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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주간 성령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성령님이 심각하게 모욕당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시작하게 되었죠. 은사주의 운동은 성령님을 남용하고,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성령님을 모욕하고, 심지어 성령님을 모독하는 일에 선두에 서 있습니다. 성령님은 무분별하게, 끊임없이 남용되고 계십니다. 시리즈 초반에 언급했듯이,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사탄의 것으로 돌리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죄로 다루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죄의 반대 형태, 즉 사탄의 일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 만연해 있으며 우리 모두가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오늘날에는 성령님에 대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무분별하게 성령님의 역사로 돌리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 일종의 공공연한 놀이가 되었습니다. 물론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공격도 있습니다.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지 않다,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다, 미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적 공격이죠.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공격도 있습니다. ‘바울의 새 관점’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를 부인합니다. 열린 유신론은 하나님의 본질을 공격하고, 바울의 새 관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본질을 공격하며, 속죄와 전가, 칭의의 교리를 공격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신학적 공격이 항상 있었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공격은 교리적이긴 하지만 교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식별되지 않습니다. 경험에 근거한 공격이 끊임없이 성령님 탓으로 돌려집니다. 이는 삼위일체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성령님의 참된 정체성을 거부하고, 성령님의 참되고 영광스러운 사역을 거부하며 거짓 신으로 대체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 신이 성령님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금송아지와 같으며 성령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표현입니다.

은사주의 운동은 성령님에 대한 진리를 마음대로 무시하고 무모한 방종으로 하나님의 집에 우상의 영을 세워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을 모독합니다. 이런 사례가 너무나 많아서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현재 새로운 책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기독교계에서 나온 <천국은 실제로 있다>라는 책인데, 4살 아이가 맹장 수술 중에 천국을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런 책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9개월만에 500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4살 아이가 맹장 수술 중에 천국에 갔다가 본 것을 묘사했다는 책이 500만 부나 팔린 겁니다.

이 아이는 가브리엘처럼 날개가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봤다고 합니다. 파란 눈을 가진 예수님도 보았는데, 키는 미가엘의 절반 정도고 가브리엘보다 작지만, 그렇게 작은데도 더 강하며 오직 예수님만 탈 수 있는 무지개 말을 탄답니다. 그리고 성령도 보았다고 하는데, 성령은 하늘에 떠다니는 파랗고 투명한 안개 같고 지구를 향해서 능력을 쏘고 있답니다. 이런 책이 9개월 만에 500만 부나 팔렸다고요? 이것이 우리가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인가요? 이런 속임수에서 말입니까? 사기에서 말입니까? 부모에 의해 상상력이 자극되고 확장된 것이 분명한 4살 아이의 말을 통해서 말입니까?

성령님은 최신 변신 로봇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령님을 여러분 마음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모습이든, 여러분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든, 여러분의 관심사이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든, 무엇이든 성령님 탓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독이자 모욕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이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은 일일 뿐더러 성경이 말하는 바와도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심각한 이단에서 나온 것이든 경박한 체험과 왜곡에서 나온 것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든, 어떤 왜곡이든, 어떤 거짓이든 모든 존귀와 찬양과 영광을 받아 마땅하신 성령님을 욕되게 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성령님의 사역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영과 진리로 성령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죠. 출발점으로 로마서 8장을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로마서 8장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시리즈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에 많은 격려를 받았습니다. 시리즈를 통해 복을 받고 있으며, 새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아주 훌륭한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성령님을 바라보는 방식과 예배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로마서 8장을 보면, 물론 로마서는 복음에 관한 책입니다. 처음 다섯 장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 몇 장은 복음의 필요성, 인간의 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 3장 21절부터 5장 끝인 21절까지는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되는 구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복음에 관한 책입니다. 1장 1절부터 17절까지는 하나님의 복음을 제시합니다. 그 다음에는 인간의 죄성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희생적 죽음과 부활이라는 해결책이 나옵니다. 그래서 5장 끝에 이르면, 우리는 구원이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됩니다. 매우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 이르면 복음의 유익이 나옵니다. 8장 39절까지 이어지죠. 따라서 6장, 7장, 8장은 복음의 유익을 다룹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6장과 7장은 소극적인 측면의 유익을 다루고 8장은 적극적인 측면의 유익을 다룹니다. 6장과 7장에서는 복음의 유익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더 이상 아닌’ 부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에 매여 있거나 죄의 종이 아닙니다. 더 이상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망에 있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더 이상 육신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6장과 7장은 복음의 긍정적인 효과를 소극적인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형벌로부터의 자유,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이죠.

