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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쯤 전에 저는 짧은 책 한 권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사실에 집중하기>였습니다.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오래가지 못했거든요. 다행히 몇 년 후에 <나는 왜 성경을 믿는가>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1983년의 일이었죠. 성경을 믿는 이유에 대해 쓰려고 준비하면서, 처음에도 같은 주제였습니다만, 왜 성경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답해야 했습니다. 저는 왜 성경의 진리를 믿게 되었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해서일까요? 성경에 대한 더 강력한 증거를 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증거들은 얼마든지 있지만 말이죠. 저는 왜 성경을 이토록 신뢰하게 되었을까요?

제 대학시절을 떠올려 보면, 그때는 운동 말고 다른 것에는 별 흥미가 없었습니다. 미식축구 경기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죠. 하지만 그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신학교에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로 수준의 경력과 기회를 포기하고 신학교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물론 동료 선수들과 감독님 중에서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고 싶거나 가르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파고들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왜 제가 성경의 진리를 이토록 신뢰하게 되었을까요? 변증학이나 성경 변증을 공부해서 그런 걸까요? 아닙니다. 그런 책들을 많이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헌신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서재에 앉아서 제가 왜 성경을 신뢰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관련된 말씀을 찾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이 드러내시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읽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아무리 당연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시지 않고 성령님이 계시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어서 요한복음 6장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많은 제자들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신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 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참되다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언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장에서 예수님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자 로마서 8장이 떠올랐습니다. 5절에 매우 명확한 표현이 나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들은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여기서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있고, 영적 생명에서 떨어져 있으며, 영적으로 죽어 있고, 눈이 멀어 있고, 파산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자들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약 여러분이 육신에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그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다면 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만약 우리가 육신에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상태에 있더라도 기쁘시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가장 나쁜 상태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떻게 성경을 신뢰하게 된 걸까요?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에베소서 4장이 떠올랐는데, 로마서 8장이 말하는 바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드리는 이유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불신의 상태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적인 통찰력과 이해력으로 성경을 신뢰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이토록 신뢰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그러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제게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와 진실성을 받아들일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1983년에 <나는 왜 성경을 믿는가>를 다시 펴내면서 이렇게 쓴 겁니다. “불신자들이 합당한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을 알 수도 없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는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처럼, 오직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셔야만, 마음을 여시고 눈의 비늘을 벗겨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게 하셔야만 사람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신뢰하게 된다.”

제가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아는 이유는 성령님이 확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5년 전에 그렇게 썼죠. 또 다음 문단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가 쓴 글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알고 계시죠?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고, 과학적으로 정확하며, 수많은 목격자들 앞에서 기적이 일어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해 왔다. 이러한 모든 증거들로 인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언이 성취되었고, 기적이 일어났으며, 과학적으로 정확하며, 믿는 자들의 삶이 변화된다고 말이다.” 성경에 대한 확신은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셨다고 믿습니다.

저는 성경이 권위 있고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기원, 구원,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이고 영적인 기준, 궁극적인 운명에 관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또한 성경 원본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모든 세부 사항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령님이 나를 인도하셔서 이런 확신을 주셨다.”

이것은 제게 정말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는 존 칼빈이라는 유명한 신학자의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이 같은 주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해하던 차에 매우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리를 오직 성경의 기록 속에 보존하사 영구히 기억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신자들이 성경의 완전한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은 성경을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여길 때,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직접 들리는 것처럼 여길 때이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한 말입니다.

이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이 저자이심을 확실히 납득하기 전까지 이 교리에 대한 믿음을 결코 확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받은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판단이나 다른 이들의 판단에 근거하여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사람들의 사역을 통해 전해졌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결코 쇠하지 않는 진리를 붙들고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이다.”

