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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드디어 성경의 영감성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신학의 한 분과인 ‘성경론’을 살펴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연구하는 학문이죠. 몇 년 전에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찬양을 여러 곡 쓴 굉장히 유명한 기독교 작곡가를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찬양의 작곡 과정을 물었는데, 작곡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찬양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나왔다. 가사에 담긴 내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은 찬양을 쓰도록 영감을 주신 성령님을 방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의도가 뭔지 이해는 합니다만, 실은 경악할 만한 주장입니다. 가사에 담긴 내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것도 찬양을 쓰도록 영감을 주신 성령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은, ‘영감’을 받았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도 영감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쓰지 않습니까? 특히 음악과 관련해서 말이죠. “나는 그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영감을 주는 연주회였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듣는 경험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고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뜻이죠. “곡을 쓰면서 영감을 얻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작곡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찬양을 썼다고 하면서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 찬양을 성경과 동일선상에 올리는 겁니다. 그 찬양을 지은 작곡가가 받은 영감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받은 영감이 과연 동일한 걸까요? 또는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받은 영감과 동일한 걸까요? 이사야가 이사야서를 기록하면서 받은 영감과 동일한 걸까요? 성경의 영감성이란 무슨 뜻일까요? 성경이 우리 안에 믿음과 종교적 감정, 이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까요? 오늘날의 작곡가들도 성경 저자들이 영감을 받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영감을 받을까요? 오늘날의 책도 영감을 받아서 쓰여진 걸까요? 설교는 어떤가요? 설교도 영감을 받아서 쓰여진 걸까요?

‘영감’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숨을 들이쉬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 말에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영어 단어 ‘inspire’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헬라어로는 ‘데오프뉴스토스’인데, ‘하나님의 숨결로 된’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에서 영어 ‘뉴매틱’(pneumatic), 공기라는 뜻이죠, ‘뉴모니아’(pneumonia), 즉 폐렴 등의 호흡과 관련된 단어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감동으로 된’, 영어로는 ‘영감을 받아’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원래 뜻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숨을 내쉬는 것, 내뱉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내뱉으신 것이지, 뭔가 감동을 받는 방식으로 사람이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내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작곡가의 찬양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책, 설교, 아이디어, 사역 계획에 대해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계시를 받은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도 하나님이 내뱉으신 숨결로 된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불어넣으신 설교를 여러분에게 전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방언은 어떨까요? 예언을 받거나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하나님의 숨결로 된 계시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성경과 동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제가 너무 과장해서 말하는 것 아니냐고 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영감에도 정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자들도, 찬양 작곡가들도,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많은 분들과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영감을 받는데 단지 정도가 낮을 뿐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성경 저자들에 비하면 더 낮은 정도의 영감을 받는다는 겁니다. 성경 저자들은 최대의 영감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그보다 낮은 정도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감’은 하나님이 숨을 내쉬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높고 낮은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거나 말씀하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주님께서 온갖 것들을 말씀하셨다고 믿는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한 번은 어떤 여성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든 상관없어요. 저는 하나님이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죠.”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높고 낮은 어떤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거나 말씀하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내쉬셨거나 내쉬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성경 저자들보다 조금 낮은 정도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가장 높은', '가장 좋은', 또는 '가장 많은'이라는 표현을 한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최상급이라고 하죠. 최종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높은 산, 가장 좋은 시계, 또는 가장 많은 돈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더 높은 산은 없고, 더 좋은 시계는 없으며,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높은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고, 가장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가장 많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더 영감받은 것이나 덜 영감받은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최상급에 해당하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최상급의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영감에는 높고 낮은 정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거나, 말씀하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찬양이나 책, 환상, 계시, 설교는 없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8절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이 두루마리란 요한계시록을 의미하지만, 이 책이 하나님의 계시의 끝, 즉 정경의 끝이기 때문에 여기에 뭔가를 더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 뭔가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책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매우 분명한 경고입니다. 성경은 이 책에 뭔가를 더하지 말라는 경고로 끝납니다. 이 책에 뭔가를 더한다는 것은 완성된 성경의 정경에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성경적 의미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저는 한번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셔서 이미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말씀을 가지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여러분에게 명확히 전달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지만 제 노력은 제 노력일 뿐입니다. 물론 성령님이 저를 도와주시기를 바라지만, 제가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하신 의미를 설명하려는 저의 노력의 결과로 나온 저의 말입니다.

