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디모데후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디모데후서 3장에서 출발해서 좀 다른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과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는 지난 주일에도 16절과 17절을 살펴봤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3장의 문맥 속에서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개념을 좀 더 전체적으로 살펴보지 않고는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이 개념을 다루는 다른 성경 구절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여러분, 성경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우상으로 섬기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을 제외하고 가장 소중한 보물로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기 계시입니다. 제게 왜 성경의 각 책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모든 구절과 문구, 단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지 그 이유를 묻는다면,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드러내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성경을 모두가 알고 배우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 성경 교육 사역과 강해 설교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참으로 장엄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을 줍니다.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의무를 부여합니다. 자, 이제부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본 후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을 펴 주시기 바랍니다. 2절 상반절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부터 읽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2절 상반절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파생되는 모든 의미를 다 설명할 순 없지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간결한 말씀 안에 명확하고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계시의 본질을 알려줍니다. 계시란 무엇일까요? ‘드러내다’, ‘밝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하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하다’,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진리를 공개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두 경우를 설명합니다. 먼저 옛적에 말씀하셨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저는 이 구절이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유대인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즉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여러 부분, 폴뤼메로스(polumerōs)로, 즉 여러 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오경, 예언서, 역사서, 시가서가 있죠.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여러 책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유대인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 모양, 폴뤼트로포스(polutropōs)로 말씀하셨습니다. 환상, 예언, 비유, 유형, 상징, 의식, 현현, 때로는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이죠. 심지어 직접 돌에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며, 이 말씀이 모여 여러 책으로 묶였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구약은 고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가장 뛰어난 종교적 사상을 모은 책도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사색을 모은 책도 아닙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 고대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은 선지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은 아들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전파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서신서는 아들의 삶과 사역의 의미를 깊고도 심오하게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아들이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일,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될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구약의 주제이죠.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의 모든 책에서 주된 인물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신지,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인지,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인간이 겪는 모든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에 대한 계시입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인간의 이야기나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도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인간을 통해,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때로는 시편에서처럼 매우 명확하게 나열됩니다. 반면에,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에스더에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 무엇을 용인하시고 용인하지 않으시는지, 얼마나 거룩함을 원하시는지, 어떤 죄를 벌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통해, 가르침을 통해, 사역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이 다시 오실 세상 끝날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어느 경우든,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리라. 내가 장차 일어날 일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리고 그렇게 약속하심으로써, 사도들과 신약의 다른 저자들에게도 하나님의 감동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의 말이 아닙니다.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2절은 계시, 즉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어떤 과정을 사용하셨을까요? 베드로후서 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신 과정이 바로 영감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여기서 ‘예언’이라는 단어는 미래에 대한 어떤 예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NASB를 직역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언자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입니다. 여기에서 ‘해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필뤼시스(epilusis)’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사사로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에필뤼시스’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놓아주다, 방출하다’라는 의미가 가장 진정한 본질을 담고 있을 겁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예언자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이를 "영감"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에필뤼시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도 예언자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 천재성에서 영감을 받아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소유격, 즉 예언자’의’는 베드로가 성경의 출처나 기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해석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예언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성경의 어떤 말씀도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성경은 인간의 산물이 아닙니다. 인간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매우 명확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어떤 말씀도 인간에게서 만들어진 적이 없습니다. 부정과거 수동태 직설법이죠.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페로(pherō)'는 낳다, 운반하다, 전달하다, 생산하다, 가져오다, 데려오다, 이런 의미입니다. 어떤 말씀도 결코 인간의 의지로 나오거나 전달되거나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성령님이 운반하시고 전달하시고 가져오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죠. 한마디로 성령님으로 가득 찼던 겁니다. 마치 돛을 편 배가 바람에 밀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성경의 저자들을 움직이시고 바람에 밀려가는 배처럼 인도하신 것이죠.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과정입니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 내용이 기록된 과정을 영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수준 높은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수준 높은 종교적 활동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그 과정에 사용된 것이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과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개성까지도 사용하셨습니다. 개인적인 배경, 통찰력, 경험, 인식까지도 사용하셨지만 그 모든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영감의 기적입니다.
