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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이번 시리즈를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거부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출애굽기 32장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동안 산 아래에 있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흥미로운 변명을 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이 바친 금으로 만든 송아지를 발견했을 때, 백성들은 이런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금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일종의 신비한 체험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금송아지를 만든 일은 하나님의 본성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실은 그보다 훨씬 더한 짓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금송아지 주위에서 불경하고 부도덕하고 추악한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서로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날에만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고, 더 많은 백성이 죽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건의 요점은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나름대로 생각하는 그런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바로 소위 은사주의 운동에서 수년간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심각하게 왜곡하여 주권을 빼앗고 절대적 권위를 박탈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심각하게 왜곡하여 모든 영광을 축소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성령님을 왜곡하여 금송아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은사주의 운동에서의 성령님을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비교해 보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성령님은 금송아지입니다. 인간의 체험이라는 불 속에 자기들을 던졌더니 이런 성령님이 나왔다는 식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은사주의 운동만큼 복음의 대의, 하나님 나라의 대의, 그리고 성경적 진리의 대의에 해를 끼친 운동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지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죠.

무엇보다도 은사주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복음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복음주의의 주류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했고, 이에 복음주의자들은 “어서 오세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그렇게 은사주의 운동과 함께 트로이 목마가 들어왔고, 성 안에서 목마가 열리면서 군대가 침입해 수많은 것들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수많은 공격을 받으면서 타락하게 되었고, 분별력이 무뎌졌으며, 오류를 드러내려는 의지 또한 꺾이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문자 그대로 온갖 종류의 오류와 이러한 오류들을 주도하는 뻔뻔한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자기 선전가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뻔뻔한 자기중심주의는 주류 교회로 흘러들어와 심지어 이 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조차 이러한 자기 선전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예배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예배와 가장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열광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음악에 예배의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마저도 성령님이 아닌 왜곡된 금송아지에게 바쳐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성경적인 기도 교리를 심각하게 오염시켰습니다. 앞으로 몇 주간 주일 저녁에 은사주의 운동에서 기도 교리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다룰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개념을 왜곡해서 믿음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존재하게 하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사주의로 인해 그야말로 온갖 형태의 비성경적 가르침이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고, 동시에 성경적 진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비난받고 있습니다.

옛날이었다면 은사주의 운동은 이단으로 낙인찍혔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들이 용인의 기준을 정하고, 미디어를 장악해서는 온갖 일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진실된 형태의 기독교라고 주장합니다. 대규모로 군중을 모아서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축복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또한 자신들을 거부하는 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위험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이 도리어 우리가 성령을 모독한다고 비난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일이라고 했지만, 은사주의자들은 사탄의 일을 성령의 사역이라고 합니다. 은사주의 운동만큼 성령님을 왜곡한 사례도 없습니다. 특히 공개적인 측면, 미디어를 통한 측면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성령님을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스스로를 변호하실 수 있고, 심판이 언제 내려질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선언되고 있으니 우리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소위 성령님이 행하셨다는 기적들, 성령님이 주셨다는 환상들, 영상으로 과거의 일과 죄가 보인다는 사람들, 성령님이 주셨다는 예언들, 천국과 지옥 여행, 다양한 형태의 신성한 계시들, 신성한 계시라는 3D 꿈들, 이 모든 것들이 이 운동 전반에 걸쳐 있고, 마치 분수에서 물이 흘러넘치듯 더 넓은 복음주의 세계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심각한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성령님은 이런 것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죠.