한번은 라디오에서 어떤 여성 설교자의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마도 어떻게 답변할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세요?” 그 설교자는 마치 천상의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대답했습니다. “제가 준비하는 게 아니라 받아 적는 거예요.” 사회자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시 묻자, 설교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이 훨씬 단순해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곡하는 찬양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계시하신 것을 반영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에게 명확히 전달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우리가 쓰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설교를 하고 책을 썼다고 말하면 바보일 겁니다. 제 모든 설교는 편집이 필요한 반면 하나님은 어떤 편집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와서 여러분에게 전달하려는 미약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성에 담긴 의미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 이쯤에서 서론을 마치고 이제 성경의 영감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약간 신학교 강의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LA 타임즈 기사를 읽는데 제게 염소가 먹을 수 있는 곳에 먹이를 두는 능력, 그러니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 책임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염소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실지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이제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영감 교리란 무엇일까요? 몇 가지 범주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계시입니다. 계시란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신 내용입니다. 영감은 수단입니다. 계시는 내용이고 영감은 하나님이 계시를 드러내신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시는 내용, 하나님이 드러내신 진리이고, 영감은 그 진리를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 진리를 내쉬셨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정리하자면, 계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십니다. 영감을 통해 하나님의 영은 계시를 취하여 구약과 신약 저자들의 지성에 전하셨고, 이들은 성령 하나님이 자신들의 지성에 전해주신 대로 기록한 겁니다.

구약과 신약 저자들이 기록한 것은 하나님이 기록하기 원하신 정확하고 확실한 말씀입니다. 계시는 그 자체로 메시지이며, 영감은 계시가 주어진 방식이자 성경에 기록되게 한 수단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영감이 아닌 것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의 영감은 인간의 수준 높은 성취가 아닙니다. 인간이 이룬 뛰어난 성취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영감 교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모든 단어를 저자들의 지성에 불어넣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단어가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이 영감 교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은 단지 인간의 뛰어난 성취일 뿐이라고요.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부정하고 싶다면 그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야말로 방대한 지혜를 담고 있는 놀라운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높은 수준의 종교적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글의 모음집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문학적 천재들과 같다는 겁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나 단테의 '신곡',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같이 말이죠. 다른 걸작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높은 수준의 예술성과 문학적 작품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인간의 천재성으로 만들어진 걸작이지만 동시에 매우 인간적이면서 오류 투성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성경 저자들을 높이 칭송하지만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부정합니다.

이 관점은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이유가 많이 있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인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성을 생각해 내지는 못했을 겁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물을 생각해낼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예수님과 같은 인물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소설가라도 예수님과 같이 정결하고 사랑 그 자체이시며 정의로우시고 완전무결한, 그야말로 인간성을 초월하는 인물을 창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간의 문학 어디에도 예수님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창의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또한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40여 명의 저자들이 최소 1,500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모든 것이 일관되고 논리적이며 초월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인간 천재들의 집합체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단 하나의 동일인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 인류 전체를 정죄하는 책을 썼겠습니까? 어떤 인간 천재들의 집합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 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말하는 책을 썼겠습니까? 다른 모든 종교적 천재들이 쓴 다른 모든 종교 서적들은 우리가 마귀라고 부르는 초자연적 천재들의 도움을 받아 기록된 겁니다. 그래서 행위에 의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오만함에 절을 하는 격이죠.

세상의 다른 어떤 종교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없습니다. 게다가 천재는 항상 자신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만약 성경 저자들이 단지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인간 종교 천재들이었다면, 왜 성경과 동일한 수준의 다른 글을 쓰지 않았을까요? 물론 좋은 글을 쓸 순 있었겠지만, 영감을 받아 쓴 성경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신약 성경에 13편이나 있죠. 하지만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편지가 훨씬 많이 있습니다.

