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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항상 궁금해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이 요청하신 설교 주제이기도 한데요, 바로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입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때는 운동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미식축구, 농구, 야구 등을 하면서 운동선수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리스도인이란 걸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대학생 신분으로 이곳저곳에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말하자면 설교자로서의 첫걸음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전하다 보니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늘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그래서 일찍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갖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 주제가 설교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주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죠. 저는 약 3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매달 30~40회 정도 청년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항상 요청받은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무디 성경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필 존슨이 제게 말해주더군요. 필은 제가 강연하러 갔을 때 그곳의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였던 달린에게 “맥아더라는 사람이 온다는데, 어떤 설교를 할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교할 것이라고 하니까 필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기 오시는 모든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교하시는 걸 모르시나? 예배 시간에 그것만 듣는데, 이미 다 들은 얘기 말고 새로운 내용을 전해주실 수 있을까?” 저는 모든 목사님들이 이 주제로 설교한다는 건 몰랐지만, 그게 중요한 주제라는 건 알고 있었죠. 필은 제 설교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또 다른 설교도 듣기 싫었지만, 달린 옆에 앉고 싶다는 그런 엉뚱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필은 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설교했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계속 저와 동역하고 있으니, 필이 그날 그 메시지를 들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나 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문제는 청년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계속해서 마주하는 질문입니다. "어느 대학을 가야 할까?",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 "어떤 직업이 내 길일까?" 같은 큰 고민부터, 당장 눈앞의 일자리나 기회를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또 뭔가를 사야 할지 팔아야 할지 같은 선택도 있죠. 자녀 교육만 해도 홈스쿨링을 할지, 기독교 학교에 보낼지 고민이 됩니다. 은퇴 시기나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죠. 이런 결정의 순간들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큰 결정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작은 선택들도 있죠.

따라서 이 질문은 정말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많은 혼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주기를 꺼리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그 뜻을 숨기시면서 어떤 이상한 즐거움을 얻으시는 것처럼 여기는 거죠. 그래서 신성한 복권을 산 것처럼 행운의 당첨 번호를 얻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이 복권을 주시는데 그 복권에는 맞는 번호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님이 소수의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만 뜻을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진실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일종의 초월적인 체험으로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입니다. 비 오는 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미끄러져서 배수구에 떨어졌는데, 거기에 마침 인도 지도가 있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여서 인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립니다. 내면의 소리든, 실제로 귀에서 들리는 소리든 무언가 자신에게 명령하는 소리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 주에 재미있는 이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 대법원 판사들 전원에게 <맥아더 주석성경>을 한 권씩 선물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무척 기뻐했는데, 그 이유가 성경을 기증한 사람이 "하나님이 하라고 하셔서" 그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라며 감격했습니다. 물론 대법원에 성경을 기증한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강한 충동이나 느낌이 들었을 텐데, 그걸 하나님의 음성으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더 이상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말씀도 완전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듯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동을 느끼게 하실까요? 우리를 인도하실까요? 네, 분명히 그렇게 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확실하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제 머리에는 하나님의 음성일 때는 빨간 불이 켜지고 그냥 제 생각일 때는 꺼지는 그런 표시등이 없습니다. 그걸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행동할 뿐이고, 나중에 돌아볼 때에야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머릿속에서 들리는 음성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느끼는 충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습니다. 또 어떤 특별한 체험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그때서야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6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한 35-40분 안에 모든 내용을 다뤄야 해서 실제적인 방법 중심으로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알고 계시죠? 9절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할 내용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가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이 기도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신가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단순히 시간과 영원, 창조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교회나 지역 교회, 자주 교제하는 사람들, 가족이나 결혼생활을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매우 개인적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저는 제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세우는 필수적인 첫 마음가짐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와 같은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님은 완벽한 종으로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도, 즉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그리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때도, 완벽한 종으로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십자가의 길을 피하게 하시고, 이 잔을 마시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핵심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뜻과 방식, 계획과 성취에만 집착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훨씬 전부터 “나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던 바울 역시 죽음의 위협 앞에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자세입니다. 에베소서 6장 6절에 이를 아주 잘 요약한 표현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6장 6절 하반절입니다. 이 구절을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접 문맥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6장 6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이 말씀은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에 담긴 태도를 그대로 반영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하거나 겉으로만 행하는 것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최우선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그 뜻이 무엇이든, 어떤 것을 요구하든 간에 말이죠. 