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자, 오늘 아침에도 로마서 8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서 성령님의 사역을 깊이 있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신성한 통찰력으로 풍성해지고 있죠. 성령님을 강조하는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 생각에, 아니 실제로, 삼위일체 세 위격 중에서 한 분이 기독교적 예배, 나눔, 가르침, 그리고 삶에서 소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위격은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 예배는 본질보다는 형식에 더 치중합니다. 사실보다는 감정에 더 중점을 둡니다. 구주이신 예수님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초점을 맞춥니다. 신학보다는 치유에, 거룩한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감정에 더 집중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예배를 보면서 안타까운 점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을 부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성령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예배하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모두 예배해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 잘 모릅니다. 세상에 떠도는 성령님에 대한 많은 오류 때문에, 사람들은 대중적인 사고방식과 모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성령님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의 각 위격에 대한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고 온전히 앎으로써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놀랍고 복된 사역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대략적으로 이렇게 설명해 드렸죠.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셨고, 성자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속의 수단을 제공하셨으며, 성령은 우리 안에서 구속의 사역을 실행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님이 유효하게 하신 계획을 실제로 수행하시는 대리자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구원의 계획을 활성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을 통해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성령을 모욕하지 말고,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러한 경고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매우 흔한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관해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성경에 명확히 계시된 내용을 다시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6장에 따르면 우리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심지어 우리의 칭의에도 참여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린도후서 3장은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음을 확인해 주신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의 영과 함께 증언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같은 장에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영적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교회를 섬길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유다서 1장 20절은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3장 16절에 따르면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서 보았듯이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의로운 행위를 포함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십니다. 말씀을 조명하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의 교사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점으로,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로마서 8장 18절부터 39절까지를 통해 말씀드린 성령님의 위대한 사역입니다. 18절부터 39절 전체가 이 영광스러운 현실, 즉 구원이 영원하다는 한 가지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원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최후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보호받고 있으며,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님은 우리를 구속의 날까지 인치십니다. 성령님은 보증이시요 분깃이시며 계약금이자 약혼 반지이며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모든 믿는 자를 보호하시며, 마침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처럼 우리를 영원한 영광으로 살리실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에 대한 참된 교리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거짓된 왜곡과 모독이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참된 교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구절들을 통해서, 먼저 17절에서 영화를 언급한 다음, 18절부터 시작해서 30절까지 우리 구원의 영원성에 대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논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합니다. 영원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논증은 30절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들을 시간 안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한 부르심으로 부르신다는 겁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영화롭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사람들입니다. 중간에 떨어져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저는 평생 이 교리를 전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성경에 너무나 명확하게 나와 있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과 사역 전반에 걸쳐 구원이 영원하다는 개념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논쟁해야 했습니다. 저는 벨라루스의 옛 군사 기지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민스크 외곽에 있었는데 러시아 제국 시절 공산주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곳이었죠. 이제는 일종의 야영지로 바뀐 그곳에 몇몇 목사님들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전하면서 구원이 영원하다는 사실, 즉 거듭남은 영원하며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벨라루스와 러시아 목사님들이 제게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영원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죠. “아침에 시간을 주시면 여러분의 모든 반론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저는 작은 그릇에 담긴 뭔가를 아침 식사로 먹었습니다. 그게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나서 목사님들을 만났는데, 하나같이 눈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밤을 새워 제가 틀린 이유를 모으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씩 하나씩 계속해서 답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논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분들이 구원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구원이 안전하다는 소망 안에서 그분들이 기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분들에게 주려고 했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계속해서 거부했고, 저는 반복해서 말씀드려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모든 반론에 맞서야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바울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31절에 이르면 바울이 이런 반론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밤을 새워 반론을 생각해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반론이 어떤 내용일지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쟁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 있는데, 누군가가 우리의 구원을 잃게 할 수 있거나, 어떤 상황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공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우리의 구원을 잃게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게 어떤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상황에 의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너무나 압도적이고 강력해서 우리가 구원을 상실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31절부터 39절까지의 주제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31절부터 34절은 “구원을 잃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에 답합니다. 35절부터 37절은 “구원을 잃게 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 있는가? 에 답합니다. 그리고 나서 38절과 39절을 통해 영광스러운 결론을 맺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말하는 첫 번째 요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일입니까? 영원한 구원에 관한 일입니다. 18절 이후의 주제는 구원의 영원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 안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하셨고,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영원한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 만일 우리가 미리 아신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자들이라면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며 우리 중에서 아무도 구원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화롭게 된다는 것, 잃을 수 없는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이 모든 것들입니다.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반응은 어때야 합니까? 이것이 질문입니다.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할 겁니다. 놀라운 사건이지만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상황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거나 빼앗기거나 하는 식으로 잃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할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에 대해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빼앗을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말이죠. 31절 끝에 있는 질문에 담겨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거죠.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가 구원받지 않기를 바라며 이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가족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그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세상의 교육자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자녀를 대학에 보내면 대학에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확인시켜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할 겁니다.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비윤리성을 세뇌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와 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강화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리어 파괴를 목표로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세상이 성경에 대한 우리 믿음이 강해지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조에 대한 견해는요? 말세에 대한 견해는요? 영원, 천국, 지옥에 대한 견해는 어떻습니까? 반대로 세상은 우리 믿음을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믿음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것 아닐까요? 우리 마음에 의심을 불어넣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사회와 문화 전체가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왕국에서 활동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우리를 믿음과 구원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합니다. 거짓 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이단 지도자들도 그렇습니다. 거짓 교사들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데다가, 영향력과 권력과 교묘한 술수까지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울은 왜 이렇게 말한 걸까요? 헬라어로 이 문장은 ‘ei’라는 불변화사로 시작하는 조건문입니다. '에이'로 발음되지만 ‘E-I’입니다. “~이므로”로 번역되어야 하는 조건절입니다. 개연성이 아니라 실제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처럼 조건절로 표현된 실제 현실이므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므로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꽤 간단한 논리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많은 형제 중에서 으뜸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으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님도 그렇게 하십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에게는 이 두 중보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우리 모두를 영광으로 인도하시고 우리 중 아무도 잃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서약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므로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교회나 기독교라고 주장하는 종교 단체에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아노라.”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일어난다고요?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교회에는 종교적인 옷을 입고 강단에 서서, 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여러분의 신념과 믿음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훔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신다면 하나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을까요?