8장에 이르면 성령님의 성화 사역을 적극적인 측면에서 다룹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을 설명하죠. 8장은 그 자체로 성령님의 사역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로 나아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확장시키고 비교 구절을 찾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물론 지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되도록이면 8장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장은 성령님에 대한 그야말로 광대한 계시입니다.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원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을 살펴보고 있는데, 8장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계획을 세우셨고, 성자는 그 계획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성령은 그 계획을 적용하십니다. 그렇죠? 아버지가 구원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셨으며, 아들은 구원을 유효하게 하셨고, 성령은 구원을 실제로 적용하십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택하신 분이시고, 아들은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며,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택하심은 아버지의 일이고, 칭의는 아들의 일이며, 성화는 성령의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놀라운 구원에 모두 참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8장을 통해서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 성화하시는 일이죠.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은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죠? 우리는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1절이 그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지 않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님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사역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은혜에서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예배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특히 현재 우리 삶에서 하고 계신 일들로 합당하게 예배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성령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며, 무엇이 그분을 그토록 예배받기에 합당하게 만드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방식으로 성령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8장에서 우리는 이런 내용을 발견합니다. 2절과 3절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죄와 사망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4절에서는 율법을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소극적인 측면이 아니라, 율법을 이룰 수 있게 되는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5절부터 11절에서는 성령님이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12절과 13절에서는 의로움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지속적으로 능력 있게 하십니다. 14절부터 16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17절에 이르면 이 장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성령님의 사역이 나옵니다. 성령님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 미래의 영광을 보장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영광을 확보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물입니다.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구원이죠.

우리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릴 수 있는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자주 말씀드렸듯이, 만약 구원이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잃어버리고 말 겁니다. 만약 구원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잃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스스로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최종 부분, 마지막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한 영광에 대해 우리가 갖는 유일한 소망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언젠가 영화롭게 하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동시에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두 가지 사역은 성화와 보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 성화되고 있는 것을 다루고, 14절부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을 다루는데, 이것은 영원한 관계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이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점진적으로 의로운 기준에 따라 변화되게 하십니다. 이 기준을 예수님이 완벽하게 보여주셨죠. 우리가 본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 말하는 우리가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인은 깨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보증하시고 보장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23절이 말하듯이 성령의 첫 열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장차 영광 중에 주실 수확의 첫 열매를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장래 영광에 대한 보증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이 두 가지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는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것인데,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본보기입니다. 그리스도께서 33년 동안 세상에 사셨던 이유는 성화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모델을, 본보기를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 본보기를 따라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시키는 사역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성령님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위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구원을 받았다가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구원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곧 읽게 될 내용처럼, 하나님께 택함받은 범주에 속한 모든 사람은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으며,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복되신 성령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생명을 주셨으며, 그 후에 우리를 성화되게 하시고 보호하셔서 마침내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실 그 날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가 회심할 때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바로 그 성령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영원한 상태로 부활할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설계하셨고 아들이 이루셨으며 성령이 실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이제 17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령님의 보호하시고 보증하시는 사역에 관한 부분에 들어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영광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7절부터 읽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영원한 영광의 개념을 소개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모두는 미래의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17절의 마지막 문장, 즉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18절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대해 말합니다. 19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광 중에 나타나는 것을 언급합니다. 21절 끝부분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나옵니다. 23절은 우리가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24절과 25절은 우리가 간절히 기다리는, 아직 오지 않은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성령님의 사역의 한 범주를 소개하는데, 바로 우리를 미래의 영광으로 보장하는 사역입니다. 23절은 이 사역의 핵심에 성령님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의 보증금과도 같다고 할 수 있죠. 우리는 또한 26절과 27절에서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를 보호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우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눈에 띄는 한 단어가 있는데, 바로 “탄식”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락에는 탄식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19절에서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한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번역에서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번역본에서는 피조물이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3절은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도 탄식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26절에는 성령의 탄식이 나옵니다. 이는 피조물과 우리, 그리고 성령이 영광이 최종적으로 실현될 때까지 특정한 탄식, 특정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미래 영광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그 미래의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구원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잃어버릴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 자신의 구원을 확보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19절부터 22절까지는 피조물이 탄식하고, 23절부터 25절까지는 신자가 탄식하며, 26절부터 27절까지는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이 모든 탄식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현실을 나타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미완성을 느낍니다. 신자들도 이 미완성을 느낍니다. 심지어 복되신 성령님도 이 미완성을 경험하십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진리입니다.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내용이 있어서, 오늘 아침 하루만에 이 모든 것을 다루기는 벅찬 일입니다.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1부예배에서 다룬 만큼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을 봅시다.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19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19절에서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도 피조물이 언급됩니다. 21절에서도 피조물이 언급되고, 22절에서도 언급됩니다. 이 네 구절에서 피조물이 주제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는 걸까요?