그 편지들은 단지 바울이 쓴 편지일 뿐입니다. 최선을 다해 썼겠지만 그저 바울이 쓴 편지일 뿐이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포함된 두 편 외에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가 더 있지만, 나머지 편지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편지에서 바울은 다른 목사들처럼 목사로서, 다른 전도자들처럼 전도자로서 진실된 말을 했겠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영감을 받은 말씀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영감은 단지 높은 수준의 천재성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만들어낼 수 없고, 인류 전체를 정죄할 수도 없으며, 완전하신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영감이 저자의 생각을 통해 역사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에게 고귀한 사상이나 개념을 심어주셨다는 겁니다. 첫 번째 종류의 영감은 자연적 영감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천재성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종류는 사상적 영감이라고 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 성경 저자들에게 전반적인 종교적, 영적 개념을 주셨고 저자들이 이 개념을 자신의 언어로 자유롭게 썼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은 문자적, 축자적 영감을 부정하는 겁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말로 본문을 해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래리 킹 쇼에서 어떤 신사가 제게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죠. “목사님은 단어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참 편리한 관점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개념, 그러니까 종교적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단어와 연결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모든 단어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라고 주장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영감을 주신 것을 기록할 때, 그것은 사람의 지혜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이다.” 요한복음 17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메시지는 단어 안에 있습니다. 단어가 없이는 메시지도 없으며, 단어가 없이는 영감도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는 3800번 이상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모두 단어에 관한 것입니다. 단어가 없는 개념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는 갈 수 없는 이유를 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이 때 하나님은 “내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많이 줄 테니 네 방식대로 잘 말해 보거라”라거나, “내가 네 생각 속에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그리고 이것이 40년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신명기 4장 2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가감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진실은 그 반대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도 기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선지자들이 단어들을 기록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입니다.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이 오실 메시아의 고난과 그 고난 후에 받으실 영광에 대해 기록했는데, 자신들이 기록한 것을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했답니다. 자신들이 영감을 받아 쓴 바로 그 단어들을 조사해서 누구를, 어떤 때를 가리키는지 알아내려 했답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기록한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해석할 수조차 없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어와 상관 없는 개념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전체적인 개념 없이 단어만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서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단어로 말씀하셨고,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단어들을 글로 표현한 것입니다. 생각은 단어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몸과 연결된 것처럼 말이죠. 한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이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별개로 영감을 받는다는 것은 음표 없는 음악이나 숫자 없는 수학과도 같다. 암석 없이 지질학이 있을 수 없고, 인간 없이 인류학이 있을 수 없다. 악보가 없이는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단어가 없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록이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이 단어로 전달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하나님이 성경 저자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정확하게 기록했고, 그 기록들을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에 모은 것입니다.

영감 교리를 또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감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에만 관련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부분적 영감이라고 부릅니다. 즉, 성경의 일부만 영감을 받았다는 겁니다. 영적인 부분, 도덕적인 부분만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리적인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적인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모든 범주에서 정확할 필요는 없고,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말할 때만 정확하면 된다는 방식으로 성경에 있는 오류, 신화, 잘못된 개념들을 설명하려는 겁니다. 모든 영감은 영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세속적인 것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을 쓰셨거나 쓰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역사적 영역에서 신뢰할 수 없고, 지리적 영역에서 신뢰할 수 없고, 과학적 영역에서 신뢰할 수 없다면, 왜 영적 영역에서는 신뢰해야 할까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에 대한 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실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 영혼을 맡길 수 있을까요? 어떤 근거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검증할 수 있는 역사적, 물리적, 물질적 영역을 믿을 수 없다면, 검증할 수 없는 영적 영역은 왜 믿어야 합니까? 성경에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허용하는 순간, 성경을 완전히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라면, 볼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참으로 쓸데없는 관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역사에 대해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실제로 검증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지리적 내용 중 어느 것도 잘못되었다고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영감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영감이 독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관점입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몇몇 종교적 천재들이 쓴 인간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개념은 하나님이 주셨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앞서 말씀드린 모든 관점을 하나로 모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살짝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독자에게 실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성경은 죽어 있는 책인데, 우리가 읽는 순간 갑자기 어떤 부분이 생생하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 성령님이 영감을 주어 일깨우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관점은 솔직히 말해서 신학적 실존주의, 또는 신정통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정말 좋은 일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서 눈과 마음에 들어오게 하면 성령님이 전기 충격을 주는 것처럼 말씀을 활성화시킨답니다. 말씀에 충격을 주셔서 일종의 황홀한 경험을 하게 하신답니다. 하나님과 접촉하는 순간을 주시는데 그러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느끼게 된답니다. 하지만 권위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일종의 영적인 전율일 뿐이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와닿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순간, 실존적 순간, 바로 이 순간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순간에 갑자기 성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깨닫게 하신답니다. 이것이 바로 영감이랍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실제로 역사적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실존적 영감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비신화화를 주장합니다. 성경에서 신화성을 없애야 한답니다.

