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to You Resources
Grace to You - Resource

함께 하나님의 말씀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2주 전부터 소개해 드리고 있죠. 2주 전에는 전체적으로 살펴봤고, 부활주일이었던 지난 주일에는 53장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52장 마지막 부분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오늘 드디어 이 놀라운 이사야 53장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장은 성경적 진리와 실재가 담겨 있는 무한한 우물과도 같습니다. 연구하면 할수록 더욱 깊어집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이사야 53장과 견줄 만한 장은 없습니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생일대의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만큼 이사야 53장은 깊고, 높고, 넓습니다. 저는 이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여러분이 앞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을 겁니다. 자, 지금부터 이 놀라운 이사야 53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부터 읽겠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수백년 동안 이 장은 믿는 자들에게 승리의 기쁨과 커다란 축복을 주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죠. 하지만 사실은 슬픈 노래입니다. 애도의 노래입니다. 탄식이 담겨 있습니다. 비탄의 노래입니다. 연민의 노래입니다. 참회의 찬송시가 단조로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이 53장에는 사실 위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 역사 속에서 한 국가가 할 최고의 고백입니다.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께 돌아올 국가, 나라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죠. 따라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때, 이사야 53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읽을 때 눈치채셨겠지만, 10절까지는 과거 시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언이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 높아짐에 대한 수많은 세부사항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미래 시제가 아닌 과거 시제로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께 일어날 일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까지도 예언한 것으로써, 자신들이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던 메시아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오래도록 거부했던 메시아를 돌아보며 내뱉는 탄식인 겁니다.

53장은 구약의 예언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상세한 예언입니다. 메시아의 대속적이고 대리적인 희생적 죽음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메시아는 여호와의 종, 곧 예수님입니다. 네, 바로 그렇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속죄가 처음으로 펼쳐지는 장입니다. 하지만 이 장의 주된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데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거부했던 복음과 메시아를 돌아보게 될 것이고, 그때서야 자신들의 유일한 소망이자 유일한 구원자이신 메시아 예슈아를 거부했다는 것을 깨닫고 탄식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하게 될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장을 통해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신 메시아는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실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실 겁니다. 하나님은 메시아가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셔서 속건제물로 삼으실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게 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장에 따르면, 메시아는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대속물로 죽으실 겁니다. 죄 용서를 위해서는 이 속죄가 필수입니다. 하지만 메시아는 죽음에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앞서 읽었던 것처럼 메시아는 씨를 보게 될 것이고, 그의 날은 길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할 겁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자기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참으로 만족하게 여길 것입니다. 바로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메시아는 높아지실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해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장은 십자가를 예언하고 있지만, 예언의 때보다 훨씬 더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토록 오랜 시간 거부했던 것을 회개하면서 보이는 반응이라는 겁니다. 신약시대 때부터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아주 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매주 읽어 주는 구절만 듣는데, 이사야 53장을 읽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장을 아예 빼버린 겁니다. 이사야 53장을 실제로 읽어본 유대인들은 여기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이 메시아나 예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의롭지만 고난받는 대상을 이스라엘로 해석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의롭지만 고난을 받음으로써 언젠가 축복을 받게 되고,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리라고 해석했습니다. 랍비들은 본문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랍비들이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예수님이 본문의 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오랜 시간 잔인하게 고난을 받은 이유를 찾아야만 했기 때문이죠. 랍비들은 이스라엘의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이사야 53장을 이스라엘의 의로운 고난에 대한 헌사로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고난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상을 주시고, 영광을 주실 것이며,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을 축복하실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현실을 전혀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종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는 죄 없이 고난받는 자가 아니며, 자발적으로 고난받는 자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대신 죽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깨달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죄에서 건져줄 분을 원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대적과 환경, 고난에서 건져줄 왕이요 통치자를 원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고난받는 의인, 하나님께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을 의인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고난받는 의인이 이스라엘이라는 해석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고 체계의 한 현상입니다.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것은 자신들은 언제나 고난받는 불의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지금도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 국가가 그리스도께 돌아올 때까지 고난을 받을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겁니다. 또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분들이 많이 계시죠. 하지만 국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으면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여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과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복, 즉 영광스러운 왕국이 성취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당함으로써 축복자가 되는 이스라엘에게 경의를 표하는 계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슴을 찢는 탄식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이스라엘의 세대적 회개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라면 어떤 유대인이든 그리스도께 나아와 이와 동일한 탄식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에서 구원을 약속하는 나라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경우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과 모든 족속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구원의 경우, 오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미래의 어느 날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겁니다.

