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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다. 임사체험보다 조금 더 충격적인 사건 정도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영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어린이의 미소 속에서 다시 살아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보기도 아닙니다. 실망으로 가득 찬 막다른 길에도 희망을 보여주는 예시 정도로 여겨서도 안됩니다.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진정한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부활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고 영원한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핵심 의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고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다루지 않는다면 예수님 부활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논의도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이 사건을 통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입니다. 부활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원한 운명이 갈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부활에 대해 기독교의 역설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에는 겉으로는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역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을 믿고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면 흥미로운 역설이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땅에 있지만 수도는 하늘에 있는 나라입니다. 지상에는 영토가 없는 나라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멸시받지만 하나님께는 사랑받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놀랍게도 한때는 모두 노예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고귀한 자리에 있고, 한때 악인이었던 사람들이 의인이 되었으며, 범죄자였던 이들이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역자들은 충성된 신하가 되었고, 원수들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종이 된 사람들, 패배자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승리자가 된 사람들, 약함이 곧 영광인 영웅들, 가장 높은 목표가 겸손인 승리자들로 가득합니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완전한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 살아가며, 그 자유는 다시 하나님의 법에 온전히 매여 있습니다. 이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왕은 참으로 특별한 분이십니다. 왕이시지만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으며, 재판장이시지만 죄인을 벌하는 대신 직접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하늘의 영광스러운 통치자이시지만 이 땅에서는 가시관을 쓰셨고, 생명의 주관자이시지만 도리어 살해당하셨으며,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바로 그 인간의 손에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왕으로 정점에 이릅니다. 이 진리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으나 죽은 자에서 죽었다가 산 자로 바뀔 수 있게 되었죠. 제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역설입니다.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에서 죽었다가 산 자로 바뀌는 것 말입니다. 이 두 표현이 모순된 것처럼 들리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이고,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산 자’ 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 이제부터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 구절을 통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2장, 에베소서 2장입니다. 오늘 아침에 말씀드리려는 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경 말씀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는 죽은 자인지, 아니면 죽어가는 살아있는 자인지를 결정짓는 핵심에 부활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이 우리에게 전하는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에서 ‘죽었다가 산 자’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자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7절까지를 읽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제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5절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진 의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기독교만의 특별한 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사람은 죽은 상태입니다. 죽어 있습니다. 이 살아있으나 죽은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들도 한때는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아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었던 겁니다. 영적으로 영원히 죽어 있었습니다.

이는 이 편지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보면 “다른 이들과 같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전 인류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바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상태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도처에 문제 해결사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바꾸고 저것을 바꾸면 된다고 말합니다. 교육을 더 잘하면 된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면 된다, 인종 간의 갈등을 줄이면 된다, 자존감을 높이면 된다는 둥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살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사회적 감수성을 키우고, 사회적 교육을 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문제는 심리적인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문제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마음속의 불안을 가라앉히지도 못한다. 결국 자신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고, 자존감도 키워야 한다. 이런 심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고 자신과 잘 지낼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간의 문제는 사회적인 것도, 심리적인 것도 아닌 환경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그동안 받아온 대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학대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면서 온갖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이 복잡한 세상에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늘 오해받고, 꿈을 이루지도 못한 채, 결국 환경 때문에 망가져 간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과도 어울리지 못하며,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진짜 문제는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영적으로 죽어있다는 겁니다. 육체는 살아있지만 영은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도 없게 됩니다. 불신자는 단순히 아픈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완전히 죽은 상태입니다. 이 영적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반응할 수 없고, 영적인 것들에 전혀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무감각한 상태입니다.

어느 날 목양실에 있을 때였습니다. 로스코 거리에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아기 엄마가 울먹이면서 말하기를 아기가 침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면서 누가 좀 와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구요. 제가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보니 침대에 누워 죽어서 차갑게 식은 아기가 있었습니다. 아기 엄마는 본능적으로 아기를 안아올려서 뽀뽀를 하고, 안아주고, 몸을 문질러주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아기가 엄마의 사랑과 애정에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몇개월 된 아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본질입니다. 그 어떤 자극에도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정의하는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저는 수년간 수많은 장례식을 치르면서 관 속에 누인 어린 아기들도 많이 봤습니다. 아기 엄마들은 작은 아기를 들어올려서 마지막으로 입맞춤을 했죠. 마치 그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반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신성한 자극에 대해 죽은 상태입니다. 모든 죄인은 이 동일한 상태에 있습니다. 완전히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죽어있습니다. 죄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부패의 정도가 다를 뿐이죠. 결국 이 세상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의 무덤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살아있으나 죽어있다고 말합니다.