성경에서 신화성을 없애야 한다니요?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수세기 동안 지속한 거대한 운동입니다. 성경의 비신화화란 성경에서 모든 신화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화일까요?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출생,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기적,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 심판 등이랍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신화 같아 보이는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답니다. 이와 같이 신화적인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 언젠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감동을 주셔서 황홀한 종교적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란답니다. 이것이 바로 프란시스 쉐퍼가 '믿음의 도약'이라고 부른 겁니다. 말하자면 아무 곳으로나의 도약이죠.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을 통해 오류 없는 성경을 주셨다는 기적은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오류 없는 말씀을 찾고 보게 하는 더 큰 기적을 매일 행하신다는 것은 기꺼이 믿는다.” 하지만 어떻게 오류 투성이인 책에서 올바른 영적 경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거짓과 기만을 인정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성경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가장 큰 속임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속임수를 통해 합당한 영적 경험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상은 매우 정교하고 교묘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교훈을 주는 진리만이 진리다.” 현대 포스트모던 철학자다운 주장이죠. 만약 성경 전체가 거짓이라면, 어떻게 성경을 통한 영적 경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잘못된 견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성경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성경의 저자들이 일종의 로봇처럼 모든 단어를 단순히 받아 적었다는 식이죠. 이러한 관점은 기계적 영감이라고도 불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단어를 쓰셨다고 말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우리를 인정하는 척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당신들은 기계적 영감설을 믿는군요. 성경의 저자들이 일종의 황홀경에 빠져서 초월적인 환상을 보는 상태에 들어갔고, 그 상태로 인간 기계가 되어서 하나님이 쓰게 하신 단어를 기록했다는 거죠?”

물론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받아쓰도록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확실하게 영감으로 쓰여진 성경을 주실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책마다 특성이 다르고 저마다의 표현 방식이 다릅니다. 모든 저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고, 언어 사용에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저마다의 개성이 분명히 드러나 있고 때로는 감정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신약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저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성경 저자들은 성령에 의해 움직였지만 그 과정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심에 있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 온전히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각, 통찰, 경험, 이해를 바탕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히브리서가 좋겠네요.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2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많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된 것만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2절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영감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는 성경의 저자들을 의미합니다. “여러 부분으로”는 ‘폴뤼메로스’, 그러니까 여러 책으로, 정확히 말하면 66권,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고, 또한 “여러 모양”으로, ‘폴뤼트포로스’로 말씀하셨습니다. 환상, 예언, 비유, 표상, 상징, 의식, 현현, 음성 등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것을 기록하기 원하셨을 때마다 기록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부분으로, 여러 책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이 구약성경으로 묶였습니다. 이제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구약 성경은 고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기록되기를 원하신 것이 구약성경 저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기록되기를 원하신 것이 신약성경 저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주목할 만한 구절이 두 개 더 있는데, 먼저 베드로후서 1장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0절부터 21절입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는 “감동하심”입니다. 21절 하반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성경 저자들이 물 위를 떠다니는 나뭇잎처럼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이것”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진리로서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계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한마디로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서 기록했다는 겁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다시 베드로후서 1장 21절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여기서 예언은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미래 예측이 아닙니다. 예언은 메시지를 의미하며, 앞에 서서 말하다, 드러내다, 누군가 앞에서 말하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전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그렇기 때문에 20절에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풀다”라는 단어를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헬라어로 ‘에필뤼시스’, ‘에필뤼시스’입니다. ‘놓다, 놓아주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특히 ‘영감’과 의미가 비슷합니다. ‘사사로이’가 영어 성경에서는 ‘예언자 자신의’라고 되어 있는데, 소유격은 근원, 출처를 나타낼 때 사용하죠. 따라서 여기서의 의미는 성경의 어떤 예언도 그 출처가 특정 개인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예언도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 마치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배가 돛을 올리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겁니다.