자신의 계획, 의지, 욕망, 소망, 꿈, 계획, 야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만일 하나님의 뜻을 향한 진심어린 헌신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서 1장 10절에 나옵니다. 로마서 15장에도 나옵니다. 골로새서 4장 12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또는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삶에는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육신의 정욕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든지, 아니면 우리 육신의 뜻대로 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려면 가장 기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 뜻이 무엇을 요구하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든 말이죠. 이런 자세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와 계획, 야망과 목적을 놓지 않는 한, 그 갈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하나님의 목적에 담긴 뜻입니다. 신학자들은 ‘작정의 의지’라고 부르기도 하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담긴 뜻을 말합니다. 성경에도 여러 곳에 나오는데, 한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 51장 29절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쳐서 그 땅으로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할 계획이 섰음이라.”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잘 표현된 구절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계획을 세우셨고, 구원하실 계획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이죠. 또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전하는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불신앙 가운데 있도록 계획하셨지만, 언젠가는 다시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이 땅에서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으며, 그 후에 성령을 보내시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으로서 언젠가 하늘로 들어올리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환난을 계획하셨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며, 그 후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천년왕국을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모든 약속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 시기가 끝나면 모든 불경건한 자들과 악한 영들이 멸망하고 영원한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광대한 구원의 계획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주님의 모든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고 계시다면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에베소서 1장을 다시 보십시오. 에베소서 1장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9절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전에는 감춰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우리에게 알리셨습니다. 무엇을 알리셨습니까?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것이니.” 지금 우리는 계획이라는 의미의 뜻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에는 감춰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시려는 계획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9절에서 말하는 “경륜” 또는 하나님의 통치 계획은 “때가 찬 경륜”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의도하신 큰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을 세우셨고, 이는 영광스러운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가 마지막 때에 기업을 받게 될 것을 계획하셨고, 이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루십니다. '예정', '계획', '뜻'이라는 세 가지 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영원한 목적으로서의 뜻이 있고 그 결정대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의 두번째 측면은 '원하시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목적이라는 뜻에서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만, 이 두번째 ‘원하시는 뜻’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부분입니다. 성경도 이 부분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누가복음 13장 34절을 보면 예루살렘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제한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왜 죽으려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은 슬퍼서 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는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계속되는 죄도, 영원한 죄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죄란 곧 지옥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천사들과 사람들이 영원히 죄 가운데 머물며 하나님을 영원히 미워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를 허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왜 허용하실까요? 그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첫번째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계획하신 뜻'이 있고, 둘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때로 이 뜻은 하나님의 기쁨에 반하기도 하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것은 세번째 종류인 '명령하시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명령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명령들을 따르길 원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선택할 자유도 주셨죠. 그렇다면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면,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께 택함받은 예정된 자라면,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명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순종만이 있을 테니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 이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겠죠? 하나님이 우리 삶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시다면, 당연히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꽤 합리적인 생각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을 주심으로써 삶의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따라야 할 목적과 방향을 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그 뜻을 알기 원하신다면, 가장 분명한 방법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단 한 권의 책, 바로 성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성경엔 제 얘기를 다룬 장이 없어요. 제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장이 없다고요.” 네, 놀라실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더 이상 앨버트 1서나 엘리자베스 3서 같은 것은 없지만, 성경에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 핵심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나요? 네, 그렇죠. 성경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는데 우리가 그 계시된 뜻을 행하지 않고 있다면, 무슨 자격으로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계시되지 않은 우리를 향한 특별한 뜻을 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개요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맥아더 성경 주석>의 각주 몇 군데에 이 개요를 넣었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 중 첫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잠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문맥을 보면 심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에 대해 말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10절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마지막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아직 심판을 시작하지 않으실까요? 왜 세상이 점점 더 악해지도록 내버려 두시는 걸까요? 왜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우리는 시계와 달력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 모든 고통과 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독하는 일들을 끝내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까? 시간만 헛되이 흘러가고 있지 않나요?” 정말 주님은 더디신 걸까요? 말 그대로 시간을 낭비하고 계신 걸까요? 아니면 게으르신 걸까요?