유대인이라면 이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기대하는 탄식입니다. 미완성의 탄식입니다.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고통스러운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분명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구속 역사의 두 시대, 즉 현재 시대와 다가올 시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시대와 다가올 시대, 현세와 내세, 금생과 내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현세는 죄와 고통, 쇠퇴와 부패, 타락과 죄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내세는 새 하늘과 새 땅, 의와 순결, 거룩함과 덕, 영광의 시대이며, 죽음과 쇠퇴, 질병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는 이사야 65장 17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말씀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탄식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연도 탄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자연은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19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또는 NASB 버전 성경이 표현한 대로 “‘애타게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떤 의미에서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는 걸까요? 그리고 말씀드렸듯이 이는 22절까지 계속 언급됩니다. 어떤 피조물이 그렇다는 걸까요? 천사들일까요? 물론 천사들도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닙니다. 천사들은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룩한 천사들은 탄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나아질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천사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습니다. 영원한 완전함과 영원한 거룩함 속에 있습니다. 부패의 대상이 아니며, 결코 부패의 대상이 된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소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를 말하는 걸까요? 타락하여 악마가 된 창조된 천사들을 말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마귀들은 자신들의 해방을 바라며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해방도, 구원도, 구출도, 용서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불못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일까요? 신자들도 아닙니다. 바울은 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신자들이 구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시면,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구별됩니다. 21절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음하고 탄식하며 기다리고 간절히 기대하는 이 피조물은 신자들과 구별됩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을 말하는 걸까요? 정말 불신자들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영광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더 나은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고, 그것에 대한 어떤 욕구도 없습니다. 게다가 20절을 보면,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허무함에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는 불신자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발적인 죄인입니다. 기꺼이 자신들의 부패를 받아들이고 키웁니다.

결론적으로 탄식하는 피조물은 이성적인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성적이고 인격적인 피조물이 아닙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비이성적 피조물, 즉 생물과 무생물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피조물을 의인화하고 있는 겁니다. 물질적인 하늘, 물질적인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하늘과 그 안의 모든 천체들, 땅, 물, 육지, 풀, 꽃, 동물, 벌레, 물고기, 강, 시냇물 등등의 생물과 무생물, 비인격적, 비이성적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에게 정체성이 부여된 것이죠. 일종의 시적 표현으로 의인화된 겁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35장 1절에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광야와 메마른 땅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의인화된 것이죠. 또는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씀 이사야 55장 12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제가 약속하건대, 만일 여러분이 실제로 산들이 노래하고 나무들이 손뼉 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여러분은 정신병원에 가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으로 의인화한 겁니다.

피조물, 즉 비이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생물과 무생물, 즉 살아 있는 것들과 살아 있지 않은 것들, 바위와 동물로 정의되는 그 피조물이 간절히 고대하고, 열렬히 기대하며,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간절히 고대한다”는 헬라어 동사는 문자적으로 볼 때 독특하게 조합된 동사입니다. 머리 너머로 멀리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거나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해 머리를 들고 까치발로 서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즉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몸을 쭉 뻗어서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대감을 표현하는 겁니다. 마치 피조물이 까치발로 서서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고대하는 걸까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영화롭게 되는 때입니다. 이는 모든 인류 역사 끝, 천년왕국의 끝, 새 하늘과 새 땅이 세워지는 때가 될 것입니다. 피조물은 이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1절에서는 이렇게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영화롭게 될 때 피조물도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죠?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모든 피조물이 까치발로 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주론적 설명입니다. 비이성적이고 비인격적인 피조물들이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려고 까치발로 서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완전한 영광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겁니다. 다니엘 12장 3절은 별처럼 빛날 것이라고 말하며 마태복음 13장 43절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타오르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 전체 피조물은 이 사건을 기다리며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왜 피조물이 그렇게 고대하고 있을까요? 잠시 2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했다는 것은 헬라어로 ‘마타이오테스’(mataiotēs)를 의미하며, 이것은 목표가 없고, 공허하고, 쓸모없고, 허무하고, 목표에 도달할 수 없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원래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렇죠?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기억하시죠? 피조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1장 마지막절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러나 피조물은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원래 되어 있어야 할 모습도 아니고, 되어야 할 모습도 아니며, 될 수 있는 모습도 아닙니다.