신약성경에 이 주제에 관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기 전에 히브리서 10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에 그 단어가 있는데, 처음에는 중요한 단어들 뒤에 붙은 작은 단어처럼 보여서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9절 말씀의 내용은 매우 심각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신을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여기서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서 받는 형벌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몇 주 후에 지옥에 대해서도 설교할 예정입니다. 지옥에서 주어지는 형벌은 그 정도가 모두 다를 겁니다. 지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옥에는 무거운 형벌, 더 무거운 형벌, 더 더 무거운 형벌이 있을 겁니다. 지옥에서 주어지는 형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가장 무거운 형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 사람들에게 내려질 겁니다. 다시 말해서 새 언약을 성취하고 구원을 제공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욕되게 하고, 짓밟고,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면 가장 뜨거운 지옥에 가게 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전혀 듣지 못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복음을 듣고, 알고, 이해하고도 거부한 사람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무서운 구절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라는 부분에는 주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자, 모독하는 자에게도 동일하게 엄중한 심판이 선언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하는 것은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난주 히브리서를 통해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 가운데 행하고 말씀하신 모든 일에 능력을 주셨고, 심지어 죽음의 과정에서도 능력을 주시고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십자가 이후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시고,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이심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성령이 나를 가리킬 것이다. 그가 너희를 나에게로 인도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따라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여러분은 성령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폄하함으로써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성령님이 ‘은혜의 성령’으로 불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성령님이 은혜의 선물을 주고 싶어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했다고 합시다. 이 ‘욕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에뉴브리조'(enubrizō)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이 되는 동사는 '휴브리조'(hubrizō)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단어를 알고 계실 겁니다. 적어도 들어본 적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휘브리조'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있는데 바로 '휴브리스'(hubris)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참 좋은 단어입니다. ‘휴브리스’는 '뻔뻔함'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무례하다는 뜻이죠. 경멸하는 것, 적대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면 알 수 있듯이, ‘휴브리조’는 ‘격분시키다, 모욕하다’는 뜻입니다. 가장 뜨거운 지옥은 성령님을 모욕한 사람들을 위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단어는 ‘휴브리조’가 아닙니다. '휴브리조'는 격분시키거나 모욕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사용된 단어는 ‘에뉴브리조’입니다. 헬라어 동사 앞에 전치사가 붙으면 단어의 의미가 강조됩니다. 전치사의 기능이죠.

따라서 ‘에뉴브리조’는 아주 극심하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냥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극심하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극심하게 모욕하려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복음을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린 사람은 누구나 성령님을 상대로 극심한 모욕과 뻔뻔스러운 행동을 저지른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가장 뜨거운 지옥에 가게 될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 아버지를 거스르는 무례하고 모욕적인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음으로써 아들에게도 같은 짓을 저질렀고, 또한 성령님의 말씀을 무례하게 모욕하고 정죄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겁니다. 아주 극심한 모욕입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짓밟는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분명한 경고입니다. 성령님을 모욕하는 자에게 내려질 엄중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의 문맥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성령님을 모욕하는 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 자체도 복되고 성결하신 성령님께 합당하게 드려야 할 반응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늘 성령님을 상대로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경배와 영광과 존귀와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마땅한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성령님 그분 자신으로, 그리고 행하신 모든 일로 항상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많은 이들에게 잊혀지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 성령님이 행하시는 것들을 올바로 알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자신이 돌보시는 이들로부터 사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로 행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그날에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인치시는 바로 그 분으로서 경배와 예배를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로마서 8장에 있습니다. 제가 모두 읽어드렸죠. 성령님의 은혜롭고 강력한 도움, 즉 은혜의 성령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입니다. 누가 감히 성령님을 모욕한단 말입니까? 그것도 무례하고 뻔뻔스럽게 말이죠.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그렇게 합니다.

이제 우리가 기억하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구절 하나씩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은 위대한 확신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으로 8장의 기조가 정해집니다. 우리는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결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8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끝납니다. 34절로 넘어가면 “누가 정죄하리요?”라는 마지막 질문이 나오죠. 글쎄요, 누가 정죄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8장 맨 끝 절에 이르기까지 장황하게 언급된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8장이 우리가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8장은 우리를 정죄할 만한 모든 가능한 것을 다 제시하고는, 그 모든 것을 다 제거하는 식으로 끝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8장은 1절부터 39절까지 정죄함이 없다는 것에 대한 확증입니다.

