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이제는 제가 설교하고 싶은 주제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 강해를 모두 마쳤기 때문이죠. 앞으로 이 주제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다룰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습니다. 제게는 꽤 새로운 경험이라서 의미 있는 순서를 만들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자유롭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점이면서 참 좋은 기회입니다. 사실 제게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해 온 주제가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복음서를 다루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성령님, 성령님입니다.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4복음서를 설교하면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성경의 여러 곳에 보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서도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인 성령님께 영광을 돌릴 때입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중에서 가장 잘 잊히고, 가장 잘못 해석되고 있으며, 가장 존중받지 못하시고, 가장 슬퍼하고 계시며, 가장 남용되고, 심지어 가장 모독받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말 슬픈 일이죠.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시편 69편에 나오는 다윗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셨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시면 내가 고통을 느낀다. 너희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내 아버지의 집을 더럽혔고, 내 아버지의 이름을 모독했으며, 내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도다.” 그런데 저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과 관련된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이 모욕당하실 때마다 정말 슬픕니다. 정말이지 끝없는 슬픔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모욕당하실 때마다 정말 슬픕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 복음주의 교회는 어떤가요?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끼는 편이지만, 성령님을 욕되게 하고 남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성령님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스스로를 변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거룩한 이름에 쏟아지는 비방이 제게도 쏟아지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러한 비방은 주로 오순절파와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로부터 쏟아지고 있는데, 이들은 성령님을 남용하고 심지어 성령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할 수 있는 자유로운 허가를 받은 것처럼 여기면서 지금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성령님이 하지 않으신 말씀, 행하지 않으신 일, 그리고 일으키지 않으신 체험을 성령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아닌 것을 성령님의 사역으로 돌리는 겁니다. 끝없는 인간의 체험, 감정적인 체험, 기이한 체험, 마귀적인 체험을 성령 체험이라고 합니다. 환상, 계시, 하늘로부터의 음성, 초월적 수단을 통한 성령님의 메시지, 꿈, 방언, 예언, 영혼 이탈 경험, 천국 여행, 기름 부음, 기적, 이런 것들은 전부 거짓이고 거짓말이고 속임수인데도 성령님이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합당한 방식으로만 예배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선포하신 방식대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성령님을 제멋대로 남용하고 성령님을 터무니없이 모욕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성령님과 전혀 관계없는 일들을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일으키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령님을 이토록 남용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위험한 죄입니다. 사실,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움에 떨어야 할 일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특정한 일을 하시거나 말씀하신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성령님이 이것을 하셨다, 성령님이 이것을 말씀하셨다, 성령님이 이것을 만들어내고 계신다고 말하는 데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 탓으로 돌리는 데에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이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예를 들면 마태복음 12장의 내용과 대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는데, 그 용서받지 못할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1절부터 32절에 나오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의 일을 성령님의 사역으로 돌리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사탄의 일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리는 겁니다. 사탄은 지금도 살아서 속임수, 거짓 기적, 잘못된 신학, 거짓 환상, 거짓 꿈, 거짓 계시,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위해 일하는 기만적인 교사들을 통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아직도 살아있고 건재합니다. 사탄의 일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심각한 모독입니다. 