인간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읽는 성경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도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겁니다. 저자들의 개성, 경험, 어휘, 마음, 열정, 충동과 별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통합하시는 동시에 모든 단어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진리와 상충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기적입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복음서에서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계시를 주신 과정이 영감입니다. 영감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사람들의 손에 맡겨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 말로 선포되었고, 그 후에 성령의 능력을 얻고 인도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사용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전체는, 그러니까 ‘파사 그라페(pasa graphē)’, 모든 성경의 모든 말씀은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로,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절에 따르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유익에 대해 말하면서 유대인을 다른 민족과 구별되게 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구약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유익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면 이 과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장 4절부터 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정말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이것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모든 거룩한 기록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합니다. 성경의 신성한 유일성을 인정합니다. 초대교회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393년, 397년경의 히포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경의 정경을 확립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정경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죠. 뉴턴은 하나님이 만드신 중력을 발견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매우 초기부터 하나님 자신이 쓰신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공식적인 교회가 모든 책에 공식적인 명칭을 부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초대 교회는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외경으로 제외된 책들도 있긴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과 ‘성경’이라는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갈라디아서 말씀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성경이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와 ‘성경이 말했다’는 같은 말입니다. 성경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은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시편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하고 있는 겁니다. 시편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로 가 보겠습니다. 방금 전에 떠올랐습니다. 로마서 9장 17절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성경이 이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라는 겁니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겁니다. 참고로 성경은 저자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베드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영감을 받은 것은 성경입니다. 저자들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서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영감을 받은 유일한 순간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을 때입니다. 그 순간 외에는 영감을 받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감을 받은 말씀, 하나님이 내쉬신 말씀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이사야, 다윗, 바울, 요한을 비롯한 그 어떤 성경 저자도 영감을 받아서 원할 때마다 성경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서 기록할 수 있었던 그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을 뿐이고, 그 외의 시간에 기록한 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저자들은 하나님이 내쉬신 말씀을 한 단어 한 단어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받아쓰기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목소리를 듣고 기계적으로 단어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쉬신 숨결이 저자들의 마음과 영혼, 정신과 감정, 경험을 통해 흘러서 매 단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말씀이 성령에 의해 전달되었던 겁니다. 성경 저자들은 이를 선포하기도 하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과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었습니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닌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에는 영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이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이라고 할 때, 기록한 인간에게 수준 높은 인간적 능력, 일종의 종교적 천재성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음악계만 봐도 알 수 있죠. 수많은 명곡을 작곡한 엄청난 천재들이 있지 않습니까? 문학계에도 천재들이 있습니다. 명작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감을 받은 시인, 영감을 받은 음악가, 영감을 받은 작가, 영감을 받은 사상가라고 부르는 엄청난 능력을 가진 위대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감은 어떤 높은 수준의 인간적 성취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종교적 천재성 때문에 원할 때 언제든지 성경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저자들 중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말씀하시거나 기록하라고 하셨을 때 성령님의 역사 아래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들은 성경 이외에는 다른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 왜 베드로가 쓴 글이 떠돌아다니지 않는 걸까요? 왜 다른 책을 쓰지 않았을까요? 만일 수준 높은 인간적 천재성 때문에 성경을 기록한 것이라면 왜 책을 계속 더 많이 쓰지 않았을까요?
성경 저자들은 자신들이 쓴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게 흥미로워 보이는 점은 모든 저자들이 일종의 절대적 무류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기록했다고 말할 뿐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 저자들을 보면 대부분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경 저자들은 약 4천 번이나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의식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다녔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실이 그렇습니다. 맹세코 이것은 진실입니다. 여러분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사실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왜 여러분이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을 정당화거나 변호하려는 느낌도, 방어하려는 느낌도 없습니다. 이들 중 대부분이 교육받지 않았고 세상적으로 볼 때 문학적 천재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심오하고 광범위한 초자연적 지혜, 미래에 대한 예언,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완벽히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세상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이들이 기록한 모든 것이 정확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런 주장을 하면서도 전혀 자신을 높이지 않았습니다. 놀랍고도 놀랍습니다. 자신들이 기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기록했습니다.