따라서 모든 믿는 자들은 이 로마서 8장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장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8장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영광스러운 약속입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합니다. 8장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곳이며,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할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셔야 한다는 조건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것이면서 성령님의 적용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아버지께서 전체 계획을 세우셨고, 아들이 이루셨고, 성령이 적용하십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령께서 나를 재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장엄한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8장은 우리의 구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데, 우리를 정죄받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하고 우리가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게 하는 이 모든 일을 성령님이 행하신다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8장을 이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키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죠? 2절과 3절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망, 죄와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는 사실을 살펴볼 겁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지금 여기에서 성령님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율법이 목적한 바를 이루게 하십니다. 셋째로, 성령께서 우리를 언젠가 영생의 존재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양자됨을 확증하시며, 우리의 영광을 보증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받지 않는 상태에 놓이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역설적인 것은 그 모든 미친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며 기뻐하는 이들은 대부분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필연적으로 거듭남이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인간 내면에 선행적 은혜가 충분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각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아르미니우스적 신학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의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영광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된답니다. 우리가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도 절대적이고 영원한 사실이 아니랍니다. 단지 조건적이랍니다. 우리가 그 조건을 충족하면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있게 되지만,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바로 정죄를 받게 된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에 대해 잘못된 것들을 주장하는 자들은 신학적인 부분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성령님의 역사가 영원하고 무궁하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해방시키시고, 영생을 주시고, 우리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영원히 변화시켜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드시고, 언젠가 우리를 영생으로 일으키시는 역사가 말이죠. 그러는 동안에도, 성령님은 우리에게 승리하게 하는 힘을 주시고, 우리의 양자됨이 영원한 것임을 확증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증해주시고,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중보하심으로써 그 영광을 지켜주시고,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우리의 구원이 영원하도록 보장하십니다.

따라서 만일 은사주의가 말하는 성령을 사려고 한다면, 로마서 8장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결코 그런 성령님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참된 성령님을 알게 됩니다. 금송아지가 아닌 참된 성령님입니다. 로마서 8장이야말로 성령님의 실제 사역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신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여기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단어는 도덕적 규정이나 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원리, 원칙, 실재, 그리고 지배적 능력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곧 "생명의 성령의 능력,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너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사망과 궁극적으로 영원한 사망을 초래하는 죄의 영역에서 건짐을 받고 생명의 성령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3절에서 말하듯이 율법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육신이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셔야 했던 겁니다. 어떻게 하셨을까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희생제물로 삼아 그 육신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는 정죄를 받게 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율법이 죄인을 정죄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목적이고,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죄를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정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모든 자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고 성령께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적 속죄라는 위대한 교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의가 주어진다는 의의 전가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셨습니다.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육신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할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죽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죄의 권세를 죽이십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용서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았습니다. 죽은 자에서 살아있는 자, 영적으로 죽은 자에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 영원히 죽은 자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성령께서 적용하신 일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의 사역의 산물입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이제 두 번째 측면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말씀드릴 것이 많네요. 둘째로, 그 결과로 일어나는 일은 이렇습니다. 곧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잘 새겨 들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정말 아주 근본적이고 매우 중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4절은 이 모든 일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제 살아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죄의 대가가 치러졌고, 사망의 요구가 충족되었으며, 의롭다고 인정되었고, 진노가 만족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살아있게 되었고, 거듭났고, 생명을 얻었고, 중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정죄를 받았지만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매우 극적인 변화로서 전가된 의를 말합니다. 아주 극적인 변화이며 거듭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여된 의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가된 의와 부여된 의는 둘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닙니다.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율법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고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으며,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고, 우리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결과로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법적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선언도 아닙니다. 단지 신분의 변화가 아닙니다. 어떤 신성한 범주에서 다른 신성한 범주로 옮겨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떤 범주에 속할 뿐만 아니라, 제가 법적 혹은 법률적이라고 말하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경험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구원받는 것에 대해, 문자 그대로 우리가 옮겨지고, 변화되는 모든 방식에 대한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율법의 의, 곧 율법의 의는 하나님의 법에 반영된 하나님의 의일 뿐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의 율법은 단지 하나님 자신의 의로운 본성이 반영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계시로 나타난 옳고 그름은 그 자체로 완전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율법의 의가 어떻게 우리 안에서 성취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신 생명의 기적이 있고 나서부터는 우리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장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너희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모두 타락했고, 아버지 마귀가 하는 일을 합니다. 사탄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율법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두 번째 위대한 사역입니다. 성령님의 두 번째 위대한 사역입니다. 여러분은 법적으로 죄의 결과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실제로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그렇죠?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무엇으로 살기 위해 다시 살아났습니까? 예전과 같은 삶을 다시 살려고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5장 17절이죠. 따라서 여러분은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 새로움이 어떻게 정의되나요? 4절로 돌아가 봅시다. 어떻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집니까?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우리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자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우리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결합된 표현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4절 하반절은 실제 사실입니다. 명령이나 요구가 아닌 실제 사실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행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실제로 다른 존재입니다. 저는 40년 동안 이 사실을 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따라 행한다면 기독교인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끔씩 교회에 나온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의 삶이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보인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책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12절과 13절에 가면 책임이 나옵니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성화에도 따르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의 믿음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성화도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우리의 순종과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의해 쓰여졌지만 기록한 사람의 의지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인내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항상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위대한 모든 진리에는 항상 인간의 책임이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씀에서는 “너희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성령을 따라 ‘걷는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걷는다는 말은 일상적인 방향이나 행위, 성향, 경향을 묘사하는 아주 오래된 표현입니다. 사실이라는 겁니다. 실제 그대로의 사실입니다.

