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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제하러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합니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성령님의 영향을 받는 신자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소 짧다면 짧은 이번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 가장 간과되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역사는 아주 많이 강조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성과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모든 생애까지 확실하게 강조되죠. 이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동등하심을 알기에, 저는 여러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온전히 예배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참된 역사가 무엇인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단순히 성령님께 충분히 집중하거나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닙니다. 물론 성령님이 동등한 예배를 받지 못하고 계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성령님의 이름에 합당하지 못한 일들이 성령님께 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모독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부 하나님, 성자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은 꺼리지만 성령님을 향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기독교 텔레비전을 통해서 성령에 대한 신학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성령을 일종의 힘으로 여기게 될 겁니다. 사람을 넘어뜨리고 바닥에 쓰러뜨려서 잠시 기절해 누워있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힘 말이죠. 이상하게도 그 힘은 손을 휘두르거나 누군가의 머리를 누르면 작동합니다. 또 그 힘이 무엇이든, 그 영이 무엇이든 간에 무의미한 헛소리를 횡설수설 중얼거리게 만듭니다. 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리게 하고, 눈을 뒤집고, 음악에 맞춰 몸을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령님에 대한 결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란, 실제로 무엇이든 간에, 몸과 입과 마음의 통제력을 잃게 하고, 기괴한 감정, 비이성적인 행동에 빠지게 하는 힘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님이 아닙니다.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령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걸까요? 암시의 힘, 집단적 기대의 힘, 조작의 힘입니다. 성령님은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자신을 욕되게 하고, 자신이 기록하신 성경을 왜곡하는 곳에 임하셔서 그런 일들을 일으키실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그릇된 신학과 거짓 교사들을 인정해 주시기 위해서는 임하시고, 성령님과 그분의 말씀이 모두 높임을 받는 곳에는 임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제 생각에는 만일 텔레비전이나 집회에서 보는 그런 현상이 정말로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면,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는 항상 쓰러져 있으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어야 할 겁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분의 말씀을 높이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은 무엇일까요? 실제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성령님이 권능으로 이루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언어학적으로 도움을 좀 드리겠습니다. 구약에서 성령님을 나타내는 단어는 ‘루아흐’이고, 신약에서는 ‘프뉴마’입니다. 둘 다 의성어죠. 프뉴마와 루아흐는 모두 발음 자체에 공기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을 뜻하는 이 단어들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움직임, 힘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에서 영을 뜻하는 단어인 루아흐의 근본적인 의미는 능력, 에너지, 힘, 생명입니다. 상당히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 중의 1/3은 하나님, 곧 하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루아흐’와 신약성경의 헬라어 단어 ‘프뉴마’의 강조점은 비물질성에 있지 않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성령님이 비물질적 존재임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이 단어가 힘, 에너지,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루아흐 야훼,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활동적인 힘을 말하는 겁니다.

