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우리는 최근 몇 달간 주일 저녁마다 교리와 관련된 주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주제들입니다. 오늘 저녁부터 몇 주 동안은 성경의 영감성와 권위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펼칩니다. 주일 예배, 주일 아침과 저녁에 있는 성경 공부, 주중 성경 공부, 공동체별 성경 공부와 같이 교회이든, 혹은 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일 때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폅니다. 또 날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성경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유일한 길이다. 말씀은 유일한 길일뿐 아니라 유일한 등불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믿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 원문의 무오성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성경을 오늘날까지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에 최초로 계시하신 말씀이 충실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경이 주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사역은 성경의 언어로 정의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믿는 바이고, 우리가 행동하는 바이며,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성경은 변함없고 확실한 방식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 저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고 3,800번 넘게 말합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320번 인용하고, 최소한 천 번이 넘게 언급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주장합니다. 구약성경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 감동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언급하는 말씀이 몇 군데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부터 21절입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물론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지만, 자신의 뜻이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했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또 다른 구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헬라어로는 ‘데오프뉴스토스’인데, 문자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숨결로 된’ 이런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뜻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사람을 통해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지만,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성경 구절이 하나님의 감동하심, 성경의 영감성에 관한 분명한 본문입니다. 물론 관련된 성경말씀이 더 많이 있지만, 다음에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구원, 미래, 시간, 영원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성경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성경 안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들이 모두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성령님이 요한으로 하여금 아무것도 더하거나 제하여 버리지 말라고 기록하게 하신 겁니다. 성경은 완전하다는 겁니다. 성경은 완성되었다는 겁니다.

유다서에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진리의 총체로 단번에 주어졌기에 뭔가를 더하거나 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주와 하나님에 대한 이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다른 모든 관계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 알아야 할 것들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받고, 진리이신 하나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영광의 소망을 발견하고, 우리 삶을 위한 모든 교훈을 성경 안에서 발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적들이 끊임없이 성경을 공격하는 겁니다. 놀랄 만한 일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서 첫 공격을 시작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입니다. 매우 중요한 장인데요, 첫 다섯 절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창조를 묘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는 행복한 환경에서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를 나누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마지막 부분은 그 점을 잘 요약하고 있죠.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죄가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 변화의 본질에 주목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나머지 부분도 기억하시죠? 사탄을 믿은 하와는 결국 열매를 먹고 타락했습니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전 인류를 죄로 물들이고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죠. 사탄은 창세기 3장에서 처음으로 속임수에 성공합니다. 잠시 1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은 여자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 중에서 딱 하나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장 16절부터 17절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사탄은 여자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니?”

이렇게 묻는 분도 있을 겁니다. “왜 사탄은 아담이 아니라 하와에게 접근했나요?”라고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있습니다. “더 연약한 그릇이요.”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남편의 보호 아래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사탄은 하와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취약한 순간을 발견하고 점차 교묘하게 속이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먼저 다소 악의가 없어 보이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니?”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질문이자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때까지는 질문은 없고 대답만 있었습니다. 수수께끼도 없었습니다. 딜레마도 없었습니다. 사탄이 이 질문을 만들어낸 이유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품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탄의 책략은 하와가, 나아가서는 남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품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정말이야?” 창조 이후 처음으로 가장 치명적인 영적 영향력이 이 세상에 은밀하게 들어왔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치명적인 영향력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반복합니다.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긍정문을 부정문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열매는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생략해 버린 거죠. 말씀을 뒤틀고 왜곡하고 뒤집고는 할 수 있는 것에서 할 수 없는 것으로 강조점을 옮겨버립니다. 사탄은 금지 문제를 수면 위로 떠올리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못하게 하시는 걸까, 왜 제한하시는 걸까?” 사탄은 이 점을 집중 공략했습니다.