칼빈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죠? 윌리엄 니젤은 칼빈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여겼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생명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아무 효과가 없으며, 또한 말씀이 그리스도와 분리되면 그 즉시 말씀은 영혼 없이 죽어 있는 문자 덩어리에 불과하게 된다.” 칼빈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믿음과 확신을 주실 때에만 성경을 믿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는 합리적인 논증의 결과가 아닙니다. 인간 지성과 이성, 감정이 작동한 결과도 아닙니다. 다름 아닌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칼빈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에 대해서 적절히 증언하실 수 있으므로, 그 말씀을 사람들이 마음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확증되어야만 한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꿰뚫고 들어오셔야, 그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대로 신실하게 선포하였음을 납득할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서 확고한 진리는 성령께서 내적으로 가르침을 주신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성경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성령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확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인 거듭남의 한 요소입니다.

전통적인 접근법에서는 온갖 증거들을 수집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입증해 보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타락한 지성을 가진 이들, 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무지한 정신, 어둠에 잠식된 생각, 굳은 마음, 냉담하고 탐욕스런 영혼을 가진 이들이 그 증거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물론 우리는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증거, 과학적 증거,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 변화된 삶의 증거들을 얼마든지 많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성경에 대한 합리적이고 참된 증거이지만, 눈먼 자들의 비늘을 벗겨낼 수는 없습니다. 죽은 영혼에 생명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겠습니다. 사실 이번 시간에 모두 다루기에는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두 번에 걸쳐 다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절만 다루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두 장이나 다루는 건 말할 것도 없겠죠.

자, 어쨌거나 1장 18절부터 시작해서 2장까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논리의 흐름과 요점에 집중하면서 가볍게 살펴보겠습니다. 1장 18절에서 시작해서 2장 끝까지 이어지는 이 부분의 주제는 신성한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또는 “지혜”라는 단어가 20번 정도 나오는데, “어리석음”이라는 단어와 대조되고 있습니다. 약 여섯 번 정도 나오죠.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 어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거부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합니다. 왜 어떤 이는 성경과 복음, 십자가를 거부하고 어떤 이는 받아들이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증거”라는 표현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든, 십자가의 도를 말하든, 하나님의 증거를 말하든, 결국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제입니다.

본문을 나누는 쉬운 방법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것인데, 다소 겹치고 반복되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분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이고, 후반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받아들이는 이유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받아들이는 이유입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에는 증거에 대한 언급도, 인간의 이성에 대한 언급도, 사람들의 의지를 조종하는 방법이나 감정을 움직이는 방법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증거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성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감정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비그리스도인의 상태와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전반부에 제시된 다섯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로 성경이 비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비합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증거, 또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즉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비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것이요.”

이러한 개념은 21절에서 반복됩니다. 약간 비꼬는 느낌이 들기도 하죠.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3절입니다.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리고 25절에 비꼬는 표현이 또 나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 ‘미련함, 어리석음’은 헬라어로 바보 천치같고, 멍청하고, 무의미하고, 인간의 이성에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무시합니다. 더 깊이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더 미련해 보였습니다. 이 모두는 솔직히 말해서 말도 안되는 비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비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는 비합리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에 있었던 세례식에서 세례받은 분들이 이런 간증을 하셨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몰랐다.”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교회에서 자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하나로 엮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본문 첫 부분이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개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그저 미련한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에 두셨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내가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리라. 아무리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지혜로는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9절에서 바울은 칠십인역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을 한 때는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고 약탈하겠다고 위협할 때였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구원하실 것이다. 지도자들이나 지혜 있는 자들의 묘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유다를 향한 교활하고 은밀한 음모는 인간의 재주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지혜로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총명한 자의 총명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의지하던 지혜 있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기관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의 변론가는 어디 있느냐? 학자, 엘리트, 지식인, 철학자는 다 어디에 있느냐?” 20절은 이사야 19장 12절과 33장 18절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사야 19장에서 자칭 애굽의 지혜자들이 우둔하게 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또한 앗수르의 서기관들은 돌아갈 때 얻을 전리품을 기록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두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변론가, 토론가, 수제테테스, 그러니까 철학적 변론가는 다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줄세워 보라는 겁니다. 이들이 모든 지성과 지혜와 학식을 총동원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도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도움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거나, 십자가에 관한 메시지나 말씀, 하나님의 증거에 관한 말씀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는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번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은 믿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터무니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잠시만요, 예수님이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았나요?”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더 큰 표적을 원했습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왕국을 세우고 다스리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는 그런 표적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다가올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위선적인 종교를 비난하셨고, 로마에 대항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이지 않으셨으며, 기대했던 메시아의 계획을 성취하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찾던 표적을 보여주실 거라는 마지막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뇨? 로마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한 메시아라뇨?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헬라인들은 복합적이고 심오하며 정교한 철학을 추구하면서 화려한 언어와 난해한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단순해 보인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 터무니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유적지의 돌벽에 남자가 당나귀에게 절하는 모습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겁니다. 고대 사람들이 기독교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죠. 그림 밑에는 “알렉사메노스가 자기 신을 숭배하고 있음”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나귀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는 겁니다. 누가 십자가에 매달린 당나귀를 숭배하겠습니까?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네번째입니다. 믿는 자들이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특별해 보이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26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귀한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여기서의 결론은 우리가 그다지 인상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는 자들의 대다수는 언제나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그 중에서도 엘리트 지식인들이 보기에 우리는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될 뿐이죠.