그리고 참고로, 20절에서 “굴복했다”라고 할 때, 이는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NASB에 올바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는 특정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합니다. 피조물이 목적이 있고 완전했던 상태에서 목적이 없고 허무한 상태로 변한 결정적인 사건이 과거의 한 시점에 발생했습니다. 피조물은 부패, 타락, 좌절, 죽음과 쇠퇴, 파괴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피조물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단순히 진화 과정에서 뭔가 잘못된 것일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다시 20절로 돌아가 봅시다. 피조물은 자발적으로 허무한 데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굴복한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을 목적 없는 상태로 만들고, 부패하게 하며, 원래 창조된 목표대로 영광스럽지 못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피조물의 잘못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비자발적인 희생자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피조물에게 이런 일을 했습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계속 읽겠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굴복하게 하시는 이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허무한 데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7절, 18절, 19절에 따라 피조물에게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었을 때 재앙이 닥쳤습니다. 치명적인 재앙, 이 세상에 살아가는 그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을 만큼 전염성이 강한 재앙이었습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만큼 전염성이 강한 재앙이었습니다. 마치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창궐한 도시 한복판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재앙은 사람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했습니다. 이 재앙은 집 안 침대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전체에 퍼져 있었습니다. 집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 곳곳에, 도시 전체에, 그리고 시골 구석구석에 있었습니다. 환경 전체가 부패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앙은 지구 전체에 퍼졌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쇠퇴, 재난, 오염, 혼란, 퇴보, 이런 것들은 일종의 진화론적인 우연의 결과가 결코 아닙니다.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세상은 항상 더 나아져야 하는데, 어떤 이상 현상이나 나쁜 돌연변이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이런 모습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창조물을 저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깨어있는 모든 순간 죄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이며 부패한 현실에 직면하도록 이 세상을 저주하셨습니다.

이사야 24장 6절에서 말하듯이 저주가 땅을 삼켜 버렸습니다. 예레미야 12장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땅이 슬퍼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 또한 부패의 속박 또는 노예 상태에 있습니다. 21절에 나와 있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죄와 전 우주가 겪는 쇠퇴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이러한 상태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환경을 되돌리거나 완화시킬 수 없습니다. 좋은 시도이지만 효과가 없을 겁니다. 태양 에너지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탄소 발자국을 제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화석 연료를 없앤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교육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우리는 더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상태에서 나빠지고 있는 중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완벽한 상태에서 파괴로 향하고 있으며, 멈출 수 있는 지점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세계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정결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했기 때문에 지구를 다스리는 존재로서 완벽한 환경의 혜택을 누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왕관을 잃은 왕이 되어 통제 불가능하고, 부패하며, 쇠퇴하고, 치명적인 창조물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체 환경을 저주하셨습니다.

