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이 벌써 13번째 시간입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로마서 8장을 통해서 성령님을 알아가는 13번째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오늘이 시리즈 설교 마지막 시간이라는 점을 먼저 알려드립니다. 이전 내용을 듣지 못하신 분들은 잘 따라오지 못하실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로마서 8장을 펴주시기 바랍니다. 찾으시는 동안 잠시 예배 안내 책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Grace Today’에 이 예배 책자에 대한 안내가 실려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발행된 내용을 좀 더 신중하게 편집하고 자료를 추가해서 풍성하고 새롭게 보완했습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마지막 장이 찬양에 대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어떤 음악이 예배에 적합한지를 다루고 있죠. 이 내용은 이번에 새로 만든 책자에만 있습니다. 여기에다 또 새롭게 추가된 장도 있어서 이번에 나온 예배 안내 책자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예배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이번 시리즈의 목표는 성령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예배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성령님을 예배하자고 말씀드렸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누군가가 저를 막아서더니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성령님께 예배와 찬양,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제안한 것에 화가 단단히 나셨더라고요. 제가 우려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성령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9절에는 매우 간결한 명령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라. 성경의 마지막 장이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경배하라.”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시작 부분인 모세오경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라, 예배하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아버지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자로 묘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고,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의 삶에서 개인적으로 드리기도 하고 또 이렇게 함께 모여서 드리기도 하죠.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칠 때, 우리가 예배해야 할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 유일한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 모두를 의미합니다. 삼위일체의 어느 한 위격에게 다른 위격보다 덜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할 때, 삼위일체의 특정 위격만 예배하고 다른 위격은 예배하지 않거나 어떤 위격을 다른 위격보다 더 예배해야 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모든 명령이 완전한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예배하라는 명령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계시록 4장에 천국의 모습이 나오는데, 10절부터 11절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과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나 두 위격만을 의미하고 세 번째 위격은 제외하는 걸까요? 천국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렇게 고백할 때 성령님을 제외하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하셨고 삼위일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성령님을 예배하자고 하면 새롭고 낯선 느낌이 들죠. 심지어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기만 하실 뿐입니다.” 물론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성을 축소하지 않으십니다. 정체성을 평가절하하지도 않으십니다. 받으실 예배를 축소하려 하지도 않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지만, 성령님 역시 동등한 하나님이시며, 동일하게 예배받으실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속한 모든 신성한 속성을 동일하게 소유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모든 신성한 활동에 동일하게 참여하시는데, 이는 성령님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창조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참여하십니다. 따라서 모든 참된 예배는 성령님을 포함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찬양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나타내신다는 점, 즉 예수님이 마지막 날 밤에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밝히신 그 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제는 기독교 사상의 일부가 되어버렸죠, 성령님이 예배를 그리스도께 돌리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데에는 매우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살펴본 것처럼 완전한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볼 때 성령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는 것은 자신이 받으실 예배를 그리스도께 돌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삼아야 하죠.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의 이상한 오류를 넘어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성령님을 성자 하나님이나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계의 제3세력에서 오랫동안, 참고로 첫번째 세력은 개신교, 두번째는 로마 가톨릭, 세번째는 오순절 은사주의입니다, 성령님에 대해 끔찍하고 비극적인 혼란과 왜곡을 야기하고, 성령님의 신성을 모독하며 성령님을 모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이죠.