미가 3장 8절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가 3장 8절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여호와의 영, 즉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능력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영’은 비물질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Holy Ghost, 성신이라는 옛 번역이 매우 부적절한 이유입니다. 비물질적인 특성만 강조되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줍니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은 ‘영’이고, 비물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활동력을 강조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야말로 강력합니다. 어떤 저자는 이렇게 쓰기도 했습니다. “여호와의 영, 루아흐는 하나님의 폭발적인 능력이며, 창조적이든 파괴적이든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저항할 수 없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위대하고 무한하신 것처럼 위대하고 무한하며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에너지,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영, 즉 삼위일체의 제3위격을 통해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하늘의 만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시편 33편 6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주도 없었고, 궤도를 도는 천체들로 가득 찬 우주는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 루아흐의 능력입니다. 사사기 3장과 14장에 나오는 옷니엘과 삼손 같은 사사들에게 임하신 능력입니다. 여호와의 루아흐는 선지자들을 붙잡고 들어 올리고 어딘가로 데려가서 다른 곳에 내려놓는 능력입니다. 에스겔 3장, 에스겔 11장, 열왕기상 18장에서 볼 수 있죠. 그만큼 강력한 힘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대면하고 힙입는 사람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경험합니다. 성령님은 자신의 능력을 창조에만 국한하지 않으십니다. 파괴에만 국한하지도 않으십니다. 성경에서 이 두 가지 증거를 모두 볼 수 있죠. 우리 믿는 자들은 이러한 물질적 표현을 뛰어넘어, 즉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 창조의 능력, 세상에서 특정한 사람들이 초자연적 일을 하게 하는 능력, 선지자들을 들어 올려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능력 등을 넘어서, 루아흐의 위대한 창조적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점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중얼거리게 하거나, 이성을 잃는 어떤 감정적 충격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 능력의 예시가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다윗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끔찍한 죄였죠. 밧세바라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여인을 탐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을 저질렀고, 밧세바를 완전히 차지하고자 충성스러운 용사였던 밧세바의 남편을 맹렬한 전투의 한복판에 두어 적의 손에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과 간음이라는 그야말로 끔찍한 죄를 저지른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자신의 마음을 쏟아냅니다.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자신을 씻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죄책감과 두려움의 고통을 없애달라고 간청합니다. 시편 51편 11절에서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루아흐’를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여기서 다윗은 구원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음 구절에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잃은 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걸리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울, 사울입니다. 다윗은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 이전의 왕은 사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사울이었기 때문에 왕의 역사는 아주 짧았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셨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 성령님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임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 없이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님 없이는 아무도 성화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성령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성경 저자들을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때도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신약에서만큼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신약에서만큼 완전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때에도 성령님은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고 아무도 성화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이러한 일반적인 사역 외에도, 성령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임하셨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들 위에 머무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일어난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성령님의 임재를 유지시켜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치를 위한 능력, 영적 지도력을 위한 능력, 영적 지혜를 위한 능력을 말이죠.

신약에서는 성령님의 사역이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물론 성령님은 너희와 함께 계신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고, 믿지 않았을 것이며,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았을 것이고, 성경을 이해하도록 깨우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셨지만, 이제는 너희 속에 계실 것이다.” 이것은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입니다. 이제는 모든 믿는 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왕이고, 모두 제사장이며, 모두 선지자입니다, 그렇죠? 우리에게는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왕이요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게 하는 기름 부음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 능력을 주어 하나님 나라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고, 제사장이 그랬듯이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며, 선지자가 그랬듯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설교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이 성령님의 충만한 사역이며,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셔서 맡기신 모든 사역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 우리 모두는 성령님을 마시게 되는데, 이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영구적으로 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 이전의 사람들과도 함께하셨지만, 이제는 우리 속에 계십니다. 충만하게, 완전히, 풍성히 거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가요? 물질적 창조는 아닙니다. 물질 세계는 이미 창조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창조 사역은 이제 영적 창조입니다. 영적 생명을 창조하시고, 회심과 중생을 일으키십니다. 성화시키시고, 준비시키시고, 은사를 주시고, 부르시며, 열매를 맺게 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이 능력은 앞서 말씀드린 폭발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성령님이 나타내시는 능력, 여러분의 삶 속에서 행하시는 능력은 그야말로 강력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면 성령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하나님의 진리에 눈멀어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뼛속까지 완전히 부패해 있었습니다. 완전히 죽어 있었고, 걸어다니는 시체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이전의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진단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죽어 있던 자에게 강력한 능력이 임하여 생명을 주고 성화의 능력으로 부패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동일한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여 천국에서 누릴 영생에 적합하게 만들 것입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능력 아닙니까?

