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서 여러분과 함께 다시 하나님 말씀을 펴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교회에 오지 못하게 될 때면 우리 교회가 정말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어떻게든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수술 후에 집에 갇혀서 아무데도 갈 수 없었을 때에는 가족에게 컴퓨터를 세팅해 달라고 해서 그레이스 투 유 실시간 방송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교회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지만 사실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허전한 제 마음을 채워줄 무언가를 텔레비전에서 찾으려고 해보기도 했는데,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죠.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성경이 얼마나 심오한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정말로 심오합니다. 인류의 모든 생각과 철학, 견해, 통찰을 한데 모아도, 성경은 이 모두를 뛰어넘을 정도로 깊이있는 책입니다. 성경의 깊이를 다 파헤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합니다.
세상에는 저마다의 의견과 통찰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아름다움과 고매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피상적인 설교는 성경에 대한 얕은 시각을 드러내고, 성경에 있는 위대한 보물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기쁘고,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있는 것이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성경의 심오함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제 릴랜드 라이켄(Leland Ryken)이 쓴 책을 읽었습니다.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이 책은 영어 성경 번역에 관한 내용입니다. 번역의 철학을 다루고 있죠. 예를 들어, 킹 제임스, 뉴 킹 제임스, NAS, ESV가 단어 대 단어 형식의 동등성 번역, 즉 직역인 반면에, 다른 모든 번역들은 ‘동적 동등성’, 즉 의역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저자가 제게 보내준 책이지만, 성경 번역에 있어서도 성경을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지배하는 능력이 성경의 저자가 아닌 현대의 독자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번역할 때도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메시지 성경(The Message), 리빙 바이블(The Living Bible), 새 리빙 바이블(The New Living Translation), NIV, TNIV, 메시지 성경(The Message), 현대인의 성경(Good News for Modern Man) 등등 많은 번역본들이 존재하게 된 겁니다. 이 모든 번역본들은 독자를 우위에 놓고,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성경을 현대적 맥락과 현대 언어로 옮기려고 합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방금 말씀드린 번역본들이 인기가 많습니다. 이 번역본들이 복음주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것, 즉 성령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읽어야 합니다. 현대에 생겨난 특정한 위원회가 독자들이 읽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해석이 아니라 말이죠. 따라서 이는 매우,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모두 이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정말 감사하고 있는 것은, 제 삶을 통해, 그리고 여기 그레이스 교회에서 함께 해온 사역을 통해 우리가 받은 영향입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신념, 그리고 하나님이 원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 그대로를 알고자 하는 신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의 독자가 아닌 하나님이 말씀을 주관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직역본을 사용합니다. 저는 NAS(New American Standard)로 설교를 하는데, 뉴 킹 제임스 버전(New King James Version)도 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SV(English Standard Version)는 새로운 번역본으로서 시적으로 아름답게 구성된 번역본인데도 ‘형식적 동등성’이라고 불리는 단어 대 단어 번역 방식, 즉 직역할 뿐 의역의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직역 번역본인 NAS와 뉴 킹 제임스 버전(New King James Version)을 사용합니다. 이 뉴 킹 제임스 버전 역시 훌륭한 형식적 동등성 번역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적 분위기에 맞춘 성경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업데이트된 성경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원본으로 돌아가서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예배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중요성을 살펴보면서 왜 일요일이 예배에 적합한 날인지, 주일이 왜 적합한 날인지 알아볼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안식일에 대해 혼란을 겪는 분들을 위해서 안식일에 대한 설교를 전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주의 날, 주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설교와 예배가 길지는 않겠지만, 성경이 주일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 알려드려고 합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죠? 그리고 여러분은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일요일에 여기 모입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일종의 양식입니다.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서만의 양식이 아니라, 미국 전역의 교회에서 대체로 볼 수 있는 양식입니다. 오랫동안 유지된 전통적인 양식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또 올라가면 신약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평생에 걸쳐 저는 세계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처럼 먼 곳도 가본 적이 있는데, 그곳의 신자들도 일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항상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고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이렇게 영국의 여러 지방에도 여러 번 다녀왔는데, 그곳 신자들도 일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또 저는 벨라루스에도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나라입니다. 최근 이 나라는 지도자들이 반기독교적이고 심지어 박해하는 태도를 보이며 교회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곳의 신자들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구 소련의 또 다른 나라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신자들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인도에서도 일요일에 모이고, 중국에서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필리핀에서도 일요일에 모이고, 뉴질랜드와 호주에서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제 아내 패트리샤와 함께 갔던 에콰도르의 산간 지역 콜타 마을의 원주민들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브라질의 정글과 도시에서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남미 전역에서 일요일에 모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도 일요일에 모입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왜 서로 다른 날에 모이지 않을까요? 왜 각기 목요일, 화요일, 수요일, 토요일에 모이지 않는 걸까요? 기독교 교회 역사 전체를 보면 신자들은 항상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것이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요일에 지켜야 할 온갖 엄격한 규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일요일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게 작은 정장을 입히고, 그러니까 작은 흰 셔츠를 입히고, 작은 나비넥타이를 달아주고는 하루 종일, 일요일 내내 그렇게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지 말아야 할 금지사항이 참 많았습니다.