사탄의 질문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판단하는 권리가 있다는 것, 왜 하나님이 우리를 제한하시는지 물어볼 권리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부정형, 금지형을 사용했습니다. 제한하고 축소하고 한계를 정하는 것이죠. 이런 표현에 함축된 의미는 ‘하나님이 정말 좋으신 분이라면 왜 그렇게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뭔가가 있어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제한하고, 인간의 쾌락과 즐거움, 만족감, 성취감, 자유를 제한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은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십니다. 우리의 선택지 일부를 빼앗아 가십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잔인하신 분이기 때문일까요? 정말 그래서일까요? 하나님의 성품에 어떤 흠이 있어서 우리를 제한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온전히 신뢰받을 수 없는 분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탄은 하와의 마음에 이런 생각을 불어넣어서 정말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었던 하나뿐이었던 금지사항을,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흠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근거로 삼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마치 하와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죠.

이제 하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면 하와는 다소 확신이 없는 어투로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이 시점에서 하와는 참되신 하나님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참되시고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완전히 선하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와는 아주 확실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만드는 것을 의심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뱀을 의심했어야 합니다.

하와는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옹호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3절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그러다가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대답이 뭔가 시원치 않습니다. 저는 바로 이 시점에서 타락이 발생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열매를 먹기 전인 바로 이 시점에서 말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최고의 기쁨과 최대의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죄가 마음에 들어왔고 실제적인 타락이 일어났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옹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무자비하게 보이는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습니다.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제한사항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으로도 상당히 제한적인데, 더 제한적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제한을 두셨다는 것에 짜증이 난 겁니다. 하와에게 하나님은 이제 받아들일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신뢰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타락의 증거에 불과합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사탄은 하와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알아채고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와는 더이상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 분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보기에 하나님 성품에는 흠이 하나 있는데, 쓸데없이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자유롭고 싶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판단할 권리를 갖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하와는 하나님 말씀의 부정적 측면만을 믿은 나머지 실제보다 하나님을 더 제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은 하와가 타락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제 사탄은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부인하게 만드려고 다가와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거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신 거라고.”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이니 내 말을 잘 들어보라고 합니다.

사탄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진실이 뭔지 알려줄게.” 최고의 거짓말쟁이인 사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렇게 속삭이고 있죠. ‘너는 죽지 않을 거야.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야. 말씀을 그대로 믿어서는 안돼. 하나님은 너의 유익을 최우선으로 여기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하와는 하나님을 흠이 있고 기만적이며 쓸데없이 제한적인 분으로, 하와 자신의 자유를 빼앗아 가고 기쁨을 제한하는 분으로 믿게 된 겁니다.

사탄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넌 죽지 않아. 결코 죽지 않아. 널 제한하는 모든 걸 던져버리고 원하는 대로 해. 한계는 없어. 심판도 없어. 책임져야 할 결과도 없어. 자유를 누리란 말야. 그렇게 널 제한하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야. 친절하지도 않아. 그렇게 제한하는 하나님은 율법의 하나님이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야. 나 사탄이 바로 사랑이지.” 사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에게 자유를 줄게. 날 따르면서 원하는 대로 해.”

이제 하와의 마음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신 걸까? 왜 그런 제한을 두셨을까?” 이에 대한 사탄의 답이 5절에 주어집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은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답니다. 질투하고 시기하며 방어하는 분이시랍니다. 홀로 가장 위대한 존재이고 싶기 때문에 경쟁자가 생길까봐 거짓말을 하셨답니다. 사탄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요? 그건 바로 자기가 하나님의 경쟁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늘에서 쫓겨났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나님처럼 자유를 누려. 하나님은 원하는 대로 하시면서 자유를 누리잖아. 하나님이 제한 없이 행하시니까 너도 제한 없이 행해야 하지 않겠어? 하나님이 너에게 제한을 두는 이유는 경쟁자가 생길까봐 경계하기 때문이야.” 이렇게 거짓의 아비는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온 인류를 타락에 빠뜨렸습니다.