성령님은 또한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성경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숨결로 된 것, 즉 하나님의 프뉴마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이 저자이시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쓴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고 해봅시다. 자신의 생각, 성향,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흥미를 느끼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이 오셔서 그 사람의 마음에서 폭발을 일으키십니다. 성령님이 쓰게 하려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모든 생각, 모든 기대와 야망과 욕망을 압도하는 폭발적인 힘이며, 그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의 영이 기록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만을 기록해야 한다는 완전히 압도적인 깨달음만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무지를 압도하고 진리로 인도하는 능력입니다. 편견을 압도하는 능력, 성향을 압도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것은 성령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은 인간 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것이고, 저자들이 원래 기록하고 싶어했던 것은 성령님의 압도적인 강력한 능력에 의해 작아지고 끝내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마지막 말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사무엘하 23장 2절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성령이 말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압도하고, 성령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것을 정확히 기록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의 영감에서 이루어진 놀랍고도 강력한 역사가, 성령님이 그 속에 거하시는 믿는 자의 삶에서 동일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이죠. 성령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에, 믿는 자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생각과 의지를 갖고 계십니다. 이따가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겁니다. 또한 성령님은 그 목적과 뜻의 성취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말 그대로 날려버리기 위해 일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굉장히 강력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거나 이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뒤틀리지 않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전쟁 중에 있다는 것, 우리의 육신이 성령의 역사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유혹과 싸울 때죠.

신약에서는 성령님이 더 완전하게 계시됩니다. 구약에는 전체적인 그림이 없었지만, 신약에는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성령님의 온전한 사역이 계시됩니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계시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만 말이죠.

왜 사람들은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을 성령님께 돌리는 걸까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면 성령님이 여러분의 선생님이 되십니다. 성령님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따라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의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의 무지를 넘어서십니다. 편견을 넘어서십니다. 성향을 넘어서십니다. 성령님은 여호와의 루아흐, 여호와의 영이십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구원은 아버지께서 시작하시고, 아들이 확증하시며, 성령이 실행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성화되게 하십니다.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로, 또 그 다음 단계로 변화되게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오죠. 언젠가 성령님은 우리 모두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11절에 의하면, 잠시 후에 살펴보겠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시고 최종적인 영광의 형태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삼위일체 안에서 능력의 위격으로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며, 언젠가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롭고 맹렬하며 폭발적인 능력에 대한 놀랍고 풍성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재창조하고, 의로움을 향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롭게 하는 능력 말이죠.

따라서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에는, 바보처럼 정신없이 땅바닥을 구르거나, 중얼중얼 무의미한 말을 쏟아내거나, 황홀경에 빠지거나 격하게 감정을 분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는 성령님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님의 참된 사역을 조롱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이 여호와의 루아흐로 행하실 때, 사람들은 구원받고, 성화되며, 연합되고, 능력을 받으며, 은사를 받고, 예배하고 섬기고 성경에 순종하기 위한 능력이 더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질서있게 행동하며 말씀에 충실할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드디어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서론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그레이스 투데이>에서 언급된 책인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읽어보시면 은사주의 운동에 대해서 이번 시리즈에서 다루지 않는 부분까지도 많이 알게 되실 겁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다루는 내용을 포함해서 개정판을 낼 수도 있겠지만, 단지 예시들만 바꾸는 것뿐이고 신학은 바꾸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읽으시면 됩니다.

로마서 8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성령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몇 부분으로 나눠 보자면,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죠, 1장, 2장, 3장에서는 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유죄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3장, 4장, 5장, 6장, 7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다룹니다. 첫 부분에서 설명된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하죠. 그리고 이제 성령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하나님 부분을 보았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놀랍고 은혜로운 공급을 보았으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확증하신 구속의 사역을 실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보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 없이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듯이, 성령님이 강력한 능력으로 부패한 우리를 압도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복음, 좋은 소식을 요약한 것입니다. 8장 끝부분에 다시 나옵니다. 모두 이 정죄함이 없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죠.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그리고 나서 가능성과 선택지,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들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영구적으로 정죄함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4장, 5장, 6장, 7장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1장, 2장, 3장의 정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합니다. 우리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이것이 우리 안에서 실행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었을까요? 답은 성령님, 성령님입니다.