19세기 스코틀랜드 설교자 존 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걸어다니는 죽은 자이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은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지옥의 고통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대해 이야기해도 관심이 없고, 지옥에 대해 이야기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되거나 고침을 받거나 회복되거나 소생되는 것으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부활이 필요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필요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인류의 문제이고, 세상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 수도 없습니다. 어리석고 헛된 것처럼 보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진리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여섯 개의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죄'입니다. 1절을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허물과 죄는 모두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율법을 어기는 도덕적 악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죽어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면, 마치 시체처럼 그 어떤 영적인 자극에도 반응할 수 없겠죠. 당연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죄의 영역, 즉 죄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죽어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죽어 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우리는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영적 사산아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를 뜻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문자적으로 볼 때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목표물을 맞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기준은 완전하여 아무도 그 기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아무도 이르지 못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강도나 살인자, 아동학대범, 성범죄자, 조직폭력배 같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죄는 사람이 ‘하는 것’보다는 ‘하지 못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나쁜 행동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능력에서 드러납니다. 완벽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죄를 보여줍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며 인간적인 선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1절에 나오는 또 다른 단어는 '허물'입니다.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거나 길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방향을 잃은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죠. 인간은 이처럼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길을 잃었습니다. 죽은 상태로 방황하면서 하나님을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도 못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 채 완전히 길을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길 잃은 죄인’, ‘잃어버린 죄인’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인간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진리와 덕목에서 멀어졌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시편 기자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까 이 두 단어는 영적으로 죽은 인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짓는 상태에 사로잡혀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에 계속해서 미치지 못하고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이 두 단어는 모든 종류의 죄를 포함하는데, 생각으로 짓는 죄, 말로 짓는 죄, 행동으로 짓는 죄 등 모든 형태의 죄를 아우릅니다. 포괄적인 불의이자 완벽한 실패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길에 완전히 무감각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 가운데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기준에 전혀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무감각 때문입니다.

두번째 단어는 2절에 나오는 “세속성”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여기서 말하는 세속성, 즉 세상 풍조나 세상의 길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세상의 체계를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코스모스(kosmos)', 코스모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의 체계를 의미합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를 뜻하는 말로, 무질서를 뜻하는 '카오스(chaos)'의 반대말입니다. ‘카오스’는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코스모스’는 질서를 의미합니다. 질서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이 세상 체계는 매우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놀랍도록 조직적인 존재여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연결망을 만들어냅니다. 사회생활, 경제활동, 정치, 여가, 오락 등 모든 영역에서 체계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인간은 매우 조직적인 존재로서 코스모스, 즉 삶의 질서를 만들어가지만, 이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기준을 따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정신입니다. 세상의 작동 방식이죠.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는 죽어있지만, 이 세상의 체계 속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극에 반응하고 느끼죠.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죽어있지만, 이 세상에서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저 그 시대가 추구하는 방향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시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시대가 허용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쫓아가는 겁니다. 그 시대가 말하는 가치와 우선순위, 관용의 기준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론조사, 신문, 잡지, 책, 주변 사람들, TV, 영화, 음악, 정치인, 교육가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세상이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형성되는 겁니다. 현대 사회는 인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성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시대 흐름을 따라갑니다. 물론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또한 시대정신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대정신은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거짓 종교들도 만들어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이 세상 체제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깊이 빠져들어 있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불가능합니다. 다른 영역에는 무감각한 반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설명을 계속하면서 더 암울한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서 세 번째 단어인 “사탄”이 등장합니다. 물론 사탄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2절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또는 ‘지금 역사하는 영’이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오직 자신을 둘러싼 세상적인 환경에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적 환경이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악한 체계를 말하는데, 이 모든 악한 체계의 배후에는 이를 조종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습니다. 바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죠. ‘공중’이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영역이자 환경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이며, 이곳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바로 사탄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이 세상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은 '자유'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죠.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 인간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뜻대로 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갇혀 있고, 하나님의 실재와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대신 우리를 둘러싼 악한 세상의 영향력에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죠. 