8절을 보면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우리에게는 매우 긴 시간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순식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표나 시계나 달력에 맞춰 일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직 심판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시고 우주를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은 여러분을 향한 인내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 본문에서는 "우리를 향한" 인내라고도 하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중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택하신 모든 이들이 어디에 이르기까지 기다리고 계십니까?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직 세상을 끝내지 않으시고 심판의 권능으로 오지 않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이며,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지만, 자신의 백성 중에서 "누구든지", "여러분", "우리", 그리고 "모든 이"가 회개하고 구원받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이 구원받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구원받지 못했고,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고백하지 않았으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했다면 제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 디모데전서 2장, 2장 4절을 보겠습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소개하며,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이들, 구원받도록 예정하신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모두가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의 결과도 미워하시죠. 사람들이 영원히 악한 상태로 남아 하나님을 미워하며 지옥에 있기를 원치 않으시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게 되기를 원하시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실 것입니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 구주를 영접한 사람들, 마태복음 12장과 마가복음 3장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아들을 믿음으로써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에서는 아들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님이자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에베소서 5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설명했는데, 이제는 성경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여러분 각자에게 해당되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다시 말해 ‘바보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렇다면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네, 맞습니다. 바보라는 것이죠. 성경이 직접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 솔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리석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8절에 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구절의 맥락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교도 종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은 그리스 신비종교 의식에 익숙했는데, 술에 취한 상태로 신들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60년대에 티모시 리어리가 마약 문화로 사람들을 속인 것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마약을 복용하면 황홀경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면 신들과 교제할 수 있게 해주는 고양된 상태가 되어서 종교적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리스 신비종교에서 직접적으로 차용된 겁니다. 아바쿠스 신전에서 행해지던 일이죠. 저는 다마스쿠스 동쪽에 있는 이 아바쿠스 신전의 폐허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열린 대규모 바카날리아 축제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신전에 들어가서 여사제들과 성적으로 난잡한 행위를 하고 폭식을 했습니다. 신전 중앙에는 거대한 구멍이 있었는데, 거기서 토하고 나가서 다시 먹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신전의 모든 기둥에는 포도주의 신 바쿠스를 기념하는 포도넝쿨과 포도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들과 교감하려고 선택한 방법이 바로 성적 쾌락, 폭식, 그리고 술에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행동들은 너희를 높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끌어내린다. 방탕일 뿐이다.” 방탕이란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서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다면, 진정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면,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싶다면 그런 행동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대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성령 충만함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길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로마서 8장 9절에서 말하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부터 20절은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치고, 고린도전서 12장 12절부터 13절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전부를 성령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플레로오'(plēroō)입니다.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충만해진다는 건 단순히 그릇에 물을 채우는 것처럼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복음서의 여러 예시를 통해서 이 의미를 더 분명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플레로오'(plēroō)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6장 6절에서 이렇게 사용됩니다.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근심이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11절입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누가복음 4장 28절입니다. “다 크게 화가 나서.” 누가복음 5장 26절입니다. “심히 두려워하여.” 이 모든 경우에서 이 단어는 압도적인 감정 상태를 나타내며, 말 그대로 모든 균형과 평정심을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근심으로 가득 찼다고 할 때, 이는 그 근심이 감정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쁨과 더 이상 공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광기로 가득 찼다고 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마치 저울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진 것처럼 말이죠. 분노로 가득 찼다고 하면 자제력을 잃고 폭발했다는 의미이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고 하면 공황상태에 빠져서 감정적 안정성이 완전히 무너진 상태를 말합니다. 살다 보면 행복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보통은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슬픈 일들에만 집중하기 시작하면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하고 좋은 일들을 생각하면서 삶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며 살아갑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상하고 화날 만한 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감사할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의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지진, 화재, 홍수, 총기 사고, 교통사고, 비행기 추락 사고, 거기다 암이나 심장병까지 생각하면 두려워할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만 생각하며 공포에 질린 채 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들 생각도 하고, 손주들 생각도 하고, 꽃향기도 맡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추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우리는 삶의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픔에 잠기거나, 어느 날 집에 들어섰는데 강도가 총구를 겨누고 있어서 더는 공포를 억누를 수 없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 엔진이 모두 멈춰서 "이러다 추락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때까지는 말이죠. 이런 게 바로 '충만함'입니다. 통제력을 잃은 것입니다. 더는 균형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쪽에는 성령님, 저쪽에는 자신을 두고 균형을 맞추려고 합니다. "최대한 균형을 잡아보자" 하면서 말입니다. "지난달에 교회 두어 번 갔습니다. 일요일에는 예배 끝날 때까지 자리도 안 뜨고 있었습니다. 성령님, 이 정도면 기뻐하셔야 합니다. 성경도 두 번이나 읽었고 착한 일도 좀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것도 좀 챙기면 안 될까요? 제가 이만큼 드렸으니, 저에게도 좀 주세요."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내 의지도, 내 목표도, 내 야망도 모두 없어지고 오직 성령님의 뜻만이 남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다스리시는 상태입니다. 즉 저울이 완전히 성령님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입니다.