복음주의 교회는 성령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성경적 진리는 평가절하되었습니다. 많은 경우에 성령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기이한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돌립니다. 이처럼 제3세력은 성령님의 인격과 사역을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은 성령님을 납치하여 인질로 잡고 있으며, 자신들의 일탈과 모독에 대한 모든 비판에 대해 사랑이 없으며 편협하다고 비난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난 3개월 동안 이 모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설교하면서 저와 성도님들이 각성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책을 써야 해요.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무질서한 은사주의>가 나온 지 꽤 됐으니까 이 문제를 다시 다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이유는, 얼마 전에 의견을 나누면서 성령님에 대한 문헌을 조사하고 오늘날 성령님께 돌려지는 거짓된 것들과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에 대해 살펴보니, 성령님에 대한 교리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진리가 확증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겁니다. 1990년대 초반이나 중반 이후로 성령님의 참된 위격과 사역에 대해 확실하게 다룬 책이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복음주의자들은 제3세력의 위협 아래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해 왔습니다.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근심케 하고 소멸하고 모욕하고 모독하는 이런 일이 계속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주의 교계가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놀랍게 느껴집니다. 몇 년 전에 ‘열린 유신론’이라는 공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알지 못하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전지성을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이 미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이 ‘열린 유신론’의 공격을 비난하고 수많은 근거 자료를 내놨습니다. 또한 지난 15년, 한 20년 동안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공격, 본성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더 직접적으로는 십자가 위에서의 사역, 복음의 핵심에 있는 성경적 칭의 교리에 대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는 운동에서 두드러졌는데, 전가와 칭의 교리를 부인하는 운동이었죠. 이에 칭의 교리를 옹호하고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옹호하려는 방대한 문헌이 축적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삼위일체의 어느 위격도 성령님만큼 심각하게 공격받지 않았습니다. 약 10년 동안 성령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이 사실상 전무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성령님에 대한 혼란 또는 무관심이 생겼고,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고 성령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또한 합당한 예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성령님을 모독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거짓 기독교인들과 거짓 교사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도 성령님을 모독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님이 근심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거나,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과소평가하거나, 감사하지 않거나 고마워하지 않는 것, 또는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베푸시는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능력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령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것도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살펴보고 있는 것은 성령님께 다시 초점을 맞추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아들께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고 보여주셨으며,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구원의 사역을 실행하시고 완성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를 위한 성령님의 사역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칭의에 참여하시며, 성화되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세례를 주시며,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르는 다른 신자들과 연합되게 하십니다. 서로를 섬기는 영적 은사를 주십니다. 모든 의를 위해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올바른 태도를 만들어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이자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우리의 미래의 영광,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이 시점에서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은 영원한 안전,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인함으로써 성령님을 가장 크게 모욕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모든 신자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까지 안전하게 지키시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성령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을 공격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주에 저는 찰스 피니의 글을 읽었습니다. 피니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공격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신자의 안전 교리를 공격했습니다. 피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해도 우리가 그 인을 깨뜨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이 증거하는 바는 다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부터 14절입니다. “그 안에서,” 즉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속량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기업이라 불리는 미래의 속량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약속의 성령’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하나님의 천국 약속에 대한 보증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비슷한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님은 모든 참된 신자의 인이며, 보증이며, 계약금이며, 첫 열매이며, 보증금이며, 능력이며, 보호자로서 우리를 최후의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17절부터의 주제입니다. 17절에 먼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가 나오고, 그 후 39절까지 모두 우리가 받을 미래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봤죠. 26절과 27절을 보면 성령님이 모든 참된 신자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데,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교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깊죠. 삼위일체 내의 탄식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겁니다. 또한 성령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계획을 이루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계획의 완성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 결과,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모든 일에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죠.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선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선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결과와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으며,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29절에 따르면 우리의 영광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봤죠. 하나님은 영화롭게 하실 사람들을 택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성령님은 계획을 실행하시는 능력이십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언젠가는 우리를 영광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계획만큼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들이 이루신 일만큼 안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값을 온전히 치르셨습니다. 잠재적인 지불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불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는 중보하시고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능력만큼 안전합니다.
이제 이 모든 위대한 신학을 살펴봤으니, 지난 시간에 이어서 31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 거라고 생각했죠. “아마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피니가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그 인을 깨뜨릴 수 있다.” 저는 이런 견해를 가진 다른 저자들의 글도 읽었는데 같은 말을 하더군요. “성령이 우리를 인치셔도 우리가 그 인을 깨면 어쩔 수 없다.” 가능한 일일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이런 일들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31절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보다 강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든 그것이 정말 중요할까요? 누군가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이 중요할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더 큰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위대한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위대한 인간의 체계나 종교나 영향력이나 사회나 교육이나 사회적 압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글쎄요, 아마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요? 32절이 답을 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가장 좋은 선물인 그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신다는 말입니까? 32절 하반절입니다.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이것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의 논증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다면,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된 지금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보다 못한 모든 것은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매우 논리적입니다.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의 논증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지금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것입니다.