따라서 이사야 53장은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높아지실 사건을 보여주면서 그 실제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십자가 너머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이 회심한 후 과거를 돌아보며 하게 될 고백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 연구자나 신학자, 설교자, 저술가 중에는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이 이 땅에 물리적으로 임하게 될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전천년설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이사야 53장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을 겁니다. 이 장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회심한 후 고백하는 기도이기 때문이죠.

다시 한 번 큰 그림을 보겠습니다. 너무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기 이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기 전입니다.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에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었고,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에 이사야가 등장했고, 그리스도가 오시기 700년에서 650년 전에 남유다에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너희들도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북이스라엘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점에서,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사야가 죽은지 80년 후에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이 주전 603년이었고, 2차로 주전 597년에, 마지막으로 주전 586년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를 일삼는) 이교도들에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서 유대인들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고 울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혀가도록 하실 것이지만,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건져주실 것이고, 구원하실 겁니다. 이것이 이사야 후반부인 40장에서 66장의 첫 부분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첫 번째 부분이 바로 이 포로기에 관한 것이고,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고 있죠.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포로로 지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은 돌아왔고, 이스라엘을 재건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인을 끌고 갔고, 유대인들은 다시 돌아왔고, 그 땅에 다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유대인들이 미래에 더 큰 구원을, 훨씬 더 큰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겁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의 이 위대한 부분의 주제는 메시아입니다. 우리는 42장과 49장, 50장, 53장을 ‘종의 노래’라고 부릅니다. 네 장 모두가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고, 메시아를 주님의 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세적인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구원입니다. 영적인 구원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심판과 지옥으로부터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남은 장들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마무리합니다. “이제 너희에게 왕국을 줄 것인데 그 왕국은 바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왕국이다.”

따라서 이사야 53장은 이사야서 구원의 삼중 구조 중 두 번째 부분의 중간에 위치하며 이사야서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미래에 돌이켜 회개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께 돌아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이사야 53장의 주제가 52장 13절에 나오는 “내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52장 13-15절의 화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그리고 이사야 53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이 화자로 다시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이 화자를 선택하시고, 화자가 되기도 하십니다. 중간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종을 소개하시고, 그 종이 어떻게 상처를 입고 고난을 당하며 죽을지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종이 높아져 전 세계의 왕들이 그 종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이 경험할 고난과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종이 겪을 고난과 영광의 의미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이스라엘의 놀라운 고백이 나옵니다. 먼저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몇 달 전에 <노예>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종’에 해당하는 구약의 단어가 ‘에베드’라고 언급했습니다. 영어로 E-B-E-D 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800번 사용되는데, 노예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52장 13절에서의 화자는 하나님 자신인데, 하나님이 메시아를 “내 종”이라고 부르실 때 이 ‘종’이 ‘에베드’인 겁니다. ‘내 노예’라고 부르시는 겁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에베드’라는 단어의 핵심 개념을 이해하려면 최고의 구약 신학자인 월터 카이저의 설명이 가장 좋습니다. 카이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베드’라는 단어의 핵심 개념은 일차적으로 종속성이 아니라 소유권이다.” 노예가 된다는 의미가 바로 이겁니다. 내 종, 즉 메시아는 하나님의 노예라는 겁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메시아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겁니다. 메시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섬긴다는 겁니다.

노예라는 단어가 모욕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이 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에베드’, 즉 노예라고 불리고, 왕도 하나님의 노예라고 불립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하나님의 노예라고 17번 불렸습니다. 즉 매우 특별한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빌립보서 2장을 보면 메시아, 즉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동등하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종이란 헬라어로 ‘둘로스’ 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행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여러 차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행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행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노예가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메시아는 하나님이 소유하신 존재로 규정됩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를 일컫는 대명사인 ‘내 노예’는 ‘나의 것’, 즉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노예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존재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종’은 미래의 유대인 세대가 애통하며 말하는 그 분입니다.