저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마당에서 캐치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공놀이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살 때는 스텝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스텝볼은 연립주택의 계단에서 하는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죄는 폭식 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일 오래도록 먹는 아이였습니다. 오후 12시 30분쯤 교회에서 나와 집으로 가서는 저녁에 다시 교회로 갈 때까지 계속 먹었습니다.
일요일은 모든 것을 완전히 중단하는 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주님을 묵상하고 성경과 성경 이야기를 읽으며, 기독교 서적이나 신학 서적을 읽고 주님에 관해 이야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아침과 저녁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습니다. 거기에 주일학교와 어쩌면 일요일 저녁 예배 전의 청년부 모임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하루가 예배로 가득 찼습니다.
이는 미국 전역에서 대체로 비슷한 방식이었습니다. 제가 1969년에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왔을 때, 샌 페르난도 밸리에는 쇼핑몰이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 지어진 첫 번째 쇼핑몰은 파노라마 시티 몰이었습니다. 우리가 있는 이 작은 도시인 파노라마 시티는 전쟁 후에 세워진 도시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퇴역군인들을 위해 작은 집들이 들어서면서 세워졌죠.
그리고 처음으로 지어진 쇼핑몰은 일요일에는 절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다른 어떤 곳도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일요일에는 조직된 행사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스포츠 활동도 일요일에는 없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지역사회에서 계획된 활동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에 대한 법이 있었는데, 주정부에서 정식으로 통과된 법이었습니다.
일요일은 항상 토요일과 매우 달랐습니다. 토요일에는 상점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사람들이 움직였습니다. 모든 행사, 모든 스포츠 경기는 토요일에 예정되어 있었고, 여행, 레크리에이션, 집안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요일은 매우, 매우 다른 날이었고, 여기서도 그렇게 인식되었습니다. 영국과 유럽의 우리 선조들도 그렇게 인식했으며, 이는 종교 개혁 시대까지, 심지어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샌 퍼르난도 밸리의 지역 법이 바뀌어 상점들이 일요일에 문을 열 수 있게 된 해를 기억합니다. 그 후 결국 일요일은 토요일과 거의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수세기 동안,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일요일 예배와 교제는 교회의 관습이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임의로 그렇게 된 걸까요?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걸까요? 이 모든 다른 나라들, 이 모든 다른 언어들, 그리고 모든 세기를 통틀어 계속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일요일 예배는 어떻게 시작됐을까요? 누가 시작했을까요? 우리는 왜 지금도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주 5일 제도, 그러니까 금요일에 업무일이 끝나고 일요일에는 쉬는 제도를 따르고 있는 걸까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지난 25년 정도에 걸쳐 많은 교회에서 주일을 점차 약화시켰습니다. 주일을 부담 없는 1시간짜리 경험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원한다면 수영복을 입고 해변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를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주일을 이렇게 1시간으로 최소화했고, 심지어 그 1시간조차 주일에 할애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토요일 저녁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예배에 가면 주일에는 예배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해변에서 하루 종일 보낼 수 있는 날을 확보하게 되는 거죠. 토요일 저녁에는 어차피 나가서 놀 수 없는 시간이니까 예배를 드려도 부담이 없는 겁니다. 현대의 전형적인 추세가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토요일에 모이든 일요일에 모이든 거의 차이를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어서 게임을 하거나 여가 활동을 즐기거나 쇼핑몰에 가거나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가고 싶어하는데, 토요일 저녁에 잠깐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러한 필요가 쉽게 충족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토요일 예배가 정말 문제가 될까요? 꼭 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걸까요? 다른 요일에 예배를 드리거나 차라리 이틀에 한 번씩 예배를 드려도 되지 않을까요?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지난 시간 마지막에 다뤘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잠시 골로새서 2장을 보겠습니다. 성경 구절 몇 개를 따라가면서 결론을 내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지난주에 안식일에 대해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안식일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렇죠? 안식일은 이제 없습니다. 따라서 일요일과 안식일은 상관이 없습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일곱째 날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제정되었는데, 인간의 타락과 모세 시대 사이에 생긴 일이죠. 모세 시대 전에는 안식일 법이 없었습니다. 안식일 준수도 없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제정된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족장들에게는 그 어떤 안식일 법도 없었습니다.
창조 후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왜일까요? 하나님이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는 날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일곱째 날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기억하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자세히 다루었죠. 매주 토요일, 즉 한 주의 일곱째 날은, 일요일이 한 주의 첫째 날이니까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기억하기에 좋은 날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전통에 녹아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주말에 일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토요일은 창조 세계를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할 필요가 없었죠. 모두 기독교적 구조의 일부였습니다. 밖으로 나가 가족과 함께 소풍을 가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야외를 즐기고, 하나님의 피조물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는 것의 일부였습니다.