이제부터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이 구원받은 상태, 이 정죄함이 없는 상태로 만드시는 일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첫번째 사역은 2절과 3절에 나와 있습니다. 죽어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를 살리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법”은 원리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패러다임, 지배력, 영역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상태로 살았습니다. 죄와 사망의 지배적인 원리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한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생명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첫 번째 사역입니다. 바로 중생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 다시 태어남,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해진 이유는 3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모든 형벌을 완전히 치르심으로써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할 수 있지만, 죄를 정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신 인간의 육신으로 죽으심으로써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3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받는 겁니다. 하지만 저절로 받게 되거나 인간의 의지로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둘째입니다.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4절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죠, 3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제 정말 4절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부터 잘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 삶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로는 말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왜 거듭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까? 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될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4절에서 말하듯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지만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전혀 불가능한 이야깁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목적절입니다. 여러분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유는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은 영적으로 실제적인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행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행합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영어 성경에서는 걷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육신을 따라 걷지 않고 영을 따라 걷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일상적인 행동은 여러분 안에 있는 능력, 에너지, 강력한 힘인 성령님과 일치합니다. 능력이신 성령님은 문자 그대로 여러분의 영적 죽음의 상태에 폭발을 일으키심으로 생명을 주셨고, 이제 그 동일한 능력, 그 압도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성령님의 동일한 능력이 여러분을 이끄셔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본성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의지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사가 바뀌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적인 변화입니다.

이제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습니다. 오직 두 부류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을 문화, 인종, 교육, 성별, 사회적 계층, 돈으로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두 부류만을 인정하십니다. 육신을 따라 걷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비신자와 신자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거듭난 사람입니다. 걸어다니는 죽은 자와 걸어다니는 산 자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시점에서 사도 바울은 타락의 병리학, 부패의 병리학을 깊이 탐구합니다. 보통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죄와 타락에 대해 논의해야 할 때면 로마서 3장으로 가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모든 구약 성경 말씀을 살펴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등을 말이죠. 로마서 3장 10절부터 20절까지에 모두 나열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타락에 대한 매우 강력한 묘사입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 묘사만큼 강력하지는 않습니다. 8장 4절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가장 통찰력 있고 병리학적인 묘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글 중에서도 말이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은 영을 따라 걷지 않고 육신을 따라 걷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행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5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절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거듭나지 않은 자의 상태에 대한 실질적인 병리학적 진단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 행합니다. 죽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태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성령님의 역사로 여러분은 생명을 받았고 지속적으로 성화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을 때 일어난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지속적인 성화 사역이란,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님이 여러분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움직이셔서 성령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여러분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성령 안에서 걷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 문자 그대로 영의 일, 성령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과 성화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육신을 따라 행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이들은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명과 평안을 누립니다. 이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는 능력과 그 이후의 성화 사역에서 주어집니다. 갑자기 여러분은 성경을 사랑하게 되고,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며, 성경을 갈망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원리는 간단합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어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타락한 인간성에 의해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일을 싫어합니다. 겉으로는 이러한 증오심이 잘 드러나지 않죠.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증오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혀 이룰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도움이 될 것 같네요. 5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이 ‘생각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프흐로네오(phroneō)’입니다. '~에 기울어지다', '~로 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명사형은 ‘프흐렌(phrēn)’입니다. 때로 ‘프흐렌'은 모든 정신적 감정과 정신적 능력이 자리한 곳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감정이나 의지, 또는 감정과 의지가 결합된 모든 형태의 정신적 활동을 가리킵니다.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마음'을 뜻하는 단어는 ‘누스(nous)'이며, 이는 고린도전서 2장 16절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에서 이 마음이 바로 누스입니다. 따라서 프흐렌은 마음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성향'을 뜻합니다. '기울어짐'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가는 방향을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제 생각에는 ‘의도적이고 계획된 마음가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통제를 받는 의도적이고 계획된 마음가짐에 의해 지배됩니다. 육신이란 무엇일까요? 