우리는 이 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혹시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친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내가 뭘 좀 읽어줄게.” 그리고는 어디인지 알려주지 마시고 이사야 53장을 읽어줘 보십시오. 다 읽은 후에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누구를 가리키는 것 같아?” 그러면 유대인들이 “글쎄, 예수에 대한 글 같은데.” 이렇게 대답한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그럼 성경 어느 부분 같은데?”라고 물으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이렇게 답한답니다. 아니죠, 이사야죠? 이사야 53장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복음서에서 이 본문을 50여 차례나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겁니다. 이 본문은 분명히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높아짐을 말하는 예언입니다. 이 메시아는 다름 아닌 예슈아,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지만, 유대인의 미래 세대는 이것을 증언하게 될 겁니다. 이 증언이 1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 위대한 회개의 외침과 가슴 아픈 고백을 유대인들의 미래 세대가 할 것인데, 지금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유대인 개인이 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아 교회에 속하고자 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지금껏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첫 번째로 말하게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어느 날에는 변화가 생길 겁니다. 모든 것이 변할 겁니다.

이러한 미래는 언제 올까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가랴 12장을 보겠습니다. 스가랴 12장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500년 전에 활동했습니다. 이사야가 죽은 지 약 150년 후이죠.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벽을 재건했고 약속의 땅에 다시 정착했습니다. 하나님이 스가랴라는 이름의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스가랴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12장 1절입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예언이 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아주 믿을 만한 분에게서 나옵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그렇죠?

따라서 우리는 이 예언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절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그리고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그것을 드는 모든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예루살렘을 건드리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건드리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고, 술주정뱅이처럼 휘청거리고 비틀거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2절 하반절을 보면 예루살렘과 유다가 에워싸인다고 합니다. 유다가 외곽이고 예루살렘이 중심 도시입니다. 누가 예루살렘과 유다를 에워쌉니까? 3절 끝에 나옵니다. “천하 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전 세계가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시나요,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세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 날에 내가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화로 같은 유다 지도자들이란 외곽의 무방비 지역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곡식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 그러니까 적군이 몰려올 때 먼저 외곽 지역을 통해서 들어올 것인데, 외곽을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하나님이 불태워 버리신다는 겁니다.

8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9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이방 나라들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이방 나라들이여,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에 핵무기를 발사할 겁니까? 예루살렘에 미사일을 발사할 겁니까? 전세계가 모여 이스라엘을 대적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이슬람 운동이 유럽 전역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동쪽과 북쪽, 남쪽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위협입니다. 여러분이 비행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질러서 이스라엘 국경에 들어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2분 안에 방향을 돌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동쪽 국경을 지나가버리고 말 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매우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 작은 나라를 전 세계가 에워쌉니다. 반시온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옳지 않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자가 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반시온주의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세계가, 악한 세계가 이스라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전쟁이 어떻게 시작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이란에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핵무기를 발사할 수도 있죠. 어떻게 전개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대적할 때가 바로 그 순간이라는 겁니다. 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 때에, 그게 몇 시간이든 몇 주이든, 그 때가 되면,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말이죠.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찔러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찔러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로 인해 슬피 우는 것이 마치 장자를 위하여 슬피 우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11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을 것이고, 12절에 따르면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할 것입니다. 적들에 에워싸였을 때 하나님이 먼저 도우시는 것을 보고 말이죠. 그리고 “그 날에…”, 13장 1절입니다.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날까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들의 엄청난 공격을 받는 날에 일어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무방비 상태가 될 것입니다. 돌아설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가운데 성령이 부어질 겁니다. 간구를 들으시는 은혜의 성령입니다. 성령님은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켜 역사를 돌아보게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못박은 분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53장의 말씀은 그들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장자로 인해 우는 것과 같이 애통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메시아를 위해 애통할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그렇게 할까요? 유대인 전체가 그렇게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13장 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이방 나라들이 쳐들어 올 때, 3분의 2는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3분의 2가 여전히 불신앙에 남아 있을 겁니다. 9절입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찔렀던 분, 십자가에 못박은 분을 돌아볼 때 구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발과 손을 못박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범지구적 공격이라는 공포 가운데 성령이 부어지는 순간, 이스라엘의 삼분의 일이 못박히신 메시아를 깨닫기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현실로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

씻는 샘이 열리고 이스라엘은 죄와 더러움을 씻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아마겟돈 전쟁 가운데 삼분의 일은 보호를 받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양이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14장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2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이것이 바로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멸하십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나가사 이방 나라들을 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리스도의 발이 감람 산에 서실 것이고,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이 천년왕국을 세우십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태양도 빛을 잃습니다. 요엘서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달과 별이 빛을 잃고, 예수님이 찬란한 영광 중에 나타나십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 예수님도 동일하게 묘사하셨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시는 이 특별한 날은 낮도 밤도 아닐 것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주님만이 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다. 인간은 그 날이 언제인지 몇 시인지 알 수 없습니다. 9절은 이렇게 요약합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이것이 천년왕국입니다. 이 천년왕국을 주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것입니다.