사탄의 말이 거짓인 이유는 하나님께 흠이 있다고, 질투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 과정에서 신적 권리, 하나님으로서의 권리가 심각하게 박탈되고 제한되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셨습니다. 특히 사탄이 시험할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이러한 사탄의 공격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일일이 찾아보지 않아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한 날로부터 요한계시록 끝까지 그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성경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공격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 거짓말쟁이들, 거짓 사도들, 속이는 자들이 끝없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공격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둘러싼 전쟁은 모든 세대와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은 항상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성경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저의 삶은 이러한 전쟁과 관련이 깊습니다. 40년에 가까워지는 제 사역을 10년 단위로 나누어 보면, 초기 몇 년은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10년동안 저는 짐 보이스 박사가 이끄는 성경 무오성 위원회에서 100명의 학자들과 함께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옹호하는 자료들을 열심히 집필하고 제작했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사에서 기념비적인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성경 비평가들의 전면적인 공격에 맞서고 나니 은사주의 운동과 신비주의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이 문제에도 맞서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십년 간의 제 사역은 성경의 유일성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은사주의와 신비주의를 앞세우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와 새로운 지혜의 말씀, 새로운 지식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받았다는 새로운 말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새로운 계시들을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공격에 맞서 성경의 유일성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 후에는 심리학자들과 실용주의자들이 성경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제쳐두고 인간의 지혜로 진리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성경은 단지 그 진리에 영적인 통찰을 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성경의 명확성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으며 정확하게 해석하거나 교의로 삼을 수 없다는 그런 공격입니다. 이처럼 한 공격이 끝나면 또 다른 공격이 이어집니다. 성경은 언제나 전쟁터였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성경을 향한 공격들 중에서 여러분이 알고 계셔야 할 부분을 강의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공격들 중에는 마치 아군이 퍼붓는 폭격과도 같아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공격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공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년 전에 <현대개혁신학>지 10주년 기념호에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현대개혁신학>은 그동안 ‘오직 성경’의 원칙을 고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제목은 “성경의 불충분성”이었습니다. 기사를 기고한 사람은 고든이라는 미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목회자인데요, 이 교단은 미합중국장로교(Presbyterian Church USA)가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부정하자 분리되어서 나온 교단입니다. 고든은 이 기사에서 성경은 대다수 개혁주의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삶에 대한 완벽한 지침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성경이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방법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결혼 문제를 꺼내들고 있습니다.

고든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결혼이 평생의 약속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성경은 광범위한 원칙을 담고 있다. 에베소서 5장이나 잠언 29장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고 성공적인 결혼생활로 이끄는 데는 실패했다.” 이 고든은 10년 전만 하더라도 개혁주의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며 성경의 충분성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고든이 이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을 작성한 신학자들이 언어에 담긴 미묘한 차이를 살려서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성경의 충분성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에 필요한 모든 일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은 성경 안에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또는 건전하고 필연적인 결론을 통하여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입니다. 수 세기 동안 개혁신학의 표준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고든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학자들이 ‘언약’을 명시했다면 그 전체 문제가 좀 더 잘 표현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다양한 언약 백성과 맺으신 다양한 언약에 대한 지침서라고 말이다.” 달리 말하자면 더 모호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경이 구체적인 상황에 충분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되고, 더 크고 넓은 범주에서만 이야기해야 한답니다. 고든은 특히 “믿음과 삶”이라는 표현을 오직 종교적 의미로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의 삶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제외한 삶,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삶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직 성경’과 ‘성경의 충분성’을 지지했던 사람이 무엇 때문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을까? 무엇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믿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완전무결한 선언에서 돌아선 것일까? 고든 자신의 말에 의하면,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은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에 대한 설문조사 때문이었습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이 불신자들의 이혼율과 비슷하거나 더 높았습니다. 그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는 성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꾼 겁니다.