우리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도 아니고 가장 문벌이 좋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27절에 잘 나와 있죠.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점점 더 낮아지고 낮아집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문벌 좋은 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운 자, 지적 엘리트, 강한 자, 위대한 자, 영향력 있는 자, 세상을 움직이는 자, 세상을 흔드는 자, 권력 있는 자, 문벌 좋은 자를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벌 좋은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좋은 가문에 태어난 고귀한 출신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들 대신에 하나님은 어리석고 약하고 천한 것들, 아게네스, 즉 출신이 불분명한 자들, 무명의 자들, 아무개들, 무의미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이어서 더 심한 표현이 나옵니다. “없는 것들”입니다. ‘에이미’의 현재분사형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없는 것들”은 바울이 28절에서 사용한 마지막 단어로서, 헬라어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단어죠.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반감이 더 커집니다.

이제 다섯번째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보잘것없어 보일 뿐더러,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들도 세상 유행에 뒤처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2장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이 난해하고 화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미로 같은 가르침, 지성을 자극하는 온갖 종류의 복잡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 다시 한 번 혐오스럽고 믿을 수 없으며 단순해 보이는 메시지가 나옵니다.

게다가 바울의 외모와 성격 또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 스스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지금까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살펴봤습니다. 먼저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것,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자연적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오직 육의 일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일을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다 말씀드린 나머지 이유들을 더하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처한 딜레마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불쾌하고 비합리적이며, 믿기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보잘것없어 보이고,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들도 약해 보이고 인상적이지 않고, 두려워하고 떨기까지 합니다. 여기에 타락한 상태, 즉 본성적 어둠 가운데 있고 사탄이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불신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진리를 믿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정말로 진리를 말하고 있는지 분별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참 예수를 찾아서”, “진리를 찾아서” 같은 프로그램들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타락한 지성은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믿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왜 성경을 믿을까요? 2장 6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후반부를 살펴봅니다. “그러나,”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동그라미나 밑줄을 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서 온전한 자들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입니다. 온전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는 믿는 자들을 묘사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지혜를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나아왔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한 것처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더 똑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더 많은 증거를 접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충만해졌다는 것, 온전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거듭남과 회심과 변화를 일으켜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신뢰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이 지혜는 제가 방금 읽어드린 것처럼 이 세상의 최고의 지성이나 위대한 통치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지혜입니다. 7절입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지혜를 알게 되었을까요? 계속 읽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구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저는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게 된 걸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기 때문인가요? 저의 영광을 위해 이해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 목사님은 예정론을 믿으시는군요?”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셨기 때문이고, 거듭남과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복음, 그리고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셨다고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성경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믿게 되었다는 의미인가요? 절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은 합리적입니다. 모든 예언은 성취되었고, 기적들은 실제로 증명되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고 정확합니다. 성경의 역사와 고고학은 세세한 부분까지도 검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제 이성이 설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대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동일한 관점을 요한일서 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9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경험하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그래, 그 사람이 교회에 오곤 했지. 성가대에서 찬양도 하고 여기저기서 봉사도 하고 교회에 자주 왔지. 근데 요즘엔 안 보이네. 무슨 일이 생겼나?” 이에 대한 답을 19절이 알려줍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이 나갔다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20절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 좋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무엇을 안다는 건가요? 21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이것은 어떤 거짓도 여러분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거짓도 여러분을 배교로 이끌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왜 여러분은 진리를 알까요?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받았다는 뜻일까요?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를 받았다는 걸까요? 바로 성령님입니다.