핵심은 성령님의 완전한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생각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단순한 황홀경이나 초자연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들어와 특정한 일을 하는 초자연적인 구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뜻과 생각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으로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은 없습니다. 황홀경도, 감정적인 것도, 초월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을 통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저자가 누구입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하나님의 영으로 주어졌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한 후에 그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줍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찬양을 부르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계속해서 찬양하게 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감사하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게 됩니다. 아내라면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라면 아내를 사랑하게 됩니다. 자녀들은 6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합니다. 직원이라면 5절에서처럼 고용주에게 순종하고, 9절에서 말하듯 고용주라면 직원들을 돌봅니다. 이처럼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서로를 섬기며,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본분, 자녀와 부모로서의 역할, 나아가 가정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우리의 본분을 다하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 5장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장 16절은 병행구절입니다. 동일한 내용이 나오죠. 서로를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이 말하는 것과 정확하게 동일합니다. 18절은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9절은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20절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21절은 아비로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22절은 직원에 대해 말하고, 4장 1절은 고용주에 대해 말합니다.

모든 것이 같은 범주에 속하고 같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16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결과가 같다면 원인도 같지 않을까요? 에베소서 5장과 골로새서 3장의 결과가 같다면, 원인도 같은 것입니다. 한 곳에서는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고, 다른 곳에서는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합니다. 결론은 이 두 가지가 같다는 겁니다.

성령의 통제를 받는 것, 말 그대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성경에 계시된 성령의 생각으로 통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표현된 성령님의 생각의 지속적인 통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겠습니다. 정말 실질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이제 4장 3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보십시오,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죠? 바로 여기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거룩함이란 순결함, 죄와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3절에서는 "음행을 버리라"고 합니다. 첫번째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적인 죄를 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아시겠죠? 성적인 죄를 멀리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얼마나 멀리해야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거룩하기에 충분할 만큼, 흠이 없을 만큼, 더럽혀지지 않을 만큼, 여러분의 마음에 부적절한 생각이 자리잡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멀리해야 합니다.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멀리 하십시오. 다음 구절은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4절입니다.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첫번째 원칙은 성적인 죄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그런 영향력에 전혀 물들지 않고, 부적절한 생각조차 하지 않을 만큼 멀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즉, 소극적인 측면으로는 성적 죄를 피하고, 적극적인 측면으로는 우리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세번째 원칙은 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변의 세속적인 문화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행하지 마십시오. 이방인의 방식대로 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화를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색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색욕을 원하고 채우고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자신의 색욕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적인 죄를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사용하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넷째입니다. 분수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범죄’라는 말의 뜻입니다.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성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성적 욕망을 채우는 대상으로 이용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덕과 거룩함과 순결함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끔 결혼 상담을 받으러 오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혹시 성관계를 가지시나요?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결혼을 원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이미 분명히 말씀하신 것도 지키지 않으면서, 아직 알려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두 분이 하나님이 이미 성경에 드러내신 뜻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뜻을 보여주실 이유도 없습니다.”

