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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히 ‘니콜스 시스터스(the Nichols Sisters)’를 초청해서 함께 찬양했는데, 선곡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늘 설교 주제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과 잘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랫동안 묵상하며 살펴보았습니다. 또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제 마음을 살피고 무슨 말씀을 드릴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제 마음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참 복잡하지만, 우리 삶은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너무 복잡한 나머지 때로는 가장 기본적인 핵심을 놓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 문제와 마주해야 합니다. 이 본질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 들었던 생각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너무 많은 나머지 머리가 아플 정도라는 겁니다.

지난주에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저자가 이런 주장을 하더군요. 우리에게 주어진 대안과 선택지가 너무 많은 나머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우선순위를 알지 못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무수한 선택지에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일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냥 아이들과 햄버거를 먹으러 가는 것 같은 간단한 일도, 어디로 갈지 결정을 못해서 15분씩이나 고민하면서 실랑이를 벌이지 않습니까?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결정하기가 더 어려워진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간단한 예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된 사회에 살고 있어서 선택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어떤 오락을 즐길지, 어떤 교육을 받을지,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하고 선택하고 또 선택해야 합니다.

이처럼 선택의 연속이 되어버린 삶 속에서, 어떤 차를 살지, 어떤 집을 살지, 어떤 옷을 살지를 비롯해 수많은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이 이러한 선택지와 뒤섞여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일, 주님과 관련된 일, 교회와 관련된 일들이 그저 여러 개의 선택지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선택사항 중에서 하나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갈 것인지, 골프를 칠 것인지, 드라이브를 갈 것인지, 브런치를 먹으러 갈 것인지, 가족과 함께 기도할 것인지, 텔레비전을 볼 것인지, 야구 경기를 보러 갈 것인지, 소풍을 갈 것인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다 보니 영적 차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영의 일들이 다른 일들과 뒤섞여 버렸습니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우리는 주님과 관련된 일들을 우리가 선택하고 싶은 일 그 어딘가에 끼워 넣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적으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찬양을 부릅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찬양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미 여러 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실제로 우리 삶의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세상의 것들과 뒤섞인 일련의 선택지와 대안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만큼 세상의 것들도 똑같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 말은,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을 경우에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줄 때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최선의 선택일 경우에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우려하는 것은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 그리고 심지어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도 잠재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성함과 거룩함의 의미, 신성한 것에 대한 의무를 잃어버렸습니다. 거룩함과 신성에 대한 의무를 잃어버리고 단지 온갖 선택지로 가득 찬 삶의 일부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성도의 주된 특징은 무엇일까요? 구약 성도의 가장 거룩한 특징을 찾아 보십시오. 무엇일까요? 잠시 신명기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구약의 영적 행위의 핵심, 구약 성도의 헌신의 핵심, 영적 덕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바로 온 마음, 온 뜻, 온 힘을 다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우선순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택사항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선택사항이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선택사항이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을 압도하는 최우선 순위에 있었습니다.

신명기 10장 12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핵심은 무엇인가요?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도를 행하고, 온 마음과 온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행하고 온 마음과 온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것을 간음과 같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사람은 간음하는 자와 마찬가집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어야 할 유일무이하고 친밀하며 전심을 다한 관계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명기 11장 1절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다시 한 번 동일한 말씀을 받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이 말씀에는 어떤 예외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독보적인 명령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답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계명이 결국 이 한 가지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신명기 10장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 풍성한 복과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됩니다. 다니엘의 예를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9장에서 다니엘은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이처럼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주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인자를 베푸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복을 누리며 자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했던 기도를 느헤미야도 거의 비슷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1장 5절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서로 전혀 관련이 없는 두 사람, 느헤미야와 다니엘이 비슷한 기도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당시에 유대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던 기도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도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언약에 약속된 복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온 마음과 온 뜻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입니다. 시편 18편 1절에서 시편 기자도 마음을 다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의지적인 행위입니다. 다른 것들에 사랑을 빼앗기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신약에서도 그럴까요? 동일할까요? 신약에서도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 이와 같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8절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표시입니다. 에베소서 6장 24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실제로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고린도전서 16장 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처럼 우리는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를 둘러보면 그런 헌신과 결단, 하나님의 우선순위에 대한 전적인 복종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영원한 가치보다 일시적인 것들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식의 자리에 나아오면서 자문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요한일서 4장 19절 말씀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 성찬식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상징인 십자가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멈춰서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받고 싶어하면서도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리는 데는 그만큼 열심을 내지 않는구나.” 하나님의 사랑과 저의 사랑이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실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원하면서도 하나님께는 조금밖에 돌려드리지 못합니다. 우리 시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도 그렇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기중심적인 신학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말하면 이루어질 것이다”라거나 “예수님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다 해주실 겁니다”라는 식의 태도 말이죠. 본래 기독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 모습으로 완전히 변질된 거죠. 본래의 의도가 완전히 왜곡되어 버린 겁니다.