야고보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성경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했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 즉 구약성경을 염두에 둔 말이죠. 신약성경 저자들도 구약성경 저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구약성경이 직접적으로 약 320번, 간접적으로는 약 천 번 인용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 저자들도 분명히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신약성경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봤듯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단순히 수준 높은 인간적 천재성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자신들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영감으로 된 것이지만 개념만 그렇지 단어들은 아니다.” 저는 수년간 이런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위대한 종교적 사상에 대한 영감을 받아서 이를 자신의 언어로 기록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단어에 얽매이지 말고 개념을 파악해서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면 된다. 단어에 너무 신경쓰지 마라. 단어는 그저 방해가 되는 세부사항일 뿐이다." 또 이런 말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영은 생명을 주지만 문자는 죽인다.”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단어 없이 개념을 전달할 수 있나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단어 없이 개념을 전달하실 수 있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모세가 자신이 말을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기를 사양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 마음과 함께하여 네가 생각할 것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죠.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에스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노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그들에게 고하라.” 생각이 아니라 단어였습니다. 단어 없이 생각을 전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바울은 놀라운 회심의 순간에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사도행전 22장에 기록되어 있죠.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심지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하나님은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할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단어가 없다면 생각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개념입니다. 음표 없는 멜로디나 멜로디 없는 음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빛 없는 태양, 숫자 없는 수학, 암석 없는 지질학, 사람 없는 인류학도 마찬가집니다. 생각은 단어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를 보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을 알려드리죠. 베드로전서 1장 10절부터 11절은 하나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메시아에 관한 진리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다시 말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기록했습니다. 메시아에 대해 말하고 기록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신중하게 탐구하고 연구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단어 없이는 생각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때로 하나님께서 생각 없이 단어만 주신다는 겁니다. 무의식적이나 기계적으로 받아썼다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구약의 저자들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기록했습니다. 종교적 천재성을 발휘해서 정리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해했는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단어들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태복음 24장 3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신성한 내용은 영감을 받아서 기록된 것이지만, 과학, 역사, 지리 같은 세상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기적으로 이런 주장에 반박해야 합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는 오류가 있다. 지리에도 오류가 있다. 숫자에도 오류가 있다. 성경의 과학적 진술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영감은 신성한 내용에 있어서만 진실성을 보장하지 세상적인 내용은 보장하지 않는다.” 이 말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아시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신다.” 이런 논리로 성경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여호수아 10장입니다. 지금 펴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호수아 10장 12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투 중에 태양이 멈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년 동안 비평가들은 비웃고 조롱하면서 말했습니다. “태양이 멈췄다고? 그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관계가 변하지 않는 이상 지구가 멈췄다는 뜻이다.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가? 성경은 정말 비과학적이다.”
하지만 그날 그곳에 있었다면 우리 눈에는 태양이 멈춘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성경을 깎아내리려는 그 비평가도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보면서 “해가 뜨는 모습이 참 멋지네!”라고 말할 겁니다. 참고로 엄밀히 말하자면 해가 뜨는 게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참 멋지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면서 지구가 자전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또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호주 사람들은 지구 아래에 산다.” 지구 아래에 산다는 것은 땅 아래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표현 방식의 하나인 것이죠.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지구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지구에 무슨 구석이 있습니까?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지, 과학적 데이터를 사용해서 기술적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죠.
또 열왕기하 18장에는 산헤립과 히스기야 간의 거래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히스기야가 금 30달란트와 은 300달란트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고고학자들이 히스기야와 산헤립 사이의 거래에 관한 앗수르 시대의 기록을 발견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발견된 산헤립의 기록에는 은의 양이 300달란트가 아니라 800달란트였습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숫자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추가적인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앗수르에서 금을 계산하는 기준은 동일했지만, 은을 계산하는 기준은 달랐다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달란트가 너무나 달라서 앗수르에서는 800달란트가 이스라엘에서는 300달란트였고, 이는 성경이 말한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산헤립의 기록은 앗수르어로 기록되었던 겁니다.