또한 모세 율법이 제정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안식일을 정하셨고, 죄를 떠오르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제약을 두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매주 토요일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죄로 가득한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안식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부터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이제 없습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일부로서 새로운 언약에 의해 대체되었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는 완전히 다른 날이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토요일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율법을 주신 분으로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 그리고 우리 마음의 죄성을 떠오르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에는 새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율법을 주신 분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습니다. 새 언약에서의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하십니까? 구주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언약에는 구주이신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는 날이 있다는 겁니다.
이제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으로 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이 사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신약 시대부터 일요일을 중요한 날로 여겨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는 여전히 일요일에 모입니다. 매우 깊이 자리잡힌 관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안식일 다음 날, 즉 일요일이 나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이었기 때문이죠.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일요일 아침 새벽에 일어난 일입니다. 익숙한 장면이죠? 이 일요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날입니다. 부활의 날이죠.
7절입니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한 이유는 이날에 일어날 일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이 튼 직후였습니다. 기억하시죠?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유대 달력에서 일요일은 중요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별한 날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른 날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한 주의 첫 날에 부활하신 이후에는 결코 예전과 같은 날로 남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일곱째 날이 창조를 기념하고 율법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부활도 기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율법을 주신 분으로 기억하고 찬양했다면, 구주로서의 하나님은 매주 더욱 기쁘게 기억하고 찬양해야 할 겁니다.
9절을 보면 첫 번째 일요일 예배가 나옵니다.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작은 예배였지만, 분명히 경배하는 예배였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겠습니다. 지금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모두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누가복음을 마무리하면서 내용을 이미 살펴본 바 있죠. 그 전에 마태복음 본문에서 생각해야 할 점이 7절에 나옵니다. “빨리 가서.” 오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기에 빨리 가서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날을 일찍 시작해야 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55절부터 보겠습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24장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와 함께 요한도 무덤에 갔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전해주듯이 말이죠. 이들도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요일 새벽의 일이었습니다. 여인들이 가장 먼저 갔다가 돌아와서 목격담을 전하자 제자들이 무덤에 왔으며 사도들도 왔습니다. 아침 아주 이른 시간에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살아계시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속량을 이루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지옥을 정복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으며, 승리 가운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여전히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같은 날, 13절을 보면,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여전히 첫째 날, 여전히 일요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믿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냥 여자들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5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정말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날이었죠. 아침에 예수님은 사도들과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후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던 이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중 한 명은 글로바였고 다른 하나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더 있습니다. 아직 더 있습니다.