다른 구절도 살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입니다. 매우 유명한 구절이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모든 성경,” 즉 “파스 그라페 데오프뉴스토스(pasa graphē theopneustos)”는 모든 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절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많은 성경 저자들이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구약을 읽다 보면, 예레미야가 좋은 예가 되겠네요. 예레미야 1장에서 3장까지 읽다 보면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라고 얼마나 자주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장 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영감’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이죠. 성령이 저자들의 마음에 메시지를 주시면 저자의 경험과 어휘와 섞여서 하나님이 기록하기 원하시는 모든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사용하시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충분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면서 더 할 말이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계셨을까요? 성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은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경 전체의 주제이며, 성경이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말씀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을 통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은 나에 대해 참되고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곧 나이니라.”

둘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러,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즉, 성경을 수정하거나 편집하거나 변경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성경에는 손댈 것도, 바꿀 것도, 따로 떼어낼 것도 없습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기록된 대로 행하고 있다.” 같은 장인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집어넣으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예수님은 하시는 모든 일에서 성경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성경 전체의 주제이며, 성경이 자신을 참되게 증언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성경에는 폐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모든 부분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에게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35절에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성경은 어느 부분도 끊을 수 없고, 전체적으로 응집력 있고, 포괄적이며, 완전하고 온전합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성경의 지속성을 우주의 지속성과 비교하셨습니다. 죽음이 들어온 것은 죄가 침입했을 때였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며 영원히 지속됩니다. 죄에 의해 손상되지 않습니다.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단어와 글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예수님은 구약을 해석하실 때 단어 하나 하나에 근거를 두셨습니다. 이처럼 단어는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은 사두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만 영원히 살아계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영원히 살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에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현재시제를 통해 하나님의 영원성을 언급하심으로써 말이죠.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성경을 동일선상에 올려놓으십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붉은색 글씨가 있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구별해서 표시한 겁니다. 이 붉은 글씨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성경의 다른 부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은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입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둘은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하고 둘 다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성경으로 물리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계속해서 언급하십니다. “읽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기록되었으되.” 십자가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시편 22편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구약의 사건들을 직접 확증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아벨의 살해,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의 역할, 할례, 소돔의 멸망과 롯의 아내, 롯의 구원, 모세가 받은 부르심, 모세의 율법,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놋뱀 등을 말이죠. 이렇게 예수님은 구약의 진실성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원에 있어 성경의 충분성을 확립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9절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전부가 바로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경을 알지 못하는 것이 모든 오류의 원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2장 24절입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10분의 1은 구약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1,800개의 구절 중에서 180번 구약을 인용하셨습니다. 자신이 진리이며 영원한 말씀이라고 말씀하셨고,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성경에는 오류가 없다. 둘째, 성경에 오류가 있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 셋째, 성경에 오류가 있으며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숨겼다. 가능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숨겼다면, 예수님은 마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 마귀가 아니십니다.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성경의 영감성 문제를 해결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력 있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이죠. 그리스도는 성경 전체를 소유하시며, 우리도 그리스도의 증언에 근거하여 확신을 갖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할 말이 더 많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으로 성경을 확신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은 스스로의 가장 강력한 수호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진정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감의 기적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진리임을 압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저마다의 경험과 통찰력, 관점을 통해서 기록했지만 동시에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음을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가진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생명을 주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며, 언젠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임을 우리가 알게 하옵소서.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올 때 빛을 주며, 그 빛은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역사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옵시고 계속해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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