에스겔도 동일한 것을 보았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내용을 살펴볼 시간은 없지만, 그래도 에스겔 38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 38장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습니다. ‘맥아더 주석성경’을 가지고 계시다면, 관련 주석을 통해 어느 나라들인지 전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중동 국가들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스가랴의 묘사와 동일한 장면입니다. 배경지식을 연구해보면 본문에 나오는 지명들은 이란, 이집트, 리비아, 에티오피아, 고대 아르메니아, 터키 동서부입니다. 이 나라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함께 몰려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은 중동입니다. 9절입니다.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백성이 광풍 같이 이르고.” 이것은 스가랴가 말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거대하고 범세계적인 공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대적들은 아무런 성벽이 없는 마을, 보호장치가 없는 지역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놔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39장 29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살펴봐야 할 부분입니다. 다시 7절로 올라가겠습니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네요. 4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 모든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대적들은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읽습니다. “너와 네 모든 무리와 너와 함께 있는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사나운 새와 들짐승에게 넘겨 먹게 하리니.” 주님이 그 나라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민족들이 알리라 하라” 8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볼지어다 그 날이 와서 이루어지리니.” 이것이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일입니다. 21절입니다. “내가 내 영광을 여러 민족 가운데에 나타내어 모든 민족이 내가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구절인 22절입니다.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겠고.” 29절로 이어집니다.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얼굴을 가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계속 읽습니다.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내 영’은 스가랴 12장 10절에 나오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날에 일어날 일입니다. 이제 이사야 53장으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날이 가까이 왔을까요? 글쎄요, 이스라엘은 중동의 과녁입니다. 목표이자 대적입니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계속 이스라엘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때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었던 나라들이 돌아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미국도 말이죠. 세계가 이슬람의 선전과 성장에 굴복하고 있고, 반시온주의가 급속히 팽창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호국들을 잃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도 포함됩니다. 스가랴와 에스겔이 예언한 이스라엘을 향한 이 전쟁은 머나먼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왜 이걸 놓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온 세계가 아르헨티나를 향해 전쟁을 벌인다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은 성경에 나옵니다. 이것이 과연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요?

그 날이 오면… 다시 이사야 53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딱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이 보일 반응이 1절에 나옵니다. 아주 완벽한 도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스라엘은 그 날에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우리는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다. 그런데 우리가 전한 것이라고? 무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전했다는 말인가?” 바로 메시아 예슈아에 대해 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이자 메시아 예수의 낮아짐과 죽음, 장사됨, 부활, 승천, 중보, 대관식에 관해 전한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복음에 관해 전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히브리 민족, 즉 유대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선포했는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예언한 선지자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밝혀낸 세례 요한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사도들도 모두 유대인이었고, 복음서 저자들도 모두 유대인이었으며, 신약성경 저자들도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전한 것”이란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우리가 전한 것을 가리키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진 것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수동형 분사로서 ‘전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죠. “우리에게 전해진 그 메시지를 누가 믿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한 것”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전해진 것을 들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지는 않았죠. “우리가 전한 것”이란 말은 화자의 관점이 아니라 청자의 관점인 겁니다. 이것은 메시아 예수에 관한 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 들었다는 겁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사실상 신약시대 이후로 이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지만 거부했습니다. 그렇죠? 다시 말해서 유대교가 확립되고부터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믿지 못하게 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지 못하게 하려고 선수를 쳤습니다. 유대 민족만큼 복음에 노출되었던 민족은 아마 없을 겁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이 유대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구약과 선지서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관한 신약의 역사도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역사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좋지도 않고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미래의 남은 자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들은 메시지를 누가 믿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이 고백의 의미를 이해하고 로마서 10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1절에서 13절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리고 14절에서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가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보내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입니다. 하지만 16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지만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문자적으로 말하려는 바는 유대인들이 이사야가 말한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이사야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남은 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 6장 10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는 언제나 십분의 일이,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가, 남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말로는 좀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데요, 원문을 살려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것은 이사야 65장 2절입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이스라엘은 알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이 놀라운 고백으로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는 전해진 것을 들었다. 분명히 들었다. 그러나 믿지 않았다.”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 두 번째 질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여호와의 팔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51장 9절과 52장 10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여호와의 팔은 ‘메시아’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여호와의 팔은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장 16절에 의하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팔을 뻗으셨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팔을 옷 밖으로 내미셨고, 우리에게 자신의 팔을 보여주셨으며, 자신의 힘과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먼저 유대인에게 다음으로 헬라인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어떻게 했다고요?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왜 믿지 않았을까요? 여기에는 신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왜 믿지 않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이유를 찾으려면 로마서 10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셨기 때문에 메시아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희생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썼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도 스스로 자기 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십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에 대해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를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죠.