32절입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와, 얼마나 대단한 일요일인가요. 방금 여러분은 첫 번째 일요일 예배를 드렸고 첫 번째 일요일 설교도 들었습니다. 25절부터 27절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첫 번째 일요일에 있었던 첫 번째 설교는 예수님의 강해설교였습니다.
첫 번째 예배와 첫 번째 일요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음을 알게 된 두 사람이 11km나 떨어진 곳까지 달려간 거죠.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36절 이하는 정말 흥미로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요한의 기록도 흥미롭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고 큰 그림만 그리도록 하겠습니다. 20장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누가복음의 여인들과 같은 놀라운 상황을 경험합니다. 곧이어 시몬 베드로가 무덤에 가서 수건과 세마포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면하고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이제 누가복음 24장에서 중단되었던 이야기가 20장 19절부터 시작됩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열한 명의 제자들이 있던 다락방에 도착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19절의 “그 날 저녁 곧 안식 후 첫날에”라는 구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가 이렇게 말한 것도 당연합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르되.” 왜냐하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모든 사건이 이 첫날에 일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첫날’이 강조되고 있는 겁니다.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했다는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물론 그랬을 겁니다. 문이 모두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벽을 통과해서 나타나신 것이죠.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다시 한 번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 강림의 예고편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하루입니다.
금요일 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모든 소망은 산산조각이 나고, 무너지고, 사라져버렸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은 안식일에 쉬는 것뿐이었습니다.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어디를 갈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했던 여인들조차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꼭 향유를 발라드리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의 시신에 마지막 예를 갖추는 것이 바랄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입니다.
일요일이 저물 때쯤에는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알았고, 요한도 알았으며, 막달라 마리아도 알았고, 다른 마리아들과 여인들도 알았으며, 다른 제자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저녁까지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한 명이 누구였나요? 바로 도마입니다.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4절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아마도 구석에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내가 옳았어.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
25절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정말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이날은 무슨 요일이었습니까?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사이 7일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다시 함께 모인 것은 여드레가 지난 후였습니다.
제자들이 다른 요일에도 모여 있었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아마도 숨어 있었을 겁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은 예수님이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요일이 갑자기 매우 특별한 날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두 번의 기적적인 나타나심을 보이셨는데, 둘 다 일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음을 알게 된 것도 일요일이었고, 구약성경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은 것도 일요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확증하신 것도 일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능력을 받게 될 성령을 약속하신 것도 일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이라는 모든 과거가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일요일이었으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요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요일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일요일 아침에 나타나셨고, 그 일요일 오후에 나타나셨으며, 그 일요일 저녁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 일요일에 여인들에게 자신이 살아계심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일요일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요일에 첫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일요일에 두 제자를 만나셨고, 함께 떡을 떼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후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일요일 밤에 예수님은 도마를 제외한 열한 제자와 만나셨고, 두 번이나 평강을 선포하시고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 주일에 여러 번 가르치셨을 겁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뿐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다락방에서도 다시 가르치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자신이 구약의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죠.