6절에 정말 심각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말하자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신다는 겁니다. 인생에 문제가 생기고 싶다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게 하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런 것들은 우리가 한 번 말하고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 또 말하고, 엄중하게 말하고, 다시 말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은 원수를 갚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은 3절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8절입니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이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주시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진리가 우리를 다스리면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에 다니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진리를 가르치는 이유는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을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성화되기를,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구원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요?', '어떤 직장에 가야 하나요?', '어느 학교에 가야 하나요?' 이런 질문들을 하지만,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기 시작할 때, 그 다음에야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여쭤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시간 관계상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 있죠.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성경에 따르면 정부에는 한 가지 주된 역할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의 정부는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정부가 세워진 이유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처벌하고 선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게 전부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정부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 복종하라고 한 겁니다. 베드로전서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우리가 사회에 복종한다고 해서 그 사회가 거룩한 사회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회도 아니죠. 베드로 시대의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 즉 정부에 복종함으로써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요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비 활동이나 정부와 관련된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함으로써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아닌, 그저 또 하나의 정당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면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삶의 한 부분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정부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가>라는 책을 쓴 이유도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경건한 사회 속에서도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정부가 옳고 그름의 기준을 따를 때는 복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사회에서 올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며, 거룩한 삶을 살고,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바르게 살면서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섯번째입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여러분,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며 거룩하고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과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주변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박해가 찾아옵니다. 어떤 형태로든 고난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4장 12절이 말하듯 불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5장 10절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생에서 잠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빚으시며,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고, 더욱 기도하고 그분을 신뢰하도록 도우시며, 또한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말씀하시는 것은, 여러분,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타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힘들어서 타협합니다. 학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힘들어서 입을 다물고 타협합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힘들어서 타협합니다. 직장에서든 어디서든 그런 이유로 타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받으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옳은 일을 하고, 옳은 것을 믿으며, 옳은 것을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면 받으십시오. 오늘날 이 메시지를 전하기가 어려워진 것은 교회가 고난받기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는 급격한 쇠퇴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습니다. 이런 쇠퇴 과정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학생들에게 교회의 붕괴 과정을 보여주는 세 가지 설교 유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성경적 설교입니다. 즉, 성경적 교리를 성경의 옷을 입혀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진리를 성경으로 설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이것이 바로 성경 강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성경이라는 옷을 입혀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실 때 성경이라는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진리를 구약의 선지서와 율법서, 그리고 성문서에 담아주셨습니다. 또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의 역사 속에도,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에도 담아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 성경이라는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가 성경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대로 성경의 옷을 입은 교리가 설교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풀어서 설명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열심히 찾아다녀야 들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새로운 흐름에 속한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싫어한다. 성경에 공감도 못하고, 연결점도 찾지 못한다. 너무 낡은 사고방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도 복음주의자이고 성경의 진리를 믿지만, 성경이란 껍데기를 벗겨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시카고 불스 이야기로 설교하고,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에 대한 이야기 속에 영적 진리를 녹여 넣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비유나 이야기로 설교하기도 하고, 때로는 해리 포터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설교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문화에서 유행하는 것은 뭐든지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복음주의자라고 하고, 복음주의 진리를 지킨다고 하면서도 성경이란 껍데기를 벗기고 문화란 옷을 입히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현대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진리를 성경이라는 형태로 주신 것은 바로 그렇게 가르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첫 단계로 진리를 성경이라는 옷에서 벗겼고, 다음 타협으로는 진리 자체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게 세 번째 단계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빠르게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바로 타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타협 없이 삶으로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구원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거룩한 삶을 살고, 복종하려는 마음을 갖고 이 사회에서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난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이런 것들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내일까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여섯번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어려운가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고, 거룩하게 되고, 순종하며, 타협하지 않고, 기꺼이 고난을 받으며, 모든 것에 감사하십시오.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지 않는 마음을 품지 말며, 실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유익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입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어떡하죠?"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셨나요? 만약 여러분이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고, 거룩하며, 복종하고, 고난을 받으며, 감사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 아닙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그냥 가서 원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농담하는 거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전혀 농담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무슨 말이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그냥 할 수는 없잖아요.” 아뇨, 할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말씀대로 살고 있다면 누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관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시편 37편 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쁨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있는 빛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고 계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실까요? 왜 주실까요?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가진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사람들이 저에게 "어떻게 그레이스 교회에 오게 되셨나요?"라고 물어봅니다. 제가 원해서 왔습니다. 제 아내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제 아내가 "거기로 가요"라고 말했죠. 하지만 초자연적인 음성은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원해서 왔을 뿐입니다. 저는 한 번도 어떤 음성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제가 원하는 대로 했고, 그것이 경건한 삶의 틀 안에 맞다고 느꼈으며, 하나님이 원하는 마음을 주신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여러분이 원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올바르다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이것이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것이 자유 아닙니까? 하지만 먼저 말씀드린 성경 구절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기 24장 27절의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주께서 인도하시어 주님의 뜻이 있는 완벽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행할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신 것들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음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심어주신 소원을 따라 나아갈 때, 완벽한 이루심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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