우리는 죄에 빠져 있고, 이 악한 체제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의 죄성을 공격합니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한때 하나님의 천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천사,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모든 불신자의 삶을 직접 조종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탄과 악마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반하는 악한 영향력의 체계를 만들어서 죄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탄이 이 세상 체계를 설계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종교가 사탄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려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에 반대하려 합니다. 그래서 종교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찾지 못하도록 거짓 종교들을 만들어냅니다. 사탄은 이런 거짓 종교 체계 속에서 마치 빛의 천사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채 끊임없이 죄 가운데 빠져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가치관과 체계에 휘둘리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최고의 악한 영인 사탄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사탄의 명령을 따르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이 일을 수행하고 있죠. 여기서 네번째 단어가 등장하는데, 상황이 더 심각해집니다. 바로 “불순종”입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사탄이 특히 불순종하는 자들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영적으로 죽은 채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탄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순종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셈족 특유의 표현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습관적으로 불순종하는 성향을 보일 때 사용했습니다. 구약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누군가가 악한 성품을 보이면 ‘악의 아들’ 또는 사탄의 옛 이름인 ‘벨리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에 깊이 빠져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이 세상 체계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증오를 퍼뜨리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이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 이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하며 불순종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에 반대합니다. 목표는 죄인들이 노골적인 악행이든, 거짓된 종교적 위선이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도록 만드는 것이죠. 사탄은 계속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다섯번째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정욕’, 즉 ‘육체의 욕심’입니다. 3절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하나님께 죽어 있었습니다. 마치 죽은 몸이 자극에 반응할 수 없듯이, 하나님께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죄악에 완전히 파묻혀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악한 세상 체제는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이는 사탄이 교묘하게 조종하는 것으로,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는 반대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에는 육체의 욕심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있습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두 가지를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육체적인 욕구와 지적인 욕구를 동시에 채우면서 살아가죠. 반면에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정신적인 것에만 빠져서 학문의 늪에 빠지거나 그릇된 종교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육체적인 쾌락에만 완전히 빠져들어서 성적으로 타락하기도 하죠. 상황이 어떻든 정도가 어떻든 간에, 이런 영역들이 바로 욕망이 작동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인도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할 때, 사람은 자신의 세계에서 스스로가 신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 육체가 갈구하는 것, 마음이 원하는 것만을 쫓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면의 욕망에 휘둘려 자기만족을 추구할 뿐 하나님과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삶은 오로지 개인의 욕망에 의해 지배됩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이런 개인적 욕망을 채워주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끔찍한 것들을 세상 곳곳에 심어놓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이에게는 종교가 열정이 되어서 위선적인 자기 의로 빠져들고, 어떤 이에게는 성적 타락이 열정이 됩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리스도가 없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죄 가운데 살며, 세상적이고, 사탄의 영향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신의 욕망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여섯번째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진노’입니다. 이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단어이죠. 3절 하반절을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결국입니다. “불순종의 아들들”로 불린 것처럼, 진노와 너무나 깊은 관련이 되어 있어서 진노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저주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들을 ‘살아있으나 죽은 자'라고 부르는 겁니다. 지금도 죽어있을 뿐더러 미래에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원한 죽음이란 바로 지옥을 의미하는데, 의식이 있는 상태로 고통을 겪으며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된 끔찍한 죽음입니다. 저주와 심판을 받도록 태어난 것이죠. 예수님도 요한복음 3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를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4절부터 시작되는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죠. 바로 여기에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나옵니다. 앞서 ‘살아 있으나 죽은 자’가 있었다면, 이제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입니다. 4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여기서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드시 외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4절부터 5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죠. 여기에 부활절의 놀랍고 위대한 진리, 부활의 핵심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죠. 영적으로 죽어있고, 영원한 죽음에 처한 사람들도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겁니다. 5절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하고, 6절은 “또 함께 일으키사”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앞서 여섯 개의 단어로 죽음을 규정한 것처럼 여섯 개의 단어로 생명을 규정합니다. 첫번째 단어는 긍휼입니다. 4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10절에서 이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즉, 긍휼이란 우리가 응당 받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거두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멈추어 주십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에는 끝이 없습니다. 다시 4절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여기서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루시오스'는 '한없이 풍성하다', '끝없다', '무한하다'라는 뜻입니다. 두번째 단어는 ‘은혜’입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긍휼이 불쌍히 여기고 심판을 보류하는 것이라면, 은혜는 용서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이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고, 은혜는 하나님이 용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긍휼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면하게 하는 것이고,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짓고, 세상적이며, 사탄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육체의 욕심대로 살았고,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찾아오셔서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여기서 세번째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이 아름답게 여기시는 것과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인도 미워하십니다. 날마다 죄인에게 진노하시죠. 하나님 앞에 죄가 있을 수 없으며, 죄악을 극도로 싫어하십니다. 성경에 모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다가오셔서 심판을 보류하시는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라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도대체 왜일까요? 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하고, 마음에 끌리는 것을 사랑하며, 우리와 잘 맞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우리 삶의 기준에 맞는 것을 사랑하죠. 어떤 것들은 우리 마음에 들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죠.