육신은 단순히 물리적인 몸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만지고 볼 수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육신은 타락한 인간성입니다. 단지 물리적인 몸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고하는 방식’으로 몸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며, 여러분의 힘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을 고칠 수 없습니다. 교육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교육이 해답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고칠 수 없습니다. 육신은 우리를 조종하는 타락하고 부패한 내적 힘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육신을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육신의 애정, 육신을 신뢰하는 것, 육신의 행위, 육신의 욕망에 대해 말합니다. 또한 육신의 종교, 육신의 기도, 육신을 따른 예배, 육신의 신, 육신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들의 타락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걸어다니는 죽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부패한 사람입니다. 요한이 말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합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합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깁니다. 그에 따른 형벌은 무엇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또 다른 병리학이 있습니다. 5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성령을 따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프흐로네오’가 나오는데,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6절입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병리학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으며, 기꺼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합니다. 성령으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에녹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녹은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했을까요? 에녹은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정말로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에녹을 하늘로 데려가신 겁니다. 알려드릴 것이 또 있습니다. 에녹은 365년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 그리스도인으로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리스도인이 된 지 12년 되었는데 정말 쉽지 않네요.”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에녹은 완벽한 세상에서 살았잖아요.” 정말 그런가요? 에녹 이후 두 세대 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온 땅을 물로 덮으셨습니다. 에녹은 어떻게 365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던 어느 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데려가겠다. 계속 걸어가자.” 그렇게 에녹은 하늘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 바에 순종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갑자기 우리에게 새로운 성향, 새로운 기질, 새로운 방향, 새로운 통제력이 생겼는데,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성경의 바로 그 저자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단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살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살고 계십니다. 따라서 5절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영의 일,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 성령의 일이란 성령님께 소중한 것들, 즉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경에 계시된 일들이죠. 우리에게는 새로운 통제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의 능력,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6절에서 말하듯이 성령의 능력 아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생명과 평안의 세계, 생명과 평안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성령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육신은 오직 사망일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4절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을 죽은 행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6절입니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영적 생명을 받았고 이제 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단절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과의 달콤한 교제,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끝없는 자비,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 영원한 기쁨,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내적 확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순종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진리로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완벽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육신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르지 않지만, 육신은 우리를 따라다니며 매달려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우리에게 붙어있는 사망의 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임재로 그 힘은 크게 약해졌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더 이상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7절에 나오는 육신의 생각과는 달리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하고,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심지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것은 능력, 모든 인간 안에 깊고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 부패를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타락한 육신을 압도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주목했으면 하는 성령님의 또 다른 사역이 있습니다. 조금씩 살펴보겠습니다. 9절과 10절, 그리고 11절입니다. 여러분은 육신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의 요약입니다. 이는 은혜의 상태, 구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일까요? 만일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여러분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기본적인 사실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같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신에 있지 않고,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망의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육신에 있지 않다’는 말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 안에 있고, 영을 따라 행하며, 영의 일을 생각하고, 생명과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면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참된 구원의 표지는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이 없는 신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 성령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은사주의의 또 다른 끔찍한 오류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비참하고 부패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역사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성령님을 또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속적인 사역입니다. 따라서 변화의 증거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입니다. 이 ‘거하신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오이케오(Oikeō)'는 우리가 ‘집에 산다’고 할 때 사용하는 것처럼 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여러분 안을 거처로 삼고 살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이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 성령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9절 하반절에서는 반대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은 성령님이 삼위일체의 둘째 위격이 첫째 위격과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표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여러분의 사고방식, 행동 방식, 사랑하는 것, 하는 일, 말하는 방식이 변화됩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의 타락한 본성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면서 거듭남의 사역과 성화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가 더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요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십니다. 