은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즉 성경을 낮추고, 깎아내리고,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도이자 나침반이자 안내서는 성경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원을 얻으려고 선행을 하는 인간적인 노력만 남을 뿐이죠.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만이 아니라 순종으로 높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예언을 멸시하게 되고 이 분명한 명령을 어기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는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여러분께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멸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래서는 안 될까요?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성경의 본질적 특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성경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이번에는 성경이 스스로 주장하는 특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경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이사야 1장 2절은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만큼 성경은 권위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무류합니다. 무류합니다. 전체적이고 총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아무것도 빠진 것이 없습니다. 실수가 전혀 없습니다. 시편 19편 7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합니다. 전체적이고 포괄적이며 완전합니다. 저는 또한 무오하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무류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무오합니다. 잠언 30장 5절부터 6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모든 말씀이 다 순전합니다. 또한 모든 말씀이, 일점 일획까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없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류합니다. 즉 성경 전체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성경은 무오합니다. 원본에는 실수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순전합니다.

넷째, 성경은 충분합니다. 정말로 충분합니다. 시편 19편이 말하듯이 말씀은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는 등 우리의 영혼을 완전히 변화시킵니다. 말씀은 충분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부터 17절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며,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째, 성경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분명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5장의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겁니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말씀에는 결정력이 있습니다. 결정력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누군가 성경의 권위, 무류성, 무오성, 충분성, 능력을 부인한다면 자신의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는다면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척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왜 성경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까? 성경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며, 두번째로는 성경이 주는 풍성한 유익 때문입니다. 풍성한 유익 때문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둘째입니다. 행복의 근원입니다. 잠언 8장 34절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요한은 요한일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누가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누가복음 6장 47절부터 48절, 누가복음 11장 27절부터 28절에 나옵니다. 이외에도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죠. 요한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처럼 성경은 기쁨과 행복과 복의 근원입니다.

셋째로 성경은 승리의 근원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무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부터 11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매번 무엇으로 대응하셨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세 번에 걸쳐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험을 이기는 우리의 승리의 근원입니다. 행복의 근원입니다. 진리의 근원입니다.

넷째로 성경은 성장의 원천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기억하실 겁니다. "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말씀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스펄전은 이에 대해 멋진 말을 남겼습니다. "말씀이 그리스도인을 가지치기한다. 성령님께서 살아있고 능력있게 하신 말씀, 바로 그 진리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치기에 비유하신 겁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에 성장의 힘이 집중되도록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내는 것이죠. 말씀은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행복의 유일한 원천이며, 승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성장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다섯째로 성경은 인도하심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시편 19편 8절은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다’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길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바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죠. 또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합니다. 말씀은 길이며, 동시에 그 길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여섯째로 성경은 소망의 원천입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서 거듭 고백합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와 행복과 승리와 성장과 인도하심과 소망의 원천이며, 여기에 더 많은 것을 더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 달콤하고 순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을 추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본질적 특성과 말씀이 주는 놀라운 유익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말씀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을 멸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 들으셔야 합니다. 첫째로 말씀을 믿으십시오. 믿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라, 내 말을 믿으라." 그리고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믿으십시오. 다시 말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둘째로 말씀을 존중하십시오. 존중해야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높이고 드높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순종을 통해서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지 마십시오. 고린도후서 4장 2절입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셋째로 말씀을 사랑하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시편 119편 9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시편 119편 끝부분에 가면 이와 같은 고백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시편 119편 140절이죠. "...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말씀을 향한 깊은 애정, 깊은 갈망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넷째로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사실 성경을 가장 모욕하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마태복음 7장에 나오죠, 한 집은 홍수에 무너지고 다른 한 집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한 사람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말씀을 위해 싸우십시오. 유다서 3절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동참하십시오.

여섯째로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을 본받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아볼로를 본받으십시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하십시오. 말씀을 전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신실하게 말씀을 믿고, 말씀을 존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위해 싸우고,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말씀을 얕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멸시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여러분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 정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마틴 루터가 성경을 공부했던 방법을 기록한 짧은 글을 읽겠습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과를 수확하듯이 성경을 공부한다. 먼저 나무 전체를 흔들어서 가장 잘 익은 것부터 떨어뜨린다. 그 다음에는 각각의 큰 가지를 흔들고, 그 후에는 작은 가지들을 흔든다. 그리고 나서는 잔가지들을 흔들고, 마지막으로 모든 잎사귀 밑도 살펴본다. 이처럼 나무 전체를 흔드는 것처럼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큰 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각 책들을 공부하고, 작은 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각 장을 주의 깊게 보고, 잔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문단과 문장, 단어와 의미를 꼼꼼히 연구한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참으로 특별한 책입니다. (아모스 러셀 웰스의 시를 들려드리죠.) "내가 지칠 때 성경은 안식처가 되고,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빛이 되어준다. 배고플 때는 생명의 양식이 되고, 두려울 때는 든든한 갑옷이 된다. 아플 때는 치료제가 되고, 외로울 때는 그 안에서 많은 벗을 만나게 된다. 일하고 싶을 때는 도구가 되어주고, 쉬고 싶을 때는 아름다운 선율의 하프가 된다. 무지할 때는 학교가 되어주고,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을 때는 단단한 발판이 되어준다. 춥고 힘들 때는 따뜻한 불이 되어주고, 높이 날아오르고 싶을 때는 날개가 되어준다. 우울할 때는 밝은 태양이 되고, 척박한 곳에서는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 목마를 때는 시원한 생수가 되고, 답답할 때는 상쾌한 바람이 된다. 이렇게 말씀이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니, 나는 이 위대한 성경에 나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실한 양이 되고 양떼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말씀과 계시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웰스의 말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이렇게 말씀이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니, 나는 이 위대한 성경에 나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 정답은 성경을 멸시하거나 가벼이 여기지 않고, 위대하게 여기며, 믿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공부하며, 지키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말씀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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