고든이 쓴 글을 제가 읽어드리죠. “성경의 충분성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에 영향을 미친 실제적인 문제는 복음주의자들의 이혼율이 일반인의 이혼율과 대체적으로 비슷하다는 조사 결과였다.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지침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한 이혼율을 보이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 답은 이와 같을 것이다. 성경은 결혼이 평생의 약속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약속을 어떻게 끝까지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성경의 충분성을 믿는 것이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의 성공적인 결혼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계속 읽습니다. “우리의 불신자 친구들이 우리만큼이나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는 이유는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그 어떤 오해에도 현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든이 자신의 신학을 내던지게 만든 이 설문조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1999년 12월에 실린 “기독교인의 이혼 가능성이 비기독교인보다 더 높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있던 설문조사였습니다. 저도 그 조사를 봤습니다.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의 이혼율은 27%였고 비기독교인은 24%였습니다.

물론 이 통계 자체로는 아무것도 입증된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이혼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또한 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이혼율은 평균보다 훨씬 낮은 21%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듭난 기독교인의 이혼율이 27%인 반면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는 21%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충분히 공정한 기준이었을까? 도대체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뭘까? 그리고 설문조사를 더 깊이 살펴볼수록, 거듭난 것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지조차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아마도 이 두 가지 질문을 기준으로 거듭난 기독교인으로 간주했을 겁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으며 이것이 아직도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까?’라고 묻는 질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으며 이것이 아직도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나요?’ 천주교 신자들도, 몰몬교 신자들도,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도 그렇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 신자들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식 질문도 있었는데요, 7개의 보기 중에 정답 하나를 고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정답으로 제시된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 몰몬교도들, 온갖 종류의 이단들도 이렇게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질, 하나님의 본질, 속죄의 본질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첫 질문에 예라고 답하고 이어지는 객관식 문항에서 정답을 선택했다면 거듭난 것으로 분류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 상투적 표현이 된 문화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두 가지 질문에는 어떤 개인이 실제로 거듭났는지를 보장해 줄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이 소위 거듭난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45%는 사탄이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악의 상징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34%는 누군가가 충분히 선하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이랍니다. 그들의 기준에서는 말이죠. 28%가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처럼 죄를 지었다고 믿는답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의 15%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고 주장합니다. 26%는 모든 종류의 기독교가 같은 것을 가르치기에 어떤 종파를 따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듭난 기독교인이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보다 더 많이 이혼한다는 통계를 봤다고 해 봅시다.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이 통계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답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자칭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날 미국의 경우 이러한 자칭 기독교인이 약 80%가 넘는다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충분성에 대한 확신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증명된 참된 교리를 말도 안되는 이유로 포기하는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현재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설문조사 결과를 무시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이제부터는 성경에 대한 공격을 분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이런 공격을 하는 걸까요? 첫째는 비평가들입니다. 학자들 중에 성경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부 독일 자유주의 진영에서 나왔죠. 그라프-벨하우젠의 고등비평이론이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회복 운동과 연결되면서 주요 교단들과 대학교, 신학교를 휩쓸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사실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영감성은 계속해서 공격받고 있습니다. 공격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참되고 무오하며,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쓰여진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끝없이 부인합니다.

이러한 공격은 오늘날까지 기이하고 아주 어리석은 방법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성경에 대해 논의하는 방송을 볼 때마다 항상 듣는 소리죠. 최근에 한 역사 채널에서 연락을 해왔습니다. 성경 토론 프로그램에 전문가이자 기고자로 고정 출연을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죠. 저는 바로 거절했습니다. 성경을 부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난도질을 당하고 조각난 채로 편집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성경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단체가 있습니다. ‘예수 세미나’라는 단체입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들은 한 신문의 종교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보통은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단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죠. 이 예수 세미나 단체에는 죽은 장님에 불과한 사람들이 2백명이 넘습니다. 이 2백여 명의 거짓 학자들은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자처합니다. 바보들이죠. 자신들이 예수님과 성경에 대해 학문적 권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다수결에 따라 성경에 대한 입장을 바꿉니다.