바로 영화입니다. 우리 구원의 마지막 측면인 영화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일까요? 10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또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시겠죠?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게 될 겁니다.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라는 말씀은, 우리 몸에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죄 때문에 우리 몸에는 죽음의 원리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죽을 몸에서 죽음을 없애지 못합니다. 절대 못 없앱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 인격, 내 몸에 살고 있는 우리라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문자 그대로 덮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으로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이 세상에서는 바뀌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망의 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은 이 사망의 몸과 타락한 두뇌에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래서 11절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바울이 몇 번이나 말하고 있나요? 성령님은 어디에 거하십니까? 너희 안에, 너희 안에, 너희 안에, 너희 안에, 너희 안에, 너희 안에.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왜일까요? 성령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한 순간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의 부패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거듭남의 사역과 성화의 사역을 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때에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부터 4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시고 입증하시기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의 죽을 몸에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겁니다. 얼마 전에 제 소중한 친구 하나가 죽었습니다. 이번주에 그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암이 친구의 머리를 갉아먹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친구였는데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저는 주님께서 이번주에 친구를 주님의 임재 속으로 데려가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지켜보면서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암이 말 그대로 사람의 몸을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먹어치우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이 사망의 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까지 눈에 보이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결국 이 몸은 죽게 될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은 날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는 단지 죄 가운데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완전함, 즉 거룩한 완전함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죽더라도, 영은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죽으면 우리 영은 하늘로 가게 됩니다.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해하셨나요? 우리는 ‘림보’나 ‘연옥’에 가지 않습니다. 어떤 대기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는 선로에 갇혀 하늘로 가는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이곳을 떠나면 천국에 갑니다. 그 즉시 주님을 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활 때까지는 몸이 없는 영으로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활의 때에,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 예수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일치하도록 바꿔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의 부활의 몸처럼, 하늘로 올라가신 주님의 몸처럼, 벽을 통과하신 주님의 몸처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주님이 보여주신 능력으로 하십니다. 그 능력은 누구의 것입니까? 성령님입니다. 11절입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이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는 건가요? 부활의 때까지 제 몸이 조금은 남아 있어야 할 텐데...” 상관없습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계십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우리 안에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또한 완벽한 능력과 완벽한 설계도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완벽한 우리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우리와는 전혀 다를 겁니다. 우리를 재창조하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는 모든 사람을 영원한 몸으로 재창조하는 것, 모든 역사 속의 성도들을 포함해서요.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이것이 바로 높임을 받으셔야 할 사역입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하고, 우리가 율법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며,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영원히 하늘에 거할 영광스러운 몸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앞으로 말씀드릴 것이 많이 남아 있는데, 성령님에 관한 오래된 찬송가들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 말을 했는데, 책을 보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정말 충분히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자료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 중에서 오래된 찬송가 하나를 찾았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령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니 흥미롭더군요. 이 곡은 160년 전, 즉 1850년에 작곡된 곡입니다. 가사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시여, 내 마음에 임하소서, 내 마음을 세상에서 떼어내소서, 모든 맥박을 통해 움직이소서, 나의 연약함을 굽어살피시고, 당신처럼 강하게 하시며,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한 신자가 성령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성령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2절입니다. 저는 이 2절이 맘에 듭니다. “꿈도, 예언자의 황홀경도, 진흙의 장막이 갑자기 찢어지는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초월적인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사의 방문도, 하늘이 열리는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천국 체험도 원하지 않는답니다. “내 흐린 영혼을 밝히시고 진리를 보도록 도우소서.” 이제 3절입니다. “당신의 천사들이 사랑하는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도록 저를 가르쳐 주소서. 나의 모든 몸을 거룩한 하나의 열정으로 채우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비둘기로 불붙여 주소서, 나의 마음은 제단이며 나는 불꽃을 사랑합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이 불타올라 그분을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입니다. 앞으로 계속 더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 이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이토록 일관적인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경 어디를 펴든지 진리의 울림은 압도적이고 명확하며 확고하고 뚜렷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놀랍게 계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배운 것을 실천하고 예배에 옮기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아버지, 아들, 성령을 진정으로 예배하고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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