마치 성령의 사역을 사탄의 일로 돌리는 것이 심각한 모독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일이 너무 많아서 모두 말씀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만 켜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이 모든 거짓말에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갖다붙입니다. 마치 공짜인 것처럼, 마치 그런 종류의 모독에 치러야 할 대가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최근에 생겨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전국적인 뉴스에 등장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최신 물결은 성령님을 모욕하는 새로운 형태의 은사주의인데, NAR(New Apostolic Reformation)이라고 불리는 ‘신사도 개혁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새롭지도 않고, 사도적이지도 않고, 참고로 말하자면 개혁도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그레이프넛츠’ 시리얼과도 같습니다. 이름만 그레이프넛츠지 포도도 아니고 견과류도 아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기독교도 아니고 과학도 아닌 것처럼 말이죠. 신사도개혁운동은 새롭지도 않고, 사도적이지도 않고, 개혁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은사주의 안에서 활동해 온 동일한 거짓 교사들과 거짓 지도자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항상 성령님을 욕되게 하고, 성경을 욕되게 하며, 기적적인 표적과 기사, 환상과 꿈을 주장합니다. 피터 와그너, 캔자스시티 ‘선지자들’, 마이크 비클, 신디 제이콥스, 루 잉글 등등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이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어 현재 미국의 50개 주 전체에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은사주의입니다. 일종의 스테로이드라고 할 수 있죠. 한 저자는 아드레날린 주사를 맞은 은사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이렇습니다. 성령님이 이들에게 2001년에 두 번째 사도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계시하셨다는 겁니다. 2001년에 두 번째 사도 시대가 시작되었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오랫동안 사라졌던 신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 직분이 회복되었으며, 성령님이 2001년 이후 교회의 특정 사람들에게 예언의 능력과 사도의 권세를 주셨다는 겁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비성경적이고 완전히 잘못된 신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주셨다니 말이죠. 저는 성령님께서 거짓 교사들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이 모든 것 때문에 비난을 받고 계십니다. 이것은 단지 최근의 사례일 뿐입니다.
예를 들면 이들은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사도들이 성령님을 통해 행했던 바로 그 기적과 그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2001년부터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부는 선지자 범주에 속하고, 일부는 사도 범주에 속한답니다. 성령님이 자신들에게 계시하신 것을 사도들과 똑같은 권위를 갖고 말한답니다. 이 권위와 능력은 세상에서 입증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사도 중 한 명이 독일에서 광우병을 멈추게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신사도운동의 특징은 과도한 황홀경과 기이한 행동입니다. 감정주의가 통제를 벗어나 날뛰고, 온갖 종류의 미친 계시와 행동이 나타납니다. 피터 와그너가 이 운동의 아버지인데, 와그너는 수년간 수많은 일탈을 일으켜 왔습니다. 여기에는 교회 성장 운동을 시작한 것도 포함됩니다. 실용주의 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죠. 이들의 영향력은 계속 커져서 최근에는 정치적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몇 주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몇 주 전에 휴스턴 시에서 조찬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 행사는 신사도개혁운동과 그 지도자들이 후원했고 공화당 대선 후보인 릭 페리가 주요 연사로 참석했습니다. 신사도개혁운동이 후원한 이 행사에서는 두 명의 목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성령에게서 사도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사도'들이죠. 이들은 텍사스 주지사인 릭 페리의 사무실에 연락해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계시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계시란 텍사스가 미국에 부흥을 일으키고 경건한 정부로 이끌도록 하나님이 선택한 주이며, 릭 페리가 이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행사에서 신사도개혁운동의 두 '사도'들은 릭 페리에게 안수하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직접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신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자신들을 통해 오는 이 신성한 계시를 듣지 않으면 더 많은 지진과 테러 공격이 일어날 것이고 경제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자신들의 말을 들으면 좋은 일이 일어난답니다. 이에 대한 예시로 가뭄 이후 텍사스에 약간의 비를 내리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정신병원의 뒷문이 열려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자칭 '사도들' 중 한 명은 민주당이 이세벨과 그 수하에 있는 세 악마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마귀가 보인다고 하면서 정교한 의식과 낙인 찍는 도구, 말뚝, 추를 사용해 이 마귀들과 대결을 한답니다. 텍사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땅에 말뚝을 박고, 특정 물건들에 낙인을 찍으며, 텍사스 모든 지역을 하나님께 맡긴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도록 부름받았다.” 또 이들은 텍사스의 모든 프리메이슨 오두막을 방문해서 바알 악마를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알 악마가 프리메이슨을 통제하기 때문이랍니다.