저는 어제 존 번연의 영적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구주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기까지의 영적 순례 여정을 추적하고 있는 책이죠. 읽다 보면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 죄인이 자신의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지옥에 떨어질 것을 깨닫고,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하기 때문에 주권적인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 두려워하며, 자신이 택하심을 받아 구원받기를 간절히 외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게 되었을 때, 자신의 죄악을 끊임없이 되뇌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단 하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었죠. 번연이 치른 대가가 무엇인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으면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겠구나.” 자존감을 강조하는 교리나, 신앙생활이 곧 번영과 건강과 부를 가져온다는 교리, 값싼 은혜와 손쉬운 믿음을 가르치는 교리들을 정면으로 반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나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가 편한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죠. 문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느새 슬그머니 잘못된 길로 빠져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가 노린 효과적인 전략이었습니다. 사탄은 이를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해냈죠.

저는 지난 장로 회의에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그레이스 교회에서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저녁 예배, 전도 훈련, 기도만 남기고 다른 활동은 없애는 게 어떨까요? 다른 모든 활동은 중단하고 이것들만 남겨두면 성도들이 현재 어떤 수준에 있는지 드러날 겁니다. 각자의 신앙적 헌신도가 바로 보일 겁니다." 결국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실천하기가 어려울 뿐이죠.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다른 누군가의 삶과 비교해서 자신을 시험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식을 준비하면서 요한복음 21장을 아주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요한복음 21장에 집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8절에 기록한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렇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몇 차례 나타나신 후였죠. 마태복음 28장 16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절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이겠죠,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분명 빌립과 안드레였을 겁니다. 이들이 모두 산으로 갔습니다. 리더인 시몬 베드로와 함께 말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랑의 실패입니다. 사랑이 실패하는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산에 가서 기다리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을 굳게 맹세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부터 35절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확고하게 사랑을 고백했는지 보십시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도 같은 말을 했죠. 이렇게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하겠습니다.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랑하겠습니다.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입으로는 완벽한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모든 말이 진실되게 들렸죠.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사랑을 맹세했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작은 시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산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힘든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언덕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사랑을 입으로만 표현한 것이 어쩌면 실패의 빌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3절을 보면 그 사랑이 실패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이는 아마도 “원래 하던 어부 일을 다시 하겠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내가 올 때까지 산에서 기다리라”는 단순한 명령을 받았을 뿐인데 이를 어겼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영적 갈등 혹은 심리적 갈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불순종한 것은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리더였기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라며 따라나섰고, 결국 모두가 산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미 두 번이나 만난 적이 있어서 분명히 살아계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의 간단명료한 지시를 순식간에 저버린 것이죠.