우리는 기본적으로 뭔가 끌리는 게 있어야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과 반대인 죄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에겐 낯설기만 합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큰 사랑”이라고 했는데, 수많은 형용사를 붙일 수 있었겠지만 그저 “큰 사랑”이라고만 표현했습니다.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이해를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은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기 생명을 바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이제 네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단어인 ‘부활’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사랑이 이제 부활로 이어집니다. 5절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이죠. 함께 일으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부활입니다. 어떤 종류의 부활입니까? 우리가 겪었던 죽음이 무엇이었죠?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부활을 주신 겁니다. 영적인 죽음이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다면, 영적인 부활은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아가고, 교제하며, 듣고, 섬기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생명입니다. 곧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 세상에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나은 교육이 필요할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심리 상담이나 감정 조절 능력이 필요할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표면적인 인간관계나 가족 관계의 개선이 필요할까요? 이것 역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인간 영혼에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보시고 큰 사랑으로 긍휼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어떤 생명일까요? 바로 영원한 영적 생명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답이 다음 단어에 있습니다.

다음 단어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명을 주셨습니까? 5절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이제 우리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6절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놀라운 진리를 보면, 죄인들은 본래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었습니다. '진노의 자녀'라 불리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대신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에게 그 진노를 쏟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며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죠. 그런 다음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것이 되었고,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아마도 이를 가장 잘 설명하는 구절은 로마서 6장 3절부터 5절일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것도, 무덤에서 나오신 것도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것이 바로 복음의 놀라운 기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의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가능했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진노를 그리스도에게 쏟으셨고,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가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진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우리도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가 아닙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과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정신이 오늘날 우리 안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식의 영적이고 신비한 것도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는데, 죽으실 때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는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의 의미를 우리에게 적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다섯번째 단어를 지나면 여섯번째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하늘”입니다. 6절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한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말 그대로 높이 들려 올려진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갑자기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영역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걷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며,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영적인 세계가 우리 눈 앞에 펼쳐졌고, 처음으로 순수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육신의 욕망과 세상적인 생각들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의 새로운 목적이 생겼기에,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영향력과 맞서 싸우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힘과 의지가 생겼고, 새로운 삶과 성품을 갖게 되었으며, 새로운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환경 한가운데 앉히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신 후 무덤에서 방황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찬양이 있는 겁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우리의 진정한 삶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전히 육신의 욕망도 있고, 세상도 있고, 사탄도 있고, 영적 전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싸움의 의미를 알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도 알며, 하나님의 뜻과 영광과 목적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새롭고, 선명하며,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바로 이것이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죽었다가 살아난 자의 차이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죽었다가 생명을 얻게 된 존재 사이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어가지만, 영적으로는 살아있으며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은 자에서 산 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8절과 9절에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니기에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울 것도, 자화자찬할 것도 없습니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믿음이 뭐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믿음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얻고, 죄를 용서받으며,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참되다는 확신을 주시는 겁니다. 아시겠나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약속들이 참되다는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으로 인해 하나님께 이 선물을 구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명백한 증거도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없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또한 복음의 진리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적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고,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습니다. 하나님께 이런 확신을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 선물을 달라고 구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미 이런 확신이 있으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주시고, 제 죄를 용서해 주시며, 영원한 천국을 허락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 기억에 이번 화요일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그날 밤 차가운 대서양에서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죠. 절대 침몰하지 않을 거라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우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악단이 연주하는 동안에 말이죠.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까요? 배가 절대 침몰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구명정의 자리가 반밖에 차지 않았는데도 비웃으면서 거절했다고 하죠. 이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타이타닉호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타이타닉호와 같습니다. 여러분,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 빠르게 침몰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가들도, 정치인들도, 교육자들도, 심리학자들도, 종교인들도 이 구멍난 배를 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침몰하고 있는데, 악단은 계속 연주를 하고 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명정이십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는 유일한 구명정이십니다. 이런 구원의 기회가 있는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구명정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으로 품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새 생명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 침몰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구원의 손길을 외면한 채 어리석은 선택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이들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예수님의 부활과 죄 사함, 그리고 영생이 진리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이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여 끔찍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은 새 생명을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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