이들은 2009년에도 휴스턴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아래 이세벨이 보였다고 합니다. 이세벨을 봤답니다. 실제로 이 '사도들' 중 한 명인 앨리스 패터슨이라는 여성은 2010년에 '인종과 정치적 분열의 가교'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제목이 정치적인 책처럼 들리죠, 이 책에서 패터슨은 이세벨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세벨이 치마를 들어 올렸을 때 작은 바알과 아세라와 몇몇 마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움츠려 떨고 있는 이 작은 영들은 이세벨의 깡마른 다리 발목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인종과 정치적 분열의 가교'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성령님이 계시하셨답니다.
이제 이것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아시겠죠? 바로 사탄의 행위를 성령의 사역으로 돌리는 겁니다. 릭 페리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거 기간에는 기도해준다고 하면 누구의 기도든 다 받게 되죠. 특히나 뭐가 뭔지 잘 모를 때 더 그렇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포장되는 일탈의 한 예시일 뿐입니다. 정말이지 성령님을 모독하는 무서운 행태입니다. 다른 일들도 많이 있지만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사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사역 초창기를 떠올려 보면 여기저기 참 많이 다녔습니다. 실은 신학교 재학 중에도 그랬죠.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그 후 몇 년 동안, 저는 여행을 다니면서 청년과 대학생을 비롯한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교회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모두가 원했던 주제 중 하나는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한결같이 그랬습니다. 저는 계속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모두가 성화에 대해 물었습니다. 어떻게 제 삶에서 죄를 없앨 수 있을까요?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세상과 분리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성령 안에서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화에 관한 것인데, 당시 젊은이들이 한 질문이었습니다. 정말이지 한결같이 그랬습니다.
또 저는 캠퍼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열린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고, 또 다시 같은 주제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화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제 삶에서 죄를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은혜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랄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령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령의 인치심은 무엇인가요?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성령님이 제 삶에서 하시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요청을 받지 않습니다. 성화가 더 이상 대화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을 훔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마치 그것이 성령인 것처럼 금송아지 주위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성령의 거짓된 형태입니다. 이들은 성령을 이용하면서도 비난받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들을 비판하는 순간 분열을 조장하고 사랑이 없는 까다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베니 힌이 저를 두고 이렇게 말한 겁니다. “내 방식대로 할 수 있다면 성령의 기관총으로 그 자식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다.” 이들이 성령에 대해 말하는 그 어떤 것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면서 비난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은 계속해서 성령을 이용하고 있고, 그 결과 성령에 대해 합당하게 증언하는 사람들은 억압받고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열이 일어나고 좋게 들리지 않을 것이고 누군가가 불쾌해질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따라서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령은 금송아지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아니라 거짓 창조물인 우상입니다. 성령님을 모독하면서 춤추며 둘러싸고 있는 우상 말이죠.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개혁신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이른바 새로운 복음주의 물결 속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지 않고, 논의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강력한 성화 교리도 없고, 거룩함에 대한 뜨거운 열망도 없으며, 세상과 구별되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점점 더 세속화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복음만 알고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성령의 인치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적 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인의 거룩함, 성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겸손이 있습니다. 사람을 높이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운동을 한답시고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누군가를 높인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고 다른 사람들은 사라집니다. 교회 역사상 모든 시대 중에서 교만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왜일까요? 전 세계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교만한 사람들이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기 쉬운 시대입니다.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죠.
심지어는 성령에 대한 이단적인 견해마저 용인되고 있는데, 양태론(modalism)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전문적인 용어이지만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위격이 아니라 세 가지 양태로 나타나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시지만, 결코 삼위일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T. D. 제이크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벨리우스주의라고도 하는 양태론입니다. 제이크스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점, 성령관이 이단적이라는 점,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견해도 똑같이 이단적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를 성령 하나님께도 동일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제 마음에 걸렸고,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는데, 대략적인 그림만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령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데 있어 무엇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를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성령에 대한 무관심이 실용주의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성령님의 사역을 실용주의로 대체했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사 없이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육체로 마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모든 것을 육체로 이루려고 한다는 겁니다. 교만이 겸손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항상 성령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낮은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이 계신 곳에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습니다. 모든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은 그리스도이며,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지 않으면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육체가 높임을 받을 때 성령의 역사는 소멸됩니다.