헬라어 원문에는 “그들이 나가서 그 배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베드로가 어부 시절에 사용하던 바로 그 배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가려 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실패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했다 한들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아주 간단한 명령, 단 하나의 우선순위를 받았음에도 그것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명을 저버렸고, 결국 베드로의 사랑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간단한 명령 하나에도 순종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제 여러분께 매우 분명한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랑은 불순종할 때 실패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감정을 느끼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는지, 어떤 찬양이 여러분을 눈물 짓게 하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감상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불순종할 때 실패합니다. 항상 시험대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어떻게 한다고 하셨죠? “내 계명을 지키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했기에 사랑이 실패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은 것이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모두 주님이 주관하고 계셨기 때문이죠.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도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글쎄, 나는 전도도 잘 모르고 천국에 대해 설교하는 것도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으니 그걸 하러 가야겠어.” 하지만 그 한 가지마저도, 즉 고기를 잡는 것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평생 고기를 잡았으니 아마도 갈릴리 바다의 물고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절별로 또 하루 중 시간대별로 물고기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보시다시피 베드로는 전에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의 삶에 손을 얹으시고 주관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훈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실패를 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뒤에 사랑의 회복도 함께 봅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을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찬양을 부르면서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도 하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제 말은, 존 번연의 영적 자서전을 읽다 보면 우리가 그야말로 신앙의 경량급, 그러니까 새들이 물 한 번 튀기고 날아가는 정도의 얕디얕은 신앙인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선교사들의 헌신을 보면 더 그렇습니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육신이 말 그대로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때론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바쳤지만 그 삶의 목적으로 보면 전혀 헛되지 않은 일이죠. 중국 혁명 때 순교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단순한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과연 나의 신앙적 결단이 어느 정도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중의 더 힘든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내용으로 시험하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단지 '산에 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회복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절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참고로, 부활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 전까지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이 받으신 영광으로 인해 예수님의 정체성이 어느 정도 가려져 있다가 나중에야 드러났던 것이죠. 그래서 해변에서 9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예수님은 이미 답을 알고 계셨고,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이를 악물고 하는 대답 같았을 것입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왜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했을까요? 저는 이해가 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요한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님만이 물고기를 통제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만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왜냐하면 말 그대로 팬티 한장만 입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뛰어들었습니다. 그저 주님께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나 봅니다. 다른 제자들은 배에 남아서 그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싣고 힘겹게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베드로는 벌써 저 멀리 가버린 뒤였죠. 제자들이 그렇게 배와 그물을 끌고 육지에 도착했을 때, 놀랍게도 예수님이 숯불을 피우고 계셨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틀림없이 베드로는 엄청 힘이 셌을 겁니다. 혼자서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든 그물을 끌어올렸으니 말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것이 바로 사랑의 회복입니다.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아무리 저의 사랑이 실패했어도, 아무리 여러분의 사랑이 실패했어도 회복이 있다는 겁니다. 말씀드릴 것이 많지만 딱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시면 좋겠습니다. 회복을 시작하시는 분은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아시겠나요? 회복은 언제나 구주 예수님에 의해 시작됩니다.

때론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난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사랑하지 못했어.” 이런 자책감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는 겁니다. 해변으로 돌아온 탕자를 책망하는 채찍이 아닌, 따뜻한 아침 식사로 맞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 실패하는 모습도 보지만, 동시에 그 사랑이 회복되는 것도 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저 역시 산에 있어야 할 때 수없이 바다로 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가 해변으로 돌아올 때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저를 꾸짖으시려고 채찍을 들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신 아침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와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시면서 말이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분은 이런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입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우리의 불순종조차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할 때도 있지만, 주님의 끝없는 사랑까지 막을 순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품으시려고 손을 내밀고 내밀고 또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베드로의 열정에 감동을 받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물속으로 뛰어든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었던 겁니다. 예수님이시란 걸 깨닫는 순간 양심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때 베드로가 있어야 할 곳은 산이었지 물 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이토록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실수를 하면 할수록 그보다 더 빠르게, 두 배는 더 빠르게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실수했을 때 얼마나 빨리 일어나느냐, 그것이 핵심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갈망도 잃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뒷전인 채 겉핥기식 신앙생활에 안주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정말 걱정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 이상 귀하게 쓰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더라도 얼마나 빨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오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실패와 회복, 나아가 사랑의 필요성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신 예수님이, 13절을 보면 친히 떡과 생선을 건네주십니다. 식사를 준비하시고 직접 나눠주기까지 하신 거죠.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앉아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왕인 나를 배신했으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라.”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뿐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아침을 준비하셨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아침을 준비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아침식사를 준비하시다니요? 그러니까 제 말은 주님이 아침식사를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오히려 사랑을 저버리고 불순종했던 제자들을 섬기신 겁니다. 이 모습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저 역시 수없이 주님의 사랑을 저버렸지만 주님의 사랑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마다 오히려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섬겨주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14절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이제 매우 익숙한 구절인 15절을 통해서 사랑의 요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수님은 베드로를 옛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옛 모습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여기에서 예수님은 ‘아가파오(agapaō)’라는 단어를 사용하셔서 최고의 사랑, 최고의 헌신을 말씀하신 겁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죠.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아마 이런 의미로 물으셨던 것 같습니다. “네가 정말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또는 베드로의 배, 그물, 바다, 물고기, 어려서부터 사랑해온 모든 것들, 일상을 채우고 있던 모든 것들을 가리키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들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죠. 다만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사명과 달랐을 뿐입니다. “네가 정말 네 길과 네 인생, 네가 이루고 싶은 것들, 네가 원하는 것들, 네가 즐기는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가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면 고기 잡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님은 '아가파오(agapaō)', 즉 최고의 사랑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phileō)', 즉 친근한 사랑을 뜻하는 단어로 대답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주님 그러하나이다 제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주님이 “위선자야, 방금 전에 나를 배신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신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기를 잡지 말고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더 이상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목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통해서 보여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시간은 어디에 쓰느냐? 돈은 어디에 쓰느냐? 체력과 정신적 에너지는 어디에 쓰느냐? 앞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있느냐? 진정한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랑, 곧 아가파오(agapaō)로 사랑하느냐? 시몬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전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은 주로 먹이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는 목양과 관련이 있습니다. 양떼를 돌보라고 하십니다. 고기 잡을 때가 아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나님 나라 안에 머물러라. 너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라. 결국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그 사랑을 보여주거라. 너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적을 위해 쏟아붓 거라.”