이 생각을 할 때면 저는 구약으로 돌아갑니다. 구약의 신자들은 하나님이 안전을 보장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편 27편 말씀을 좋아합니다. 다윗이 썼죠.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렇죠?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나요?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단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구한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15장 1절입니다, “나는 네 방패요.”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수기 14장 9절입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실제로 28절의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영원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 이것이 적극적인 측면입니다. 소극적인 측면은 아무도 우리의 안전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의 선을 위해 합력하게 하신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악이 이루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8장 1절에서 말하는 ‘정죄함이 없는’ 상태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인간도, 우리는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보다 더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입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반론은 31절 하반절에서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므로,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두 번째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가실 수 있을까요? 그래요, 이런 찬양도 있죠. “주님은 주시며(give) 주님은 찾으시네(take away) 내 맘에 하는 말 주 찬양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가실까요? 마음을 바꾸실까요? 우리에게 실망하실까요? 우리가 죄를 너무 많이 지은 나머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가실까요? 우리가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것을 보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거두어 가실까요? 우리를 죽이실까요? 왜냐하면 우리를 살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거듭났습니다.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셔서 다시 죽은 자가 되게 하실까요? 우리를 구원한 상태로 두시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 성가신 일일까요?

바울은 32절에서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참으로 간결한 구절입니다. 약간 혼란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는 매우 간결한 구절입니다. 더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으로 논증하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논리입니다. 간결한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주셨다면,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서 그보다 더 작은 것들은 당연히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논리입니다. 더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으로의 논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구속하기로 택하신 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주셨습니다. 가장 뛰어나고 가장 위대하며 가장 정결하고 신성한 아들을, 가장 값지고 가장 큰 대가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서 그보다 덜한 것들은 당연히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5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5장 6절을 보면 우리는 연약했고 경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 눈먼 자들, 무지한 자들, 악한 자들을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7절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가끔 좋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볼 수 있긴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대상은 좋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죠? 존경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일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악인이나 범죄자, 원수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비참하고, 잃어버린 바 되고, 눈멀고, 죽었고, 경건치 않고,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우리의 영화를 보장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바로 요점입니다.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는 말 그대로 가장 무한한 대가, 즉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되었으며, 살아계신 중보자 그리스도에 의해 보호받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더 큰 선물을 주셨고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서 그보다 작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 우리를 지키시려고 살아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경건하지 못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들을 주셨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음에 아들을 내어주셨다면, 이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아들과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제 말은, 이것이 복잡하지 않은 간결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가치하고, 경건하지 못하고, 비참했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의로운 갈망과 거룩한 심정을 갖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데 필요한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십자가의 끔찍한 희생으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보다 훨씬 덜한 일입니다.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서 관련된 몇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정말 놀랍도록 심오합니다.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상하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자기 아들을”에서 ‘자기’는 헬라어로 ‘이디오스(idios)’인데, 이는 자신의 특별한 소유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아들,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큰 선물을 기꺼이 주셨다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보다 덜한 모든 것은 당연히 주실 것입니다.