지난 몇 년간 이 주제를 다루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신약성경이 성령님에 대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다뤘습니다. 지난 40년에 걸쳐서 우리는 분명히 그 모든 것을 다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주 동안에는 성령의 사역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전혀 감이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한 장에 집중할 겁니다. 여러분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만 살펴볼 겁니다. 로마서 8장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로마서 8장을 보시면 조금 답답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성경을 펴놓으시면 더 편하실 겁니다. 바로 시작하지는 않겠지만 성경을 펴놓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만 살펴볼 겁니다.
잠깐 8장을 살펴보는 게 어떨까요? 제가 왜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 이 로마서 8장을 선택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꽤 명백합니다. 2절에 성령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 2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나옵니다. 그리고 내려가면, 4절에 성령이 나옵니다. 5절에도 성령이 나옵니다. 6절에도 성령이 나옵니다. 9절에도 성령이 나옵니다. 11절에도 성령이 나옵니다. 13절에도 나옵니다. 이렇게 계속 나옵니다. 14절, 16절에도 나옵니다. 말하자면 성령 장입니다. 26절까지 쭉 내려가면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다시 한 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로마서 8장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을 통해서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역사에 대한 건전한 신학을 배울 수 있겠죠? 따라서 로마서 8장을 “성령 안에서의 삶"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장을 살펴보면서 정말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전체적인 개요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벌레의 눈으로 보는 세부적인 관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새의 눈으로 보는 전체적인 조망을 보겠습니다. 성령은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 아닙니다. 성령은 단순한 영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에너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고, 자신만의 본성과 인격이 있는 완전한 위격이십니다. 성경에 명확히 나와 있죠. 성령 하나님은 그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성령님은 그 어떤 면에서도 열등하지 않으시며,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성령님을 인격이 없는 물리력으로 생각하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님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지식의 깊이를 완전히 꿰뚫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지식은 하나님과 동등하며, 예수님과도 동등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특징적인 사랑과 동등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나오죠. 성령님은 하나님의 선택, 주권적인 선택을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1절을 보면 성령님은 신자에게 어떤 영적 능력과 어떤 영적 은사를 주실지 결정하십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말씀하십니다. 항상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름 부음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요한일서 2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교사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은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여기 로마서 8장에서도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령님은 명령하십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16장 6절부터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은 성령의 교제에 대해 말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의 인격을 나타냅니다. 성령님은 근심하실 수 있는 인격체이십니다. 사도행전 5장 3절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랬듯이 성령님을 속이려 하면 안 됩니다. “어찌하여 성령을 속이려 하느냐?” 또 성령님을 시험하려 하면 안 됩니다. 같은 장에 나오죠.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이사야 63장 10절에 따르면 성령님은 격노하실 수 있습니다. 또 성령님을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7장 51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성령을 거스르느냐?” 그리고 마가복음 3장과 마태복음 12장에 따르면 성령님을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을 보면 성령님을 소멸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님의 노력이 좌절되거나 방해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님이 인격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을 가진 사람처럼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행동하시고, 결정을 내리십니다.
성령님의 신성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한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더 많이 있지만 말이죠. 잠시 사도행전 5장으로 가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들은 성령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땅을 판 돈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췄습니다. 5장 3절을 보면 베드로가 주일에 교회에서 아나니아를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잘 들으십시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이제 4절 끝부분을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하나님은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의 신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절대적이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죠.
마태복음 28장 19절에는 삼위일체의 공식이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모두 성삼위일체의 동등한 구성원입니다. 분리된 구성원일 수 없습니다. 양태론은 터무니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아버지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아들의 모자를 쓰고, 그 다음에는 성령의 모자를 쓴다는 개념 말입니다. 양태론으로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 계시고,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성령님은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계십니다. 양태론자들에게는 이 장면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세 분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서는 영원하신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전지하십니다. 다시 요한복음 15장부터 16장, 또 14장으로 가 보면, 성령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며,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모든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보십시오. 성령님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영원하시고 전지하십니다. 또한 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얼마나 강하신가요? 하나님과 동등하게 강하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십니다. 창세기에 나오지 않습니까? 태초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 ‘토후’와 ‘보후’였습니다. 비어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는 더 놀라운 장면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잘 들으십시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다시 말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엘리온, 우주의 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 안에 온전히 거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님을 통해 임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들이 창조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편재하십니다. 시편 139편 7절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주의 영 앞에서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성령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십니다.