다른 예를 하나 보겠습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예는 민수기 11장에 나옵니다. 구약의 네 번째 책입니다. 민수기 11장 31절을 보겠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라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내 광야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음식이 필요했고 주님께서 먹이실 것이었습니다. 먹이시는 방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바람이 여호와에게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이 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왔고, 메추라기가 진영 곁으로 들어왔습니다. “진영 곁 이쪽 저쪽 곧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그러니까 메추라기가 단순히 진영 사방에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영 이쪽으로 하룻길, 저쪽으로 하룻길 되는 지면이 메추라기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겁니다. 또한 쌓인 높이가 두 규빗, 약 두 규빗이었습니다.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로, 약 45cm정도 됩니다. 따라서 두 규빗은 약 1미터 정도입니다. 대략적인 수치입니다. 한 비평가가 이를 1미터 정도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읽어본 것 중 가장 터무니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영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모든 지면에 1미터 높이로 메추라기가 쌓여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비평가는 메추리의 마리수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19조 5,384억 6,830만 6,672마리가 나왔습니다. 당연히 큰 웃음거리가 되었죠. 19조 마리의 메추라기가 쌓여있다니. 하지만 그 비평가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냈을 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메추라기가 땅에서부터 쌓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나일강에서 광야로 몰아내신 메추라기들이 지면에서 약 두 규빗 높이로 날아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그렇게 지면에서 1미터 정도 위에서 날아다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쉽게 메추라기를 잡을 수 있었던 거죠. 그냥 손을 뻗어서 막대기로 메추라기를 때려서 잡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메추라기들이 1미터 높이로 날아와서 진영 주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만큼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성경이 과학, 역사, 수학 등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든 모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시며 성경 또한 오류가 없습니다. 비평가들은 성경을 조롱하려 하지만, 성경은 과학적으로 정확합니다. 과학의 기본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시간, 힘, 작용, 공간, 물질을 생각해 보십시오. 1903년에 사망한 허버트 스펜서는 모든 것을 시간, 힘, 작용, 공간, 물질의 범주로 분류했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이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눴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기본 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1903년에 사망한 허버트 스펜서는 이러한 발견으로 위대한 천재로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스펜서가 깨닫지 못한 것은 이 발견이 성경의 첫 구절에 이미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시간이죠, 하나님이, 힘이죠, 하늘과, 공간이죠, 땅을, 물질이죠, 창조하시니라, 작용이죠. 존재의 기본 틀이 성경의 첫 구절에 이미 나와 있는 겁니다. 우주는 시간, 힘, 작용, 공간, 물질의 연속체이며, 이 요소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연속체 전체는 처음부터 동시에 존재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함께 시작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과학도 이 틀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틀의 어느 한 요소라도 빠지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가 다 창조된 후에, 모든 과정들은 질서 있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모든 에너지와 물질은 상호작용에 의해 유지되어 더 이상의 창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간, 힘, 작용, 공간, 물질만 생성되면 끝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창세기 2장 2절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요소들을 창조하셨고 그것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창조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창조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완전한 중단은 과학에서 ‘열역학 제1법칙’ 혹은 ‘질량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불립니다. 이 법칙은 아인슈타인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발견한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과학 원칙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이며 확실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셨던 일을 멈추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게 전부였습니다. 이제 우주는 그 자체의 본질에 의해 유지될 것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무질서도 증가의 법칙’으로 한 행렬의 모든 체계는 점점 쇠퇴하고 분해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명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은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과학은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왜 모든 것이 무질서로 감소하고 쇠퇴 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경만이 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데, ‘죄’라는 단 한 단어입니다. 죄를 믿지 않는다면 존재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된 과학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다루는 모든 것은 정확합니다. 성경은 “땅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매다시며”라고 말합니다. 지질학, 측지학, 기상학, 생리학, 생물학, 인류학, 천문학, 수문학 등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든 상관없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정확합니다.