또한 32절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에서 ‘내주신’은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내주다’라는 것은 누군가를 사형 집행인에게 넘겨준다는 뜻의 전문 용어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죄가 요구하는 파멸과 저주와 형벌에 내주셨으니, 나머지 부분인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지 않겠느냐는 의미입니다.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말이죠.

누가 예수님을 죽음에 내주었습니까? 유다가 돈 때문에 그런 건가요? 빌라도가 두려움 때문에 그런 건가요? 유대인들이 시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향한 사랑 때문에 내주신 겁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32절의 “우리 모든 사람”은 31절의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이 “우리”는 30절의 “그들”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계획 안에 있는 누구든지, 그들을 위한 준비가 이미 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에 더하여 그들을 영광에 이르게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도 주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말씀이 참 좋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렇죠? 은혜가 계속됩니다.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저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좋아요,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고, 하나님도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다고 칩시다. 하나님은 이미 가장 큰 선물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그보다 덜한 선물들은 당연히 주실 테니까요.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요? 사탄은 어떤가요? 사탄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사탄은 그렇게 하고 싶어할 겁니다. 사탄은 욥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싶어했죠. 그렇죠? 또 베드로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욥기를 보면 사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니이까 이제 그에게 주신 모든 복을 빼앗아 가소서 그리하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하나님은 사탄을 풀어놓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그러자 사탄이 움직였습니다. 욥의 모든 가축이 죽었고 모든 자녀들이 죽었으며 욥은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진실이 아닌 온갖 말을 하는 어리석은 조언자들이 욥을 찾아왔고, 욥은 혼란과 고통 속에서 고립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화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그 원인이 무엇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사탄이 욥의 가족을 죽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 말만 하는 아내만 남겼을 때, 사탄이 욥이 소유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을 때, 욥을 너무나 아프게 하고 종기와 상처로 뒤덮여 깨진 질그릇 조각으로 긁어야 할 정도로 만들었을 때에도, 욥의 믿음까지 빼앗아 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 정도라면 믿음을 잃을만도 하지”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극단적인 상황이었을 겁니다. “사탄은 이 모든 과정에서 욥을 사정없이 고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욥은 뭐라고 말했나요?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그를 신뢰하리라.” 믿음까지 없앨 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상황 속에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믿음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은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입니다. 그렇죠?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형제들을 밤낮 참소하는 자입니다. 욥에게 그렇게 했죠. 스가랴 3장에서 대제사장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그렇게 하려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을 공격하며 사탄은 사자를 보내 육체의 가시로 괴롭혔습니다. 사탄은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입니다. 고문자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33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항상 우리를 고발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34절 상반절에도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정죄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사실, 이 둘은 같은 질문입니다. 하나는 정죄로 이어질 고발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지 마세요. 제가 가서 괴롭히게 해 주세요. 허락해 주시면 제가 믿음을 무너뜨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일이 잘 풀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상황을 힘들게 만들면 하나님을 저주할 겁니다. 제가 진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사탄이 항상 하는 짓입니다. 밤낮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성도들을 참소합니다. 사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이 3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죄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의롭다 선언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면 동시에 유죄라고 선언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렇죠? 그리고 더 높은 재판관은 없습니다. 믿는 자들은 항상 고발을 당합니다. 저는 이런 일들이 하늘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고 정당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에 대해 반대 주장을 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최종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이 최종 판결로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된 겁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목적,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공급, 우리의 믿음으로 실행된 것을 기반으로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었습니다. 모든 판결이 끝났습니다.