또 이렇게 묻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럼 사탄은 어떤가요?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낼 수 있지 않을까요? 사탄은 매우 강력하니까요.” 사탄은 욥에게 시도했고, 베드로에게 시도했으며, 바울에게 시도했고, 스가랴 3장에서 대제사장에게도 시도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네 가지 예시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33절은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또는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죄합니까? 누가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입니까?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나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탄과 그 마귀들은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믿는 자들을 참소합니다. 형제들을 참소하는 자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욥의 믿음을 깨뜨릴 수 있었나요? 아닙니다.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했을 때 베드로의 믿음을 깨뜨릴 수 있었나요? 마귀의 사자들이 바울의 사역을 무너뜨리려고 했을 때 그럴 수 있었나요? 바울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나요?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참소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돌아서실까요?
우선, 구원의 믿음은 깨질 수 없고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또한 아버지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참소에 맞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며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죽음으로 그 모든 죄에 대한 값이 온전히 치러졌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돌아서시면 우리는 큰 곤경에 빠질 거예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포기하시면 어떡하죠?”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속을 완전히 이루시고 높임을 받으시어 하나님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며, 하늘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도우십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인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수였을 때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탄도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정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전히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만 남습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그 인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피니가 말한 대로 우리가 그 인을 깨뜨릴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왜 그렇게 할까요? 아, 환경 때문에요? 글쎄요, 삶이 힘들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한, 이것이 욥에 대한 주장이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욥은 복을 받았고, 부자였고, 자녀들, 곡식, 가축, 재물을 비롯한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실한 것이 당연하죠. 우리가 정말로 주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이 특정 상황에서 풀어지고 깨지고 무너질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32절부터 34절까지는 ‘누가’, 즉 사람이나 존재적인 측면을 다루고, 35절부터 37절까지는 ‘무엇’, 즉 환경을 다룹니다. 따라가 보면 꽤 간단합니다.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질문은 이렇습니다. 누가 또는 무엇이 끊을 것인가? 누구에 의해 끊어질 것인가? 이 모든 '무엇'들 뒤에는 '누구'가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극단적인 상황이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성령님을 버리게 할 수 있을까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39절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덧붙이자면 성령님의 사랑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깨뜨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자, 이 극단적인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점점 심각해지는 일곱 가지 상황입니다. 먼저 환난입니다. 환난은 외부의 압박입니다. 외부적인 상황이 나빠져서 공격을 당하는 겁니다. 헬라어 ‘틸립시스(thlipsis)’는 압박, 외적인 어려움, 거부, 고난, 고통을 의미합니다. 외적인 압력입니다. 다음 단어인 ‘곤고’는 내면에서 느끼는 압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두 단어로 구성된 합성어로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는 뜻인데 내면과 관련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압박이 가해지면 내면에 영향을 미치죠, 그렇죠? 외부적 압박에 내면이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 불안, 의심, 질문, 공포가 생기고,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압박이 너무 커지면 자신감을 잃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압박이 너무 큰 나머지 내면이 쪼그라들어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되고 이런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을까요? 그 다음은 박해입니다. 학대와 물리적 폭력이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받는 학대입니다.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이제 정말 힘든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여러분을 짓누르는 온갖 외부적인 문제들이 있고, 이것이 내면으로 들어와 불안, 두려움, 공포를 일으키기 시작하며, 그 다음에는 더 악화되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공공연한 박해, ‘디오그모스(diōgmos)’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기근, 배고픔이 따릅니다.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힐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더 악화됩니다. 여러분은 누더기를 입게 됩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결국 여러분은 벌거벗게 됩니다. 더 악화됩니다. 여러분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칼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런 상황들이 우리를 끊을 수 있을까요? 최악의 시나리오죠. 순교당하기 직전입니다. 머리가 잘리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의 실제 증언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여러 번 죽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끝내 바울은 머리가 칼에 잘려 순교했습니다. 참수형을 당한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의심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을까요? 바울은 36절에서 시편 44편을 인용하면서 우리뿐만 아니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온 경험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44편을 인용하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의 백성들은 과거에 고난을 겪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여러 번 적들의 손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우리의 믿음이 산산조각날까요? 성령의 인이 깨질 수 있을까요?