이사야에 이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딱 하나만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 24장 4절부터 6절입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이사야는 계속해서 이러한 재앙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34장에 더 많이 나와 있습니다. 33장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저주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패가 어디에나 있어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아담과 이브, 그리고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상태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왜 피조물이 까치발로 서서 고대하고 있나요?” 21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그 바라는 것은”, 그 바라는 것은,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까치발로 서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대로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나타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를 얻기를 바라면서도 최종적인 영원한 상태가 올 때까지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매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몇 달 후에 출간될 책을 쓰고 있는데, <12명의 비범한 영웅들>이라는 책입니다. 사람들이 제목에 '12'가 들어간 책을 사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계속해서 '12'가 들어간 제목의 책을 쓰려고 합니다. <12명의 평범한 사람들>, <12명의 특별한 여성들> 이렇게 말이죠. 사람들이 '12'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12명의 비범한 영웅들>로 정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영웅 중의 한 명은 에녹입니다. 에녹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잠깐만요. 영웅이라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어야 하는데, 에녹은 고독한 인물 같아 보이는데요”라고 말이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걷고 있었을 뿐입니다. 에녹은 걷고 있었고, 어느 날 그렇게 천국으로 걸어갔습니다. 죽지 않았죠. 기억하시나요? 에녹은 엘리야가 불수레와 불말들 사이에서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왜 제가 에녹을 영웅이라고 생각할까요? 어떤 수준의 영향력일까요? 어떤 범위의 영향력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영웅적일까요? 에녹은 하나님과 너무나 친밀하게 함께 걸은 의로운 사람이어서 하나님이 어느 날 그대로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이처럼 에녹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말씀드리죠. 에녹이 살았던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8명을 제외하고 모두 홍수로 죽었습니다. 에녹이 얼마나 희귀한 존재였는지 아시겠나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에녹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에 수백만 명을 죽일 만큼 타락한 문화에 맞서 살았던 사람을 보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에녹이 영웅이라는 겁니다. 에녹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세상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십시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세상의 교육, 정치, 사회 구조에 대한 여러분의 기대치를 낮추십시오. 기대치를 낮추셔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고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신 정도로 여러분의 기대를 낮추세요. 그 정도로 낮추면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하나님은 에녹을 타락한 세상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를 성화되게 하시는 분,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바울은 심지어 이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라고 부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즉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때에 피조물도 저주로 인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까요? 어떻게 일어날까요? 시편 기자는 시편 102편에서 이에 대해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수 있습니다. 시편 102편 25절에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02편의 내용입니다. 이는 베드로후서 3장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입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시편 기자가 말한대로입니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문자 그대로 원자로 이루어진 우주가 폭발할 것입니다.

12절에서는 더 자세히 말합니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땅과 하늘은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창조의 해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것이 베드로가 말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21장, 22장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말 그대로 우주적인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가 이르기 전까지는 피조물의 현재 상태에서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무너졌고, 인간의 높아짐, 영화와 함께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아시겠죠? 창세기 처음 3장에서는 저주받은 피조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저주받았죠. 요한계시록 마지막 3장에서는 완벽하고 의로운 새 창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영화로운 인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는 죄와 부패의 슬프고 긴 역사가 있습니다. 이 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일어난 일이 피조물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영광 중에 인간에게 일어날 일이 피조물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것입니다. 피조물은 해방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22절이 이를 요약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출산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출산의 고통은 긍정적인 고통이죠, 그렇죠? 제 말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겁니다. 어떤 고통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고통에 시달리다가 어쩌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산의 고통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 놀랍고 멋진 것, 위대한 사건, 복을 받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그런 고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느끼고 있는 고통입니다.

여러분은 피조물을 돌볼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죠. 여러분은 잔디를 밟아도 되고, 사슴을 죽여도 되고, 원하시는 대로 하셔도 됩니다. 피조물을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어리석게 행동할 필요도 없고 악하게 행동할 필요도 없지만, 알아야 할 것은 피조물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여전히 우리에게 풍요와 복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돌보실 것입니다. 전부 파괴하시기 전까지 말이죠. 아시겠죠? 그러니 현재 상태의 피조물을 보존하려고 너무 지나치게 애쓰지 마십시오. 피조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좋습니다. 아시겠죠? 물론 그 때를 여러분이 앞당기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이라는 현상이 우리에게 부분적인 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매년 자신을 새롭게 하고 무언가 영구적인 것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 겨울의 죽음과 어둠에서 벗어나 봄이 되면 자연은 완벽한 피조물을 만들어내려 하고, 매년 일종의 산고를 겪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한다. 봄은 단지 여름으로 이어지고, 여름은 가을로, 가을은 다시 겨울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불쌍한 자연은 매년 그 안에 있는 허무함, 죽음과 쇠퇴와 분해의 원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그럴 수 없다. 매번 실패한다. 마치 상황이 달라지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계속 노력하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탄식하고 고통 속에서 산고를 겪는다. 자연은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

매우 오랫동안 그랬듯이 봄은 매년 다시 나타나 생명을 틔웁니다.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잔디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꽃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자연의 본성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말처럼 매 봄마다 자연은 열심히 노력합니다. 피조물은 영광을 위해 탄식합니다.