제가 성경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저를 구원해 주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말씀을 신뢰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리에 머뭅니다. 진리를 믿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계속 진리를 붙들 것입니다. 제가 계속 진리에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진리가 무엇인지 보여주셔서 거짓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안전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항상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진리에 고정시키는 닻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아무도 우리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이것은 정말 심오한 주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되고 말씀에 머물게 됩니다. 말씀에 거하게 됩니다. 잠시 동안 교회에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은 결코 우리에게 속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제가 성경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복음에 대한 믿음, 그리고 말씀에 대한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칭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저는 성화되기 위해 성경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제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계속해서 저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오류와 거짓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성경을 믿는 이유입니다.

이제 저는 고린도전서 2장 6절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지혜가 이 세상의 지혜, 통치자들의 지혜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 모든 것은 ‘카탈게오’입니다. 그 모든 것은 무력하고 무효한 것으로서 우리를 이끌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8절에 나오는 지혜를 믿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또한 그들이 알았더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영광의 주를 계속 거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이사야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으며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경험주의나 합리주의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완고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시죠. 요한복음 8장 42절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사람들은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47절에서, 아니 46절부터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꽤 분명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누가 성경을 믿나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돌아가서 10절에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정말 중요한 요점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것,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지혜, 십자가에 대한 모든 말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한 모든 말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진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알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기 때문이고,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계시하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눈의 비늘을 벗기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우시고, 신비를 펼치시고, 숨겨진 진리를 드러내시기 위해 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1장 24절부터 다시 읽겠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신약의 서신서에서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구원을 향한 유효한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26절에서 바울은 이 점을 다시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의 부르심, 생명을 주는 부르심, 곧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왜 우리일까요? 2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사, 하나님께서… 택하사.” 2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사.” 30절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인가요? 증거를 살펴봤기 때문인가요? 지성으로 진리에 도달했기 때문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셨고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다시 30절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의로움과 거룩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 성령,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왜 이런 방식을 사용하셨을까요? 29절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뭘 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1절입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누군가가 도대체 그 확신이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예수님 안에 있게 되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게 되고 진리를 믿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와 같으며, 통나무나 돌과 같고, 눈도 입도 감각도 마음도 사용할 수 없는 생명 없는 조각상과 같다. 성령에 의해 눈뜨고 회심하고 거듭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제가 읽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과 같은 성경을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을 믿고, 그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 속에서 살아가며, 그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을 미리 정하시고, 택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사랑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2장 16절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알기를 바라시는 모든 것을 성경에 담아 두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지, 무엇을 사랑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무엇을 명하시고 무엇을 금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토록 심오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은혜의 경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는 전도의 능력이 기발한 방법이나 음악의 사용, 또는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오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음을 압니다. 우리를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성경, 십자가 말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제시하고 선포하고 변호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게 되고 거룩해질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자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사용할 것입니다. 비기독교인이 성경의 합리성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통한 은혜의 기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깨우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 연구를 통해 성경이 합리적이고, 도달 가능하며,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으며, 모든 시험을 견딘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과 이해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편 18절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를 주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셔서 죄인들을 깨우시고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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