5절은 이 사실을 확장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더 확장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는 이유는 영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행동도 다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건 요구도 아니고 명령도 아니고 실제 사실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10절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삶과 방향, 성향, 경향, 행위, 감정은 필연적으로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이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미덕, 그러니까 믿는 자가 자신의 삶에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그런 희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자면 이렇게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살게 된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를 한 사람, 참된 신자가 처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이유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나아왔을 때 무엇을 원하셨나요? 무엇을 찾고 있었나요? 첫째, 영원한 지옥에서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죠? 둘째, 죄에서 해방되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팔복에 나오는 태도, 그러니까 복 있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고,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며, 자신들의 비참함 때문에 슬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설교자가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면, 행복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올 겁니다. “예수님, 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말이죠. 만일 여러분이 아프거나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재정적으로 어렵거나 외로운데 설교자가 “여러분 마음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실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설교한다면, 외롭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외롭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달려올 것입니다. 각자가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은 개인적인 만족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군가에게 최고의 기쁨은 건강해지는 겁니다. 또는 행복해지는 겁니다. 또는 완벽한 남자와 결혼하는 겁니다. 아니면 그토록 원하던 집을 갖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승진하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을 줄 수 있다면, 휴스턴 경기장을 사람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모두 거기로 달려 나올 것이니까요. 온갖 찬양을 부르면서 예수님께 달려가면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모든 것을 주시기를 바랄 겁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찾습니다. 거룩을 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큰 차이입니다. 아주 커다란 차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거룩을 구합니다. 죄의 권세와 형벌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이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행복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의 길로 가야 그곳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구주를 찾고 의를 추구하도록 강요받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을 받으신 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십니다.