어떻게 하는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세미나 참여자들은 성경의 한 부분을 정해서 투표를 하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빨간 구슬을 넣습니다. 달리 말하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분홍 구슬은 아마도 예수님이 비슷한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회색 구슬은 제자들이나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정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검정 구슬은 가장 강력한 반대표인데요, 성경이 말하는 화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전적으로 조작되었거나 진술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700개의 말씀 중에서 31개만이 진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31개 중에서도 16개는 병행 구절과 중복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절반 이상이 무시무시한 검정 구슬을 받은 겁니다. 전체적으로 성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되는 80%를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퇴출된 구절 중에는 마태복음 5장 11절도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또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처형을 예언하신 마가복음 10장 32절부터 34절도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종말론적 내용, 즉 미래에 관한 내용들은 전부 거부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한 절만 제외하고 모두 거부했습니다. 4장 44절에만 분홍 구슬을 넣었죠.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세미나의 설립자인 로버트 펑크는 대부분의 주류 학자들이 요한복음을 버리는 일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펑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대화나 토론에서 주로 속담이나 격언, 비유, 풍자 등을 사용해서 말씀하셨고 반박하실 때도 재치있는 말로 응수하셨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긴 독백 형태로 말씀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아니, 도대체 펑크는 그렇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처럼 자유주의 신학의 난파선에서 떨어져 나온 부패한 잔해들이 계속해서 해안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방금 인용한 내용들은 제가 얼마 전에 쓴 글에서 가져온 것인데, 자기 글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너무 잘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성경에 자기가 사인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일이죠. 예수 세미나와 자유주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6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급진적인 시위를 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제 대학의 중간 관리직을 차지하고 있고 고위직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이념적 신조는 대부분의 학계에서 정통성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학자들은 이들의 행보를 따르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대학의 종교학과나 철학과, 사회학과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나름의 신성한 교의가 있습니다. 여성 평등, 동성애를 대안적인 생활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 환경 운동, 동물 복지, 인종 할당제, 강경한 전쟁 반대 교리 같은 것들이죠. 이러한 교의들 중 어느 하나라도 반대하는 사람은 검열 대상이 되는데, 여기에는 예수님도 포함됩니다. 세미나 참여자들의 결정을 살펴보면 이들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불의한 청지기 비유, 겨자씨 비유, 부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구절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하는 구절에는 빨간 구슬을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 낙담한 자, 비천한 자를 돕는 내용은 언제든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회개를 요구하거나, 예수님의 신성을 확인하거나, 제자들에게 어려운 요구를 하거나, 구원과 거듭남의 필요성을 말하는 구절에는 검정 구슬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이들은 말씀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으면서 계속해서 이런 짓을 할 겁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성경을 공격하는 한 가지 예시일 뿐입니다. 사례가 많습니다만 조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신약성경의 칭의 교리를 공격합니다. ‘열린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를 공격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린 유신론은 자유주의 신학의 새로운 의제입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완전하게 아시고 통제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죠.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겁니다. 전혀 모른답니다. 우리와 똑같이 말이죠. 하나님은 그저 일어나고 있는 일에 반응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답니다.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도 알지 못한답니다.

이 열린 유신론자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지 못한 채로 베테랑 체스 선수처럼 우리 모두의 움직임에 대응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답니다. 이 관점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열린 유신론은 복음주의 진영, 소위 “복음주의 신학회”라고 불리는 곳에까지 침투했습니다. 지금도 이 ‘복음주의 신학회’는 열린 유신론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배제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열린 유신론이 하나님의 본성을, 하나님의 신성을 공격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주장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안다고 말하는 그런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참되게 말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죠.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본 것과 정확히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부인하는 이런 비평가들의 공격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고 성경의 권위를 수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이단에게서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지학, 유니테리언교에서부터 기이하고 이상한 소규모 이단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 말씀에 다른 사람이나 천사의 글을 더하려고 합니다. 몰몬교는 조셉 스미스의 글을, 크리스천 사이언스는 메리 베이커 에디의 글을 더합니다. 이 메리 베이커 에디 패터슨 글로버 프라이에게는 남편 문제가 있었죠. 여호와의 증인은 조셉 러더포드의 글을, 신지학은 애니 베전트의 글을 더합니다. 이처럼 이단들은 자신들의 단체에 기여한 사람들의 글을 성경에 더하려고 합니다. 이런 글들로 성경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격하는 겁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죠.