로마서 1장 4절을 보면 성령님은 성결의 영, 즉 거룩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 거룩, 거룩하십니다. 아버지도 거룩하시고, 아들도 거룩하시며, 성령도 거룩하십니다. 이사야 6장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거룩을 세 번 외치는 이유입니다.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서는 성령님을 영광의 영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은 영광의 하나님과 같으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영광의 영이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성령님은 살리는 영, 생명을 주시는 영이라고 불립니다. 성령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들이며, 성령님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예배받으셔야 하고, 하나님으로서 존경받으셔야 하며, 하나님으로서 경외받으셔야 하고, 하나님으로서 대우받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령님을 대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이름으로 농담하거나 조롱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호칭, 그러니까 성경에서 성령님을 어떻게 부르는지를 보면 좀더 이해가 되실 겁니다. 성령님은 여러 번 하나님이라고 불립니다. 아까 사도행전 5장 4절에서 읽어드렸죠. 또한 여러 번 주님이라고 불립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저를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겁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성령님은 주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주님이라고 불립니다. 모두 신성을 나타내죠.
또 다른 호칭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도 마찬가지죠. 누가복음 4장에서는 주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또 성령님은 그의 영, 즉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민수기 11장 29절에서 말이죠. 또한 사사기 3장 10절에서는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이사야 61장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라고 불리고, 마태복음 10장 20절에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라고 불리며, 고린도후서 3장 3절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성령님은 신성에 속한 모든 호칭으로 불리십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16장 7절에서 예수의 영이라고 불리고, 로마서 8장 9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영, 그의 아들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모두 성령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이렇게 지난 며칠 동안 이 주제를 생각하고 살펴볼수록, 성령님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현실에 제 마음이 더욱 아팠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성령님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스스로를 변호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여러분이 이 복되신 성령님을 조롱하는 일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합당하게 경배해야 합니다.
가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성령님께 기도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물론이죠,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께만 기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성령님께 기도하시고, 아들께 기도하세요. 세 분 모두에게 기도하세요. 어느 두 분께만 기도해도 됩니다. “성령님을 예배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엎드려 성령님을 예배하세요. 그리스도와 아버지께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거슬러 말하지 않을 것이고, 아들에 대해서도 그러실 겁니다. 그러니 성령님에 대해서도 거슬러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사실이 아닌 것을 돌리지 마시고, 그리스도께 사실이 아닌 것을 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도 사실이 아닌 것을 돌리지 마십시오. 정말이지 이렇게만 해도 교회의 위상이 달라질 겁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생각할 때는 창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구약을 보면 성령님이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6장 말씀을 기억하시죠?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와 같이 성령님은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 죄를 깨닫게 하려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또 구약을 보면 성령님이 특정한 사역을 위해 특정 사람들 안에 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구약에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성한 기적 없이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는 영, 생명을 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님이 바로 그 영이십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성령님은 창조주로 나타납니다. 믿는 자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또 사람들이 섬길 수 있게,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1장, 사사기 3장, 사사기 6장에 나오죠.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래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서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 말은 다윗을 거듭나게 하고 영적 생활을 위해 능력을 주시던 성령님이 사라지실 거라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 사역을 위해 사람들에게 임하여 특정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사역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구약에서 성령님의 사역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성경의 저자이시라는 점입니다. 베드로가 말했듯이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베드로후서 1장 21절을 보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약이 기록된 방식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여 저자가 되셨습니다. 이는 신약이 기록된 방식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이며, 여기서 숨결이라는 단어는 ‘프뉴마’입니다. 성경을 쓰신 분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성령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렇게 말씀하셨다는 구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로 쓰여졌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16절을 보면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은 성령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부터 16장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님의 주된 임무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예수님은 “진리의 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모든 성경이 그렇게 합니다. 심지어 구약도 말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이 중요한 겁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그러니까 구약에 기록된 자기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구약과 신약 전체를 통해서 저자이신 성령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계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령의 사역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겸손해지고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그리스도는 높임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진정한 성령의 사역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으실 때 계셨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내려오셨죠. 또한 그리스도가 사역을 시작하실 때 거기 계셨습니다.