그 일요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루신 일을 통해 이제 죄 사함이 가능해졌으며, 회개하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요일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위대한 사명, 지상대명령을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사도들에게 복음을 땅끝까지 선포하라고 위임하심으로써 말하자면 전도의 사명이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그 일요일에,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위대한 새 언약이 확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모든 시대의 모든 죄인들을 위한 죄 사함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그 전까지는 전혀 의미가 없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일요일은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일요일은 새 언약의 부활의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뻐하는 날로 제정되었다가 인간의 타락으로 오염되었다면, 일곱째 날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도록 제정되었다면, 이제 또 다른 날이 주어졌습니다. 이날은 창조를 기념하거나 죄를 기억하는 날이 아니라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날의 새벽에 일어났고, 그렇게 새 언약은 새 날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은 끝이 났고, 새로운 날이 도래했습니다. 이날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왜 여드레 후에 다시 모인 걸까요? 예수님은 일요일에 대해서 뭔가를 더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일요일을 새 언약의 기념일로 제정하신 것이죠.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에서 ‘불의 혀처럼’은 진짜 불이 아니라 불처럼 보였다는 겁니다. 성령님의 강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20장에서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약속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취된 약속이었습니다. 예언이 기념비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님이 그 약속을 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성령님은 믿는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확증하고, 믿음을 인치시며, 확신과 자신감을 주고, 복음의 타당성에 대한 내적 증거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약속을 반복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으로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이 약속을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서 계속해서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세례를 주셔서 내 육체 안에서 한 교회가 되게 하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그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순절 날에 이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날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날에 제자들이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날에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이 되도록 세례를 주시는 첫 번째 세례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이날에 하나님 나라가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놀라운 날입니다.
2장 14절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중요성에 관한 위대한 설교를 했던 것 기억하시나요?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23절부터 읽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런 다음 베드로는 시편 16편에 약속된 메시아의 부활을 설교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37절입니다, “마음에 찔려… 이르되.” 이에 베드로가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 결과 삼천 명이 회심합니다.
제가 이 내용을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순절이 무슨 요일이었는지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무슨 요일이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일요일이었습니다. 레위기 23장 16절에 따르면, 칠칠절 또는 오순절은 밀의 첫 이삭을 봉헌하기 위해 지정된 날로, 5월이나 6월 무렵이었습니다.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초실절 안식일로부터 50일 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50일을 더하는 겁니다. 간단한 계산입니다. 안식일에 7번의 안식일을 더하면 49일이 되어서 안식일에 해당하겠죠? 그래서 50일째는 그 다음주의 첫 날이 됩니다. 다시 일요일인 겁니다.
오순절은 일요일이었습니다. 특별한 사실이긴 하지만 첫째 날을 모세의 율법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은 아닙니다. 신약에는 한 주의 첫째 날에 대한 어떤 명령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날을 교회 설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채우셨다는 매우 분명한 사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활이 일어나고, 교회가 탄생하고, 교회에 능력이 주어지고, 구원이 완성되고,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들은 구속의 핵심을 이루는 영광스럽고도 기초가 되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들은 안식일의 그림자와 형태를 대체했습니다. 이 일들은 모두 일요일에 일어났고, 그래서 주님이 일요일을 친히 주의 날로 택하신 것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임명하실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배제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첫째 날을 제정하셨을 때, 일곱째 날을 배제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 대한 모세의 율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모세 율법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들을 가져와서 일요일에 적용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의 의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강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모세 율법의 규정과 의식, 제한과 속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교에서 벗어났습니다. 안식일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새 언약의 새로운 일꾼들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새로운 날이 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의 안식일과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일곱째 날인 토요일을 주님께서 모든 것을 6일 동안 창조하셨음을 기억하게 하는 날로 여길 수 있다고 봅니다. 아주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날이나 자신이 죄인임을 기억하는 날로 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모세 율법에서의 안식일에 대한 구약의 제한과 규례를 한 주의 첫째 날에 적용하라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창세기 2장부터 모세의 율법을 주시기까지, 수백 년, 수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모든 기간에 걸쳐 안식일, 즉 토요일에 누구의 행동도 제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는 날일 뿐이었습니다. 그 어떤 제한이나 구속도 없었습니다. 모세 이전까지는 없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제정된 안식일은 모세와 함께 시작되었고, 구약이 폐지되고 새 언약이 세워져 비준됨과 동시에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일요일은 창세기의 옛 안식일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축복의 날로 삼으신 것, 기억하시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첫째 날을 축복하시고 구속주를 기억하는 날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본래 제정하신 안식일은 쉬는 날이었습니다. 