그런데 은사주의자들의 공격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듣기 힘든 말일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말씀드립니다. 성경이 계시의 끝이 아니라고 하거나,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공격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뭔가를 더 말씀하고 계시고, 새로운 계시와 새로운 환상을 주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고, 신비롭고 극도로 주관적이며 직관적이고 비밀스러운 해석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모두 성경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는 더 이상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정말 터무니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면, 성경을 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읽으십시오.

이제부터 말씀드릴 네 번째 공격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드리기 위한 것인데, 바로 문화의 공격입니다. 비평가의 공격, 이단의 공격, 은사주의자의 공격, 그리고 이제 문화의 공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가 교회를 제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화가 성경이 말할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TNIV 성경의 출간입니다. 존더반 출판사는 TNIV라고 불리는 성경을 출간했습니다. TNIV는 페미니스트 운동을 존중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꾸고 변형시켜서 현대 페미니즘 평등주의 운동에 부응하도록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이 적용된 다른 성경 번역본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문화적 인식을 수용한다는 표시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거나, 변경하거나, 수정하거나,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문화적 기대에 부응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번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는 책임도 따릅니다. 구약성경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어를, 일부 아람어를, 신약성경의 경우에는 헬라어를 번역하는 겁니다. 번역자는 성경 원문과 가장 가까운 의미를 찾아서 번역해야 합니다. 문화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이유로 하나님 말씀을 바꾸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진실하고 순수한 번역이 아닙니다. 특히 죄악된 문화적 태도와 기대, 요구에 맞춰서 성경을 각색하면 절대 안 됩니다. 가장 최악의 경우라고 할 수 있죠.