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시험받으실 때도 거기 계셨습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 시험을 통과하게 하셨다는 것 기억하시죠? 성령님은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말하는 기름 부음이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대해 전파하면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만일 너희가 내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부인한다면, 너희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나를 통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님이 가르치셨다는 것, 아십니까? 그만큼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침까지도 성령님께 양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34절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성령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고 하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기적과 메시지는 예수님을 통한 성령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완전히 동의하시긴 했지만 그것은 성령님을 통한 아버지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성령님의 능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사탄을 힘입어서 기적을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조차도 성령의 사역이었습니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지금부터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어떨까요? 아직 로마서 8장을 펴고 계신가요? 1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이처럼 성령의 사역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면 놀랍고도 충격적입니다. 참으로 광범위하죠. 아직 우리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이제 그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령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성령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하시나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창세기 6장 3절입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따라서 성령님은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부터 14에 따르면 성령님은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유효한 부르심입니다. 성령님은 실제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따라서 성령님은 세상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부르시며, 거듭나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 30절부터 32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죄인에게 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인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해하게 하신 후에 죄인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믿는 자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실까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고 높이십니다. 그뿐 아니라 믿는 자 안에 거하십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제 개인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마치 바람이 돛을 가득 채워서 배를 움직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 비유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치시고, 에베소서 1장에 따르면 영원히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또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십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따르면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죠. 여러 은사들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고 성경을 이해하도록 이끄시며,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모든 것을 알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육체의 소욕에 맞서 싸우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고 전도하게 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이토록 놀랍고 풍성한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한때 이것은 기독교 사역과 기독교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오늘날 진정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책을 쓴다면 기독교 서점에 진열될 수 있을까요? 만일 현존하는 모든 오류를 다룬다면 아마 수익은 고사하고 적자가 날 겁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성령을 모독하는 이 끔찍한 물결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교회로서, 그리고 믿는 자들로서 성령님이 받으실 만한 방식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경박하고 피상적이며 남용적인 접근 방식을 대체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님을 음지에서 끌어내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예배를 받지 못하는 삼위일체의 잊혀진 구성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모든 영적 은사의 사역, 제가 하는 모든 사역, 제가 하는 모든 일,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누군가가 하는 모든 일 중에서 어떤 효과나 영향력이 있거나,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있거나, 어떤 성공을 거두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무시하고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그런 미친 짓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자, 이제 로마서 8장을 살펴볼 준비가 된 것 같네요. 다음주에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에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참으로 생기를 되찾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복된 교회와 존귀한 성도님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베푸시니 감사합니다. 창조뿐만 아니라 거듭남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해 주셨고, 능력을 주셨으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광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영화롭게 되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천국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령님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은사를 발휘하게 하시며, 증인이 되게 하시고, 우리의 육체와 싸우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며, 우리를 구원의 날까지 보호하고 인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예배하고 높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모욕하는 작금의 행태에 깊이 슬퍼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님을 예배할 때 합당한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 참된 진리이신 성령님 안에서 온 힘을 다해 찬양과 순종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과 지금 이 순간에도 하고 계시는 일, 우리가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뵐 때까지 하실 모든 일,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변화될 때까지 하실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올려드리며,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신 교회, 생명을 주신 교회,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고 풍성하게 하시는 교회,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교회에서도 합당한 경배를 받으시길 원합니다. 이 모든 교회 안에서 성령님 역사하여 주셔서 높임을 받으시며 영광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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