이제 성경에 나오는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딱 하나만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28장입니다.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통찰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스겔 26장부터 28장입니다. 26장을 보겠습니다. 이 장을 보면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에스겔에게 주어집니다. 두로는 페니키아의 요새였습니다. 현 팔레스타인 지역의 페니키아 해안에 위치한 상당히 큰 도시였습니다. 에스겔 26장 2절부터 두로가 받을 심판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다시 말해서 두로가 예루살렘을 조롱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두로야 내가 너를 대적하여 바다가 그 파도를 굽이치게 함 같이 여러 민족들이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무너뜨리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나도 티끌을 그 위에서 쓸어 버려 맨 바위가 되게 하며 바다 가운데에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가 이방의 노략거리가 될 것이요 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왕들 중의 왕 곧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 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공성퇴를 가지고 네 성을 치며 도끼로 망대를 찍을 것이며 말이 많으므로 그 티끌이 너를 가릴 것이며 사람이 무너진 성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이 그가 네 성문으로 들어갈 때에 그 기병과 수레와 병거의 소리로 말미암아 네 성곽이 진동할 것이며 그가 그 말굽으로 네 모든 거리를 밟을 것이며 칼로 네 백성을 죽일 것이며 네 견고한 석상을 땅에 엎드러뜨릴 것이며 네 재물을 빼앗을 것이며 네가 무역한 것을 노략할 것이며 네 성을 헐 것이며 네가 기뻐하는 집을 무너뜨릴 것이며 또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에 던질 것이라 내가 네 노래 소리를 그치게 하며 네 수금 소리를 다시 들리지 않게 하고 너를 맨 바위가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 나 여호와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두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꽤 구체적이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예언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예언입니다. 두로는 위대한 페니키아의 도시였습니다. 주전 7세기부터 페니키아를 지배했습니다. 두로에는 강력한 성벽이 있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약 45미터였고, 두께는 약 4.5미터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두로는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두로의 왕은 히람 1세였으며, 다윗이 궁전을 짓는 것도 도왔고, 역대상 22장에 따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도 도왔습니다.
이 예언이 주어진 지 3년 후에 느부갓네살이 와서 두로를 13년간 포위했습니다. 두로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경우 외부에서 모든 것을 차단하면 결국 사람들이 굶주리게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585년부터 573년까지 13년간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자 결국 두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성벽과 탑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파괴하며 에스겔이 예언한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물론 에스겔서를 읽고 한 건 아니죠. 느부갓네살은 두로에 들어갔지만 전리품을 찾지 못했습니다. 전리품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전에 두로 사람들이 함대를 이용해서 전리품을 800m 떨어진 해안의 섬으로 옮겼던 겁니다. 에스겔 29장에서 에스겔은 느부갓네살 왕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수고한 대가를 두로에서 얻지 못하였느니라.” 정확히 그렇게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도착했을 때 두로 사람들은 모든 귀중품을 섬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에게는 찾으러 나갈 해군력이 없었습니다. 그 섬은 이후 새로운 도시가 되었고 250년 동안 번성했습니다. 예언의 일부는 성취되었지만, 느부갓네살에 관한 부분, 성벽을 파괴하고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학살하며 전리품을 얻지 못하리라는 부분만이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옛 장소는 폐허로 남아 있었고, 잔해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250년 후, 알렉산더 대왕이 나타났습니다. 24살이었습니다. 보병 3만 3천명과 기병 만 5천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를 이제 막 물리치고 이집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보급품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제 섬 도시가 된 두로에 들러서 “내 모든 병사와 말과 군대를 위해 보급품을 제공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두로 사람들은 “우린 섬에 있고 너희는 해군이 없으니 도와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말을 듣고 아주 화를 냈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일이었죠.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섬으로 갈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에스겔이 말한 대로 두로가 바위처럼 깎여지고 모든 잔해가 바다에 던져질 것이라는 예언을 실현하기로 했습니다.
대체 어떤 멀쩡한 정복자가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이미 그곳을 정복했는데 왜 모든 돌과 잔해를 주워서 바다에 던지면서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이 정확히 일어나야만 했고, 알렉산더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잔해를 모아서 길이 600미터, 너비 60미터의 제방을 섬까지 건설했습니다.