따라서 우리는 문화가 성경 번역과 해석에 영향을 주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이머징 교회 관계자가 쓴 책을 읽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당신은 동성애자를 교회로 데려갑니까? 당신의 교회는 동성애자를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물론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비만인 사람도 있고,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동성애가 비만이나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과 동일한 수준이라는 겁니다. 문화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용어로 교회와 성경을 재정의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왜곡하고 전복하고 바꾸려는 시도는 항상 있었습니다. 문화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제가 신학생들과 같이 연구했던 내용입니다. 작년에는 학부생에게도 이야기했죠. 이머징 교회 운동이 만들어낸 새로운 유행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죠. 바로 성경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쩌면 손쉬운 타협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다. 성경을 사랑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성경은 명확하지 않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을 교의로 삼을 수 없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성경은 정말로 오래된 책이다. 온갖 종류의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러니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 아무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손쉬운 문화적 타협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참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성경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소 잘 알려진 복음주의자 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확신은 종종 우상 숭배와도 같다. 나는 확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학에 어떤 토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있지 않다. 신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겸손한 인간의 시도여야 하며, 결코 본문에 대한 합리적인 접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 본문에서 진리를 얻을 수 없답니다. 우리가 훨씬 겸손해져야 한답니다. 신학은 겸손한 인간의 시도랍니다. 성경 안에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발견할 수 없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성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브라이언 맥라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의 명확성은 때때로 과대평가된다.” 레슬리 뉴비긴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은 확실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영국의 톰 라이트같은 저술가들이 성경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쓰면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잘못 이해해 왔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모든 사람이 잘못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당신은 옳다고 할 수 있는가?” 좋은 질문 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고 방식을 계속 자극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성경이 스스로 명확성을 주장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과 2장에 의하면 죄인은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에 대한 계시에 책임을 져야 하고 핑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죄인이 만물과 양심에 명백히 나타난 계시를 거부한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고 비난받을 만하며 유죄 선언을 받게 된다면, 그리고 변명의 여지도 없다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에 기록하신 계시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죄인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경은 명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필연적으로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저자이자 창조자, 구원자,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구원을 이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사람들은 구원을 알 수 없고 다가올 심판도 알 수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도 알 수 없습니다. 죄와 의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고, 알아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이성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 뜻을 드러냅니다. 비밀스럽게 숨겨진 신비로운 암시적 의미는 없습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빛으로 불립니다. 거부하는 자들에게도 동일한 빛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명확한 이유는 그 자체로 드러나며 합리적 지성으로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조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은혜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성경의 명확성에 대해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구약성경은 다소 모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명확합니다. 하나님이 구약에 계시된 것을 사람들에게 책임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가르치실 때, 대화하실 때, 토론하고 논쟁하실 때 유대인에게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성경은 어렵고 난해하면서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1세기 사람들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다윗 이후로는 천 년, 모세 이후로는 천오백년, 아브라함 이후로는 2천 년이 지난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들이 구약성경을 읽고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천 년, 2천 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면,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로 2천 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겁니다. “너희들의 문제를 내가 아노라.”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새인, 서기관에게 말씀하시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든 항상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전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에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너희의 문제는 성경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나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심지어 이방인들도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이 주어진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본보기가 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구약을,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어야 할 것들이었죠.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어떤가요? 서신서를 두고 “신약성경의 매우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신약성경의 서신서는 신학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나 학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회중을 위해 기록된 겁니다. 즉 고린도에 있는 회중을 위해, 갈라디아에 있는 회중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겁니다. 항상 교회 전체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교회의 최소공약수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신자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바울은 모든 서신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유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기록한 바를 읽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4장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편지를 너희가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편지를 주변 교회에 전해서 모든 교회가 같이 읽으라고 합니다. 따라서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이해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구약성경에 기초하여 신약성경을 이해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서신서들은 구약 배경이 없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다수인 교회를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방 종교에서 개종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도 성경을 이해하고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모든 측면에서 가차없이 공격을 받습니다. 성경에 뭔가를 더하려는 비평가나 이단, 은사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때로는 문화의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에 대한 공격 중에서 변덕스럽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것도 있습니다. 바이블 코드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한번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바이블 코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죠. “바이블 코드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을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 교사들을 정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는 명확합니다. 컴퓨터로 성경을 분석해서 문자 배열을 찾아내고, 이쪽 저쪽 대각선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의미하신 바가 간디가 1984년 10월에 죽으리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는 거리가 멉니다. 사람들은 모비딕에서도 똑같은 걸 찾아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육신의 지혜로 성경을 공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 이건 합리적이지 않아. 선택 교리는 별로야. 영원한 형벌 교리도 맘에 들지 않아. 나는 하나님을 이길 거야.” 이것이 육신의 지혜를 통한 공격입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성경이 스스로 수호하게 하는 겁니다. 다음 주 주일 저녁부터 실제로 이렇게 해 볼 겁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공격들을 살펴보고. 성경이 어떻게 스스로 권위를 높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말씀 가운데서 지냈고 말씀은 언제나 스스로를 입증했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강력하고 순전하고 참되며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말씀은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파괴적이지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건설적입니다.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모든 소망을 말씀 안에 두며, 모든 믿음을 말씀의 진리 가운데 세웁니다. 우리가 단지 말씀을 수호하는 자가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진리를 선포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 말씀이라는 보물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말씀에 담긴 풍성한 보물은 말씀을 펼쳐 기도하며 세심하게 연구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주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공격하고 있는 이 때에, 말씀을 높이는 위대한 운동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시편 138편 2절에서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에 감사하는 것은,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