모세 율법 아래에서는 오히려 쉬지 못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일은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날이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규제로 짓눌린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에덴동산에서 본래 의도되었던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즐거움과 평안과 영적 기쁨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진리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예배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과 선포를 통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콤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아직도 일요일을 지키려는 흔적이 남아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하지만 일요일은 본래 쉬는 날로 의도되었습니다. 모세 율법에서 가져온 제한과 속박으로 가득 찬 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언약 신학에서 늘 있어왔던 문제입니다. 이들은 어디서 옛 것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지를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4장 9절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한 수고가 헛된 것이었느냐? 다시 날과 안식일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으로 돌아가려 하느냐?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법 아래 있지 않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은 매우 특별한 일요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요일도 매우 특별한 일요일이었습니다. 오순절도 매우 특별한 일요일이었습니다. 분명 오순절 이후에, 일요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일에만 예배를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얼마나 자주 예배를 드렸을까요? 매일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아시다시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일요일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함께 모이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떼는 것과 기도에 헌신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속박하는 날이 아닙니다. 율법의 두려운 위협 아래 들어가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매일 모였습니다. 하지만 곧 특별한 한 날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입니다. 다소 역사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과 함께였던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이제 7절입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날을 제정하기 위한 그 어떤 법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여러 해가 지났고 일요일은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주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이것이 성도들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여전히 모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저녁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마도 하루 종일 모여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저녁 예배였다는 걸 알 수 있나요? 바울이 ‘자정까지’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말을 밤중까지 계속했습니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행운’입니다.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졸렸다면 앉아 있기 좋은 자리는 아니었죠.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보십시오, 가장 위대한 설교자도 사람을 졸게 만들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그렇게 저녁 예배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불쌍한 청년은 더 이상 저녁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유두고를 살려낸 겁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바울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창문 밖으로 떨어져 죽으면 살려서 데리고 올라옵니다. 바울의 설교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유두고는 계속 들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그러니까 성도들은 일요일에 모여서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 모임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해변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러서 한 시간 때우는 그런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드로아의 이 교회는 초대교회와 그 이후로 이어진 일요일 예배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16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모으는 일에 관해 편지를 썼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바울은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모으고 있었고, 이방인 교회들 중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루살렘에는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게 되었죠.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간들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곳에는 유대교 회당과 이교도 신전은 있었지만 교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루살렘에만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남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에서 쫓겨난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들을 도와줘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던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땅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에게 주어서 이들을 돌보는데 쓰도록 했습니다. 사도행전 초반부에 나오듯이 말이죠.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지시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으려고 했던 겁니다. 고린도 교회도 같은 방식으로 하기를 원했던 것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저는 여러분이 일요일 예배에서 매주 이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매주 첫날에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일요일은 우리가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해지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어떤 규제가 있는 날도 아닙니다. 이날은 우리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집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여 찬양을 부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여 성경을 읽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교회 앞마당에 머물면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서로 교제하고 배운 것을 나누는 겁니다. 이날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즉 여러분의 구원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결국 이 첫째 날은 교회에게 너무나 소중해져서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보겠습니다. 일요일은 요한계시록 1장 9절에서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요한은 밧모 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복음 반대자들에 의해 유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언제라고요? “주의 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종말론적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아닙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여호와의 날, 곧 최종 심판을 경험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헬라어로 보면 ‘여호와의 날’은 ‘테 헤메라 투 큐리오’입니다. 반면에 ‘주의 날’은 ‘테 퀴리아케 헤메라’입니다. 서로 분명하게 다르고, 여기서만 사용된 완전히 다른 표현입니다. 이 ‘주의 날’은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이날은 주의 날이었고 요한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때는 언제입니까? 바울의 죽음 이후 30년에서 4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1세기 말인 96년이었는데, 이때쯤에는 일요일을 더 이상 일요일이나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신자들에게는 이제 ‘주의 날’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2세기에 ‘주의 날’이 한 주의 첫 날을 지칭하는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온갖 종류의 증언이 있습니다. 