그런 다음 예수님은 세 번째로 물으셨습니다. 제 생각에 이렇게 세 번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각각에 대해 한 번씩 기회를 주신 거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느냐?” 주님은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 즉 ‘필레오(phileō)’로 내려오셔서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최고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주님을 좋아합니다”로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네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세 번째로 “네가 나를 좋아하느냐?”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세 번 물으셨기 때문에 근심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생각했던 수준의 사랑조차도 의심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사랑에 대한 시험은 감정이 아닙니다.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찬양을 부를 때 느끼는 전율도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삶의 우선순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영적인 것에 있는지 육적인 것에 있는지, 하늘의 것에 있는지 땅의 것에 있는지, 즐길 수 있고 잘할 수 있는 고기 잡는 일에 집중하는지, 아니면 영적인 일인 양을 치는 일에 헌신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제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던 접근법을 말씀드리죠. 예전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신 적이 있나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저나 다른 목사들, 또는 선교사들을 보면서 뭔가 다른 차원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말이죠. 마치 잘 이해할 수 없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렸을 때 신비주의 작가들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참 이상하고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인생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갑자기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도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마치 ‘퐁’하고 튀어올라서 갑자기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교회나 수련회 같은 곳에 가보면 누군가가 헌신에 대해 아주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승리주의'라고 부르는데, 제가 말하는 '거룩한 도약’과도 같습니다. 어디론가 훅 뛰어올라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더 깊은 영적 삶을 이해하게 되면,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되면, 모든 것을 제단에 바치면” 그런 도약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런 것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도약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들이 도약하려고 애쓰는 것을 봤지만, 나중에 보면 다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 뒤로도 도약할 수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초자연적인 사랑의 능력을 가진 슈퍼맨 기독교인들이 사는 특별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 헛된 생각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매일의 순종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도약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삶에서 어떤 전환점이 되는 순간들이 있긴 합니다. 성경 말씀의 진리를 깨닫거나,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죄를 내려놓거나, 진심으로 신실하게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다른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성장 과정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어떤 단계는 다른 것보다 크고 중요할 수 있지만, 결국은 다 성장 과정의 일부입니다. 예수님을 점점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모두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신비한 경험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18절부터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네가 순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사랑의 대가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21장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의 실패, 사랑의 회복, 사랑의 요구, 사랑의 대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19절에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22절 하반절에서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핵심은 순종입니다. 순종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이렇게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마치 어떤 어린 소녀가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엄마한테 안기면서 하는 말처럼 말이죠. “엄마, 전 인형을 오래 사랑해줬는데 인형은 절 사랑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엄마한테 왔어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를 보면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도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부족했던 사랑을 고백하고 회복을 구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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