둘째로, 짧게 몇 분만 더 하겠습니다. 믿는 자들도 영광을 위해 탄식합니다.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만 그런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피조물이 불완전함 속에서 탄식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피조물의 일부이며 불완전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저주받은 우리의 상황을 한탄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장 24절이죠. 고린도후서 5장 4절을 기억하시나요? 거기서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다윗도 시편 38편 9절에서 탄식했습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우리는 탄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탄식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무엇 때문에 탄식하고 있나요? 2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양자될 것”이라고요.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리는 이미 양자가 되지 않았어요? 8장 14절부터 16절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양자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네, 우리는 이미 양자가 되었지만 아직 유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우리의 유업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나요? 23절 끝부분에, 무엇의 속량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 몸의 속량입니다. 우리는 이미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14절에 나와 있죠. 우리 안에는 양자의 영인 성령님이 계셔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그 친밀함을 느낍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과 함께, 16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양자가 되었지만 아직 유업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부터 4절을 기억하시나요? 우리는 하늘에 간직된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가 이를 때까지는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탄식합니다. 우리는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사망이 생명에 삼켜지는 날을 기다리며 탄식합니다, 그렇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우리는 그 때가 오기를 갈망합니다. 우리는 천국의 몸을 덧입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말이죠, 빌립보서 3장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체, 우리의 타락, 우리의 인간성을 “우리의 낮은 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지만 은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은혜에서 영광으로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의 약속에 대한 첫 열매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성령님은 첫 번째 분깃입니다. 첫 열매는 농부가 처음으로 수확한 작물의 일부입니다. 나머지가 아직 완전히 자라기 전에 나온 작물을 말합니다. 농부는 첫 수확물을 보면서 미래의 수확물이 어떤 모습일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전체 작물의 첫 열매이십니다. 분깃, 계약금, 아라본, 약혼 반지, 인장, 보증, 이런 의미를 지닌 존재로 바울 서신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약속의 영이십니다. 이것이 속량받은 자들의 소망입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입니다.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라.”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탄식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탄식하게 되죠. 그렇죠? 정말로 더 많이 탄식하게 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더 많이 탄식하고, 탄식할 이유가 많아지기 때문에 더 많이 탄식합니다. 자기 몸에서뿐만 아니라,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탄식하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세상을 보면서 그다지 탄식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의 죽음이나 고난 때문에도 그다지 탄식하지 않았죠. 예배 사이에 존 제임스 형제님과 함께 기도했습니다. 62년간 결혼생활을 했던 아내가 뇌졸중과 뇌출혈로 인해 갑자기 천국으로 떠났기 때문이죠. 아내를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게 설명하는 형제님에게서 마음의 탄식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형제님은 1972년부터 아내와 함께 우리 교회에 다니셨는데, 교회가 부부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를 나눠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탄식하는 삶이며, 오래 살수록 그 탄식이 더 쌓여갑니다. 우리는 모두 소망 속에서 살지만, 그 소망은 나이가 들수록 더 밝게 타오르고,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서의 삶을 경험할수록 더욱 커집니다. 저는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끝내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 속에서 삽니다. 24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또한 소망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더 가까워졌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나오죠. 구원에 더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이것이 미래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서 소망 속에서 삽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인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소망을 밝게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 즉 성령님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자됨을 확증하시며,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이십니다.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십니다. 우리를 붙잡고 안전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의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영광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탄식하고 믿는 자들도 탄식합니다.

26절과 27절에서는 성령님이 탄식하십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서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28절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죠. 우리 삶에서 복되신 성령님의 사역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바라보는 것은 정말 멋진 일입니다. 이토록 복되시고 놀라우신 성령님을 어린아이같이 어리석게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을 일종의 푸른 안개로 전락시키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 성령님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일들을 금송아지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일종의 시각적 이미지로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시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을 돌아보는 믿음을 포함하며, 또한 그리스도가 이루실 사역을 바라보는 소망도 포함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걸음이자 소망의 걸음이기도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함께하는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멋진 찬양팀과 함께 찬양하며 지체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예배를 마치고 교제하는 시간을 통해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에 다시 돌아와 말씀 사역을 통해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에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한 영광의 날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는 복되신 성령님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경이로운 계획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복되신 구주께 감사드리며, 성령님이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광을 받는 그날까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보호하시는 사역을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영원히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서도 간절히 원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며, 천국에서는 삼위일체의 참된 예배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주님,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신실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영광과 선하심으로 매순간 우리를 놀라게 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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