요한이 96년에 계시록을 기록한 지 불과 몇 년 후이죠. 한 주의 첫 날은 주의 날이었고, 주님을 높이는 날이었습니다. 일요일에 대한 이 명칭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흔히 발견되며, 교회 역사 내내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저는 일요일을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주의 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주의 날, 주일이라고요. 요한이 환상을 받은 것도 주의 날이었죠. 요한의 첫 번째 환상은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요한이 뭐라고 말했나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이 몸을 돌이켜 보니 촛대 사이에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 그분의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주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섬기시는 모습입니다. 요한은 일요일, 주의 날에 교회를 거니시는 주님의 환상을 본 겁니다. 주님께서 그 환상을 주셨고, 일요일, 주의 날에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요한은 많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중 어느 것도 특정한 날과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요. 이 환상이 유일합니다. 이날이 주의 날인 것은 이날이 부활의 날이며, 성령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아침이 아닙니다. 주의 오후도 아닙니다. 주의 저녁도 아닙니다. 주의 한 시간도 아닙니다. 바로 주의 날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토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요일 예배가 잘못된 걸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저는 이 전통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향해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경의를 표하는 날을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24시간 7일 내내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죠? 토요일 아침에도, 토요일 밤에도, 그리고 다른 모든 날에도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하신 손으로 한 주의 첫 날을 지정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이날은 나의 날이다. 이날은 나의 날이다.”
이제 주일 저녁 예배는 남아있다 하더라도 곳곳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녁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기가 정말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이날은 주의 아침이 아닙니다. 이날은 주의 ‘날’이며,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교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배가 더 깊어지고 길어지고 더 자주 있어야 할 때에, 오히려 더 짧아지고 더 피상적이 되고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겉핥기식 설교, 피상적인 설교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사람들과 예배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서 숨을 쉬는 한, 우리 교회는 주일 오전 예배와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저녁 예배에는 2층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떨어져 죽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악의 경우라 해도 졸다가 머리를 앞에 있는 의자에 부딪치는 정도일 텐데, 그 정도는 저희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날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주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십자가를 기뻐하며, 부활을 기뻐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교제하고, 성찬식에서 함께 떡을 떼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말씀의 설교를 듣고, 그 영광스러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저는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의 안식일 법이 우리에게 다시 부과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은혜에 반응하는 것이 율법에 반응하는 것보다 덜 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예배를 얼마나 갈망하는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외적인 규칙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모든 것은 옛 언약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여기에는 주의 날도 포함됩니다. 이날은 고되고 부담스러운 날이 아니라 즐겁고 기쁜 날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신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클레이튼이 주일 아침에 여기에 올라와서 찬양팀과 함께 찬양할 때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함께 찬양하시니까요. 저는 사람들이 다른 일을 하러 가는 길에 들르는 장소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다고 오후에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가를 즐기거나, 교제를 나누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의 영광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직접 정하신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찬양과 교제와 거룩한 진리로 채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옛 언약의 규례 아래 있지 않습니다. 정죄의 체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림자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실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안식하는 날입니다. 창조를 기념하는 의미의 안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곧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의 안식입니다.
그러니까 일요일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무엇을 하라고 하나요?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을 하라고 하나요? 일하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놀이가 금지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차원은 이날이 여러분이 가장 큰 기쁨을 찾을 수 있는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큰 기쁨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마음 없이 몸만 온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살펴보세요. 일요일이, 이날이 진정 여러분에게 주의 날입니까? 그러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담긴 새로움과 아름다움, 간결함, 풍성함, 일관성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매주, 매해 말씀을 공부하지만 언제나 새롭게 깨달으며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날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주님을 향한 것으로 채우기 원합니다.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을 기뻐하며 사랑하고, 주님의 백성을 사랑하며,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 말입니다. 세상의 것들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따로 떼어 두고, 위에 있는 것들에 우리의 애정을 두며,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것에 의해, 우리가 하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갈망으로 결단하게 하옵소서.
오늘 저녁 주님의 백성들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여기 있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높이고 싶기에 지금 여기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주의 날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매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주의 날이 갖는 의미임을 이해하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날에 부으신 사랑 때문에 우리도 주의 날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This article is also available and sold as a bookl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