제가 가진 멋진 보물 중 하나는 ‘폭스의 순교사(Foxe's Book of Martyrs)’ 원본입니다. 모두 3권으로 되어 있죠. 쌓아 올리면 이만큼 두껍고 아주 거대합니다. 엄청나게 방대한 책이죠. 이 책에는 바울이 방금 설명한 과정을 겪고 결국 칼에 찔려 죽거나 화형대에서 불타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된 수백 수천 수만명의 증언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믿음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실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설계하신 믿음, 여러분의 믿음과 같은 초자연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사실상 같은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할 것이니라.”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이르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37절은 이를 요약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인을 깨뜨릴 수 있는 상황은 없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상황은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상황은 없습니다. 우리를 그 사랑,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성령의 인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남김없이 치르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법정은 없으며, 성령님이 지키시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헬라어로 ‘후펠니코먼(hupernikōmen), 후펠니카오(hupernikaō)’ 입니다. ‘정복하다, 승리를 거두다’라는 헬라어 동사 ‘니카오’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나이키(Nike)’가 나왔죠. 우리는 뛰어난 승리자, 초월적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정복자 그 이상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깁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깁니다.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진실성을 증명합니다. 아무리 그 정도가 심하더라도 말이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더 큰 선과 더 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시련이 하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 다가올 삶에서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얻게 하죠. 이러한 극단적이고 심각한 상황은 더 고귀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더 강한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더 약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믿음이 굳건하고 확고한 그리스도인을 만듭니다. 시련을, 시험을 견딤으로 믿음이 증명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기뻐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더 큰 보상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것은 겨울에 고린도에 있을 때였습니다. 편지를 받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울이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자신이 기록한 진리로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기록된 모든 일들을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칼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 성도들은 박해에 휩싸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피가 거대한 로마 원형경기장과 원형극장의 모래를 적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안전하게 지켜졌습니다. 성령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죽음을 비롯한 모든 박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맹수들에게 물려 찢겼고, 기름에 적셔 횃불에 태워졌으며, 사람들과 짐승들, 그리고 지옥의 마귀들과 싸웠지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님의 보호하시는 사랑 안에서 안전했습니다. 영광에 들어갈 때까지 안전했습니다.
바울은 37절을 이렇게 끝맺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리고 나서 38절과 39절에 아름다운 마지막 후렴구가 나오는데, 설명하기보다는 낭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위대한 진리를 확신하십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사망은 큰 원수죠, 생명이나, 모든 위험과 어려움, 유혹과 고난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천사들이나, 거룩한 천사들이죠, 마귀들이나, 타락한 천사들이죠,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지금 또는 미래의 일이나, 능력이나, 여기서 능력은 신약에서 복수형으로 사용되는데, 신약에서 복수형으로 사용되는 헬라어 형태는 기적, 강력한 일, 초자연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그 어떤 것도, 사망도, 생명도, 거룩한 천사들도, 타락한 천사들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도, 그 어떤 초자연적이고 강력하며 초월적인 힘도, 높음이나, 이는 궤도의 정점에 있는 별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깊음이나, 여기서 깊음은 ‘바토스(bathos)’, 궤도의 가장 낮은 점에 있는 별을 가리킵니다, 우주의 가장 높은 곳이나 가장 낮은 곳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것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삶의 어떤 것도, 죽음의 어떤 것도, 천사의 세계의 어떤 것도, 마귀의 세계의 어떤 것도, 시간 속의 어떤 것도, 영원 속의 어떤 것도, 어떤 기적의 힘도, 땅의 어떤 것도, 하늘의 어떤 것도, 우주의 어떤 것도, 어떤 것도, 창조된 우주 안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레미야 31장 3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성령님은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지키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특별히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의 구원의 영광을 이처럼 놀라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 나아가셨음을 압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감사할 때 이 놀라운 구원의 사역도 기억하며 깊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영원한 과거에 택하심으로 시작되어, 십자가를 지나 열린 무덤을 거쳐, 성령님의 지속적인 사역에 의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구원 사역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로 역사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기 위해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을 정결하게 하옵시고 찬양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위대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찬양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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