이보다 높은 상급 법정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하나님 위에 항소할 수 있는 법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법정이십니다. 죄와 심판, 그리고 의롭다 하심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주에서 유일한 법정입니다. 다른 법정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사탄의 그 어떤 참소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또한 파멸을 가져오려는 그 어떤 노력도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항상 사탄의 계략을 막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번영신학 설교자들은 예수님이 우리가 모든 면에서 건강하고 행복하며 온전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지만,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아랫뜰에서 불을 쬐다가 밀 까부르듯 흔들렸습니다. 예수님을 여러 번 부인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탄이 이들의 삶과,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공격하도록 허락하신 다른 신자들의 삶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위까지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리가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 위대한 날에 담대히 설 것이니, 누가 나를 참소하리요. 주님을 통해 저는 죄와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완전히 사함을 받았나이다."

다시 33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우리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미리 아신 바 되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고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데려가려 할 때에도 우리는 무법자나 범죄자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이미 의롭다 선언된 자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놓아주고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떨까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포기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를 데려오신 분이 우리를 내쫓으실 수 있으실까요? 34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정죄하실까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죽으심, 다시 살아나심, 하나님 우편에 계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는 네 가지 현실로 4중으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실까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이 말입니다. 분명한 점은,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온전히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죽으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아무런 죄책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의 형벌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을 정죄를 받으셨기에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속죄가 하나님을 만족시켰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십자가에서의 사역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의 완성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완전히 치러졌고, 이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세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위해 완전히 대가를 치르신 그리스도가 있고,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우리 죄를 위한 그의 대가 지불이 완전했음을 인정하셨으며, 그리고 세 번째로, 이제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시편 110편 1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의 사역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자기 우편에 앉히셨고,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를 종합해보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 부활, 높아짐과 승천은 모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값 치러졌고 하나님이 완전히 만족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34절 하반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은 또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이 절정입니다. 계속해서 간구하시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간구하십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좌 바로 옆, 하나님의 우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그 어떤 참소가 있더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셔서 “내가 친히 모든 대가를 치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 말하듯이,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가 가진 소망을 영혼의 닻과 같게 하셔서 튼튼하고 견고하게 휘장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도, 사탄도,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단 한 가지 가능성만 남았습니다. 우리 자신은 어떨까요?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알아요. 하나님을 탓하지 않겠어요. 심지어 사탄을 탓하지도 않겠어요. 그들은 교회를 다녔고, 믿었고, 찬양을 불렀고, 성경공부에도 참석했고, 믿는다고 말했지만 결국 떠났어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멀어졌어요. 구원을 잃은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런 걸까요? ‘구원받은 것처럼 보였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가족, 가까운 사람들, 어쩌면 여러분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자문하고 계신가요? 믿는 것처럼 보였는데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요한일서 2장 19절이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요한일서 2장 19절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많이 있었죠. 이들이 구원을 잃어버린 걸까요? 스스로 구원을 포기한 걸까요? 요한일서 2장 19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은 결코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곡식 가운데의 가라지였죠. 돌밭 같은 땅이었습니다. 싹이 나왔으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마른 겁니다. 가시떨기 같은 땅이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한 겁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간 것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으로 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하고 진정한 신자인 우리들, 이와 관련하여 마음에 성령의 증거를 가진 우리들은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 말씀에 대한 사랑, 다른 신자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 거룩하고 순수하며 선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 열매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되신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면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의 삶 속에서 행하고 계시는 성령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신자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계획하셨고, 아들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제공하시고 값으로 사셨으며, 성령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실행하시고 완성하십니다.

이것으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한 것 같네요. 여러분의 구원을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절이 이를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저는 이 확신 속에서 제 지친 영혼을 쉬게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 전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나서 스티브가 오르간을 연주하는 동안에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 짧은 묵상 시간을 통해 들은 것을 생각해 보시고 마음에 새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에 제 오른쪽에 있는 기도실이 열릴 것입니다. 교인 센터와 방문자 센터도 열릴 것입니다. 영적인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 영원한 운명에 대해 확신이 필요하신 분들은 제 오른쪽 앞에 있는 기도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지혜로운 분들이 친절하게 맞아 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계속해서 말씀으로 잔치를 누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 우리에게 힘을 주며,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것이기에 구원을 잃을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성령님께서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압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일이 있을 거라는 암시조차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고 작정하셨으며 이루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를 경외합니다. 복되신 예수님, 우리는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성령님,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 영광을 돌립니다. 이 모두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들과,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 준비하신 것들에 대한 기쁨과 소망과 열망으로 우리를 채워 주옵소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이 구원의 선물을 받지 못한 이들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옵소서. 믿음 안에서 깨어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