그 섬은 강력한 성벽으로 요새화되어 있었고, 성벽은 바다 끝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성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이를 위해서 약 49미터 높이, 20층 높이의 거대한 탑인 헬리오폴리스를 세웠습니다. 이 탑은 대포와 낙하 다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둑길을 따라 탑들을 밀어내고 사람들에게 대포를 쏘았습니다. 성벽에 다다랐을 때 다리를 내려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두로 사람들은 성벽에서 물건을 던지고 화살을 쏘면서 공격했습니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둑길을 건설하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북'이라고 불리는 큰 보호막을 발명했습니다. 이 보호막은 거대한 껍데기 형태로 되어 있는데, 둑길을 건설하는 동안 노동자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알렉산더는 7개월에 걸쳐서 두로를 함락시켰고, 몇 달에 걸쳐 8천명을 학살했습니다. 또한 7천명을 처형하고 3만명을 노예로 팔아서 예언의 모든 세부 사항을 성취했습니다. 예루살렘은 17번 재건되었지만, 두로는 한 번도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정확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현재 두로에 가면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물고기 그물을 말립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입니다. 그런 일이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약 7천 5백만분의 1입니다.
그런데 시돈이라는 이웃 도시도 예언을 받았습니다. 에스겔 28장 22절입니다.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그 가운데에서 심판을 행하여 내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지라 내가 그에게 전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인즉 무리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겠고.”
피비린내 나는 일이 정말로 벌어졌습니다. 참고로 두로에서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은 바알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언에 따르면 거리마다 피가 흐르고 칼이 난무했지만, 궁극적인 멸망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거리마다 피가 흐르고 칼이 난무했습니다. 그 불쌍한 도시는 계속해서 포위를 당하고 공격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도시입니다. 오늘날 그 도시는 사이다(Saida)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주전 351년에 시돈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혁명이 진행되는 무렵에 도시가 포위되었고, 도시를 구할 모든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 중 4만 명은 페르시아의 폭력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집과 함께 스스로 불태웠습니다. 거리마다 피가 계속해서 흘렀습니다. 사이다(Saida)라고 불리는 시돈은 세 번은 십자군에게, 세 번은 무슬림에게 점령당했습니다. 1840년에는 영국, 프랑스, 터키의 연합군에 의해 폭격당했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시돈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겁니다.
성경을 공부하면 절대적으로 정확한 역사적 예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0장은 이집트의 멸망을 예언했고, 나훔 1장은 니느웨의 멸망을, 이사야 13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호세아 13장은 사마리아의 멸망을, 에스겔 25장은 모압과 암몬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수학자 피터 스토너는 이러한 상세한 예언들 중 11개를 택해서 각각의 예언이 우연히 일어날 확률을 계산했는데, 그 결과는 5.76x10의 59승분의 1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계산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피터 스토너는 이렇게 추정했습니다. 만일 전체 우주에 2조 개의 은하가 있고 각 은하에 1000억 개의 별이 있다면, 이 모든 은하에 있는 모든 별의 개수는 총 몇개일까요? 2x10의 25승 개입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숫자이죠. 이런 종류의 확률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과학이나 지리, 역사 등, 그 어떤 주제를 말하더라도 모두가 정확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유익은 무엇일까요? 원래 본문으로 돌아가서, 디모데후서 3장으로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그 유익은 무엇일까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가진 이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요? 첫째로, 믿어야 합니다. 믿으세요. 둘째로,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셋째로,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19편 97절에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명령을 실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위해 싸우십시오. 유다서 3절은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라고 합니다. 또한 전파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 2절은 “말씀을 전파하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생 소를 몇 마리나 먹게 될까요? 150마리 정도입니다. 어쩌면 조금 더 먹을 수도 있습니다.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적어도 닭 3천마리, 어린 양 225마리, 어른 양 26마리를 먹게 될 겁니다. 베이컨과 햄만으로도 돼지 310마리를 먹을 겁니다. 곡물은 100제곱미터, 과일과 채소는 200제곱미터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육의 양식을 먹는 동안 영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도 먹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정말 놀랍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역사를 아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신 하나님, 과학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영적 차원을 이해하실 뿐만 아니라 그 실체이신 하나님, 얼마나 귀한 보물이신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존중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믿게 하옵소서. 말씀을 공부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위해 싸우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옵소서. 각종 육의 양식으로 우리를 채우는 동안,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성경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말씀에 대한 헌신을 새롭게 다짐하게 하옵소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말씀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또한 모든 삶의 경험과 시련 가운데 말씀을 적용하는 것을 통해 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에 있는 모든 필요를 채워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