죄인이 죄를 모두 용서받고 하나님의 법정, 하나님의 순수한 공의의 법정을 떠난다고 해서 율법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끝난 것이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핵심을 관통합니다. 모든 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핵심을 관통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 나라 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법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써 점진적으로 거룩해지고 율법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는 이 점진적인 성화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돕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죠? 고린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주의 영광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발견합니까? 어디에서 드러납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영광의 한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그렇게 변화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도구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 때,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과 하나님과 성령님을 보게 되며, 거기에 계시된 영광을 보면서, 말 그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지면서 영광의 한 수준에서 그 다음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고 또 올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점진적인 성화이자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성화되고 죄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의롭다 하심, 즉 칭의의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칭의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성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성화되며, 그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룹니다. 부담스러운 짐이 아닙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했나요? 시편 119편에서 “내가 주의 율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주의 법은 나의 기쁨이니이다”라고 175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합니다. 마지막 구절에 가서야 다윗은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향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갈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큰 그림에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명령들, 곧 옳고 참되고 거룩하고 선한 명령들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교제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직관적으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직관적으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매일 저녁 서늘한 시간에 아담과 함께 거니시며 대화하셨습니다. 무엇에 관한 대화였을까요? 제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그날 아침 깨어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아담은 그 존재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의 근원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사랑의 명령들은 아담이 그 명령에 순종하여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담이 타락했습니다. 타락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원칙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이제 율법은 부정적이고, 제한하고, 금지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가져옵니다. 복된 미래가 아닌 저주가 가득한 미래를 떠오르게 합니다. 동일한 하나님이 계시하신 동일한 율법, 즉 에덴동산에서는 사랑, 교제, 기쁨, 소망, 복을 주었던 율법이, 타락 이후에는 부정적이고, 금지하고, 제한하고,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정죄하고, 죄인으로 만들고, 평화도 없고, 소망도 없고, 심판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이 왔습니다. 동일한 명령,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과 정확히 같은 명령, 하나님의 본성을 반영하여 우리를 저주하고 정죄했던 명령, 바로 그 명령이 이제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이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기쁨을 명확히 제시하고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복되도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한다면, 그 관계에서 기쁨을 원하고 축복을 원하고 소망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옳고 선하며 거룩한 것이라고 계시하신 일입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도와주시는 신성한 조력자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은혜가 주어졌다.” 우리가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은 아주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아주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교회 공동체로서뿐만 아니라 우리 개개인도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도록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도와주고 계십니다. 거듭난 후에는 율법을 이루려는 것이 우리의 성향이자 경향이 되고, 우리가 사랑하고 원하는 일이 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는 우리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확신도 우리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쁨 역시 우리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려움과 근심과 의심이 없는 것도 우리의 순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새롭게 태어나 우리 안에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선물입니다.

다시 5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육신을 따르면서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과 성령님을 따르면서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로 나뉩니다. 물론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단순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계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말씀해주신 것인데, 바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입니다. 어쩌면 조금 지나친 일반화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바로 육신을 따르는 자들과 성령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 육신이 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삽니다. 요한일서에 나와 있죠. 육신을 따르는 자는 이런 것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아비를 따르는 사람들인데, 그 아비는 마귀입니다. 이들은 마귀처럼 거짓말쟁이이고, 실제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속으로는 마귀처럼 살인자입니다. 이들은 마귀의 정욕을 따릅니다. 이들이 바로 육신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성령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을 인종으로 나누지 않으십니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을 성별로 나누지 않으십니다. 물론 성적 취향에 따라서는 나누십니다. 왜냐하면 성적 취향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문화, 교육, 인종, 성별, 경제적 지위, 사회적 지위를 따라 사람들을 나누지 않으십니다. 이런 것들 중에서 그 어느 것으로도 나누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와 성령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성령님의 일,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과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 안에서 행하고, 살고,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유일한 차이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구별도 하지 않습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은 오래 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중 지배적인 어느 한 방식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어느 쪽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과 행동 방식이 결정된다.” 그리고 위대한 신학자 호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일하게 결정적인 인격의 시금석은 생각의 성향, 감정의 성향, 추구하는 성향이다.” 생각의 성향, 감정의 성향, 추구하는 성향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5절을 한번 더 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살펴볼 겁니다. 5절에 ‘생각’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6절과 7절에도 나옵니다. 6절에서 두 번 나옵니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입니다. 행함을 만들어 내는 것은 생각입니다. 행함은 곧 행위입니다. ‘따르는’이란 ‘본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육신을 따라 행한다면 본성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회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고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본성적으로 성령님을 따른다면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고 성령의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바울의 사고의 흐름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기를 원하고 바라게 된 이유는, 회심하기 전에는 없었던 소망이 우리 안에서 샘솟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며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선물입니까?

성령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실제로 행하시는 일들로 인해 영광을 돌려야지,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실 끔찍한 일들을 성령의 역사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을 모욕하는 죄를 결코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요 생명입니다. 매주 우리 앞에 놓여진 진리가 얼마나 풍성한지요. 정말이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갈망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 그 진리를 곱씹고 묵상할 때마다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진리는 우리를 인도하고, 찬양하며, 경배하며, 찬송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이 세대로부터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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