저는 언제나 이렇게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과소평가했고 자신들의 의는 과대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겁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죄를 짊어질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기대했죠. 정복자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하고, 압제자로부터 나라를 해방하며, 이스라엘을 군사적, 정치적 강대국으로 회복시켜 주길 바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시는 동안 구원을 받은 남은 자가 모두 하층민이었던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이 일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이 창녀, 죄인, 술취한 사람들처럼 회당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과 어울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에 대한 적절한 교리 없이는 구세주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영적인 이유, 신학적인 이유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의와 대속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의를 가지려면,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완고한 백성에게 자신의 손을 하루 종일 내밀고 계셔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때가 올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겠습니다. 이 장은 정말이지 강력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다 읽지는 않고 이사야 53장을 가리키는 부분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32절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나는 땅에서 들려 올려질 것이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하실지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고, 십자가 위에 매달려 들려 올려질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34절입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요? 당신이 메시아, 그리스도인데 죽을 거라는 겁니까? 말도 안 됩니다. 메시아는 영원히 살아계실 겁니다. 어쩌면 에녹이나 엘리야같이 되어 결코 죽지 않으실 겁니다. 무슨 근거로 인자가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가요? 또 인자는 누구입니까?” 라고 말이죠. 35-3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진리를 이야기해 주었으니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멀리 가셔서 숨으셨습니다.

놀랍습니다. 37절입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그리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38절입니다. 이사야 6장 10절을 인용하고 있죠.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절에는 보충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러니까 관리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랑했기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왜 믿지 않았을까요? 영적인 관점과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자신들 스스로 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권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기회를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은 이사야 53장의 관점입니다. 2절과 3절은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다음에 살펴볼 부분입니다. 이 설명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믿지 않았는지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은 유대인이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셨고, 평범한 삶을 사셨고, 십자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이렇게 기대한 메시아의 모습과 정반대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주일에 살펴볼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놀라운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영광과 실제적인 성경 말씀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나아가서 주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끝나게 될 광대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찬양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 가운데 아직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영접하게 하옵소서.

또한 성령님이 오셔서 임재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성령께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셔서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옵소서. 이 아침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우리 죄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여 주옵소서. 마음을 열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성경을 온전히 믿게 하시고, 성경의 능력과 정확성과 무오성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영광 중에 복음의 실체를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신실한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이 진리를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동일하게 증거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동일하게 기쁨으로 맞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발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우리가 전한 말씀을 통해 역사하셔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주어지게 하옵소서.

이제 이 진리에 사로잡혀 우리 마음이 새로워지게 하옵시고, 이 진리로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가 커지게 하옵소서. 이 혼란한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를 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다가오는 한 주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 마음에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is sermon series includes the following messages:

Please contact the publisher to obtain copies of this resource.

Publisher Informatio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Welcome!

Enter your email address and we will send you instructions on how to reset your password.

Back to Log In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
View Wishlist

Cart

Cart is empty.

Subject to Import Tax

Please be aware that these items are sent out from our office in the UK. Since the UK is now no longer a member of the EU, you may be charged an import tax on this item by the customs authorities in your country of residence, which is beyond our control.

Because we don’t want you to incur expenditure for which you are not prepared, could you please confirm whether you are willing to pay this charge, if necessary?

ECFA Accredited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Back to Cart

Checkout as:

Not ? Log out

Log in to speed up the checkout process.

Unleashing God’s Truth, One Verse at a Time
Since 1969
Min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