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도 이사야 53장을 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살펴보고 있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다루지 못한 것도 많았다는 점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몇 달째 이사야 53장 안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정말 수많은 길이 뻗어나옵니다. 끝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길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 이 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깊이도, 너비도, 높이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난주에 이사야 53장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장이 지닌 무게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사야 53장이 담고 있는 무게를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단어는 없습니다. 인간의 말로 전달하기에는 그 의미가 너무나 크고 방대하기 때문이죠. 여러분도 이제는 이 장에 담긴 무게를 적절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걸 느끼고 계실 겁니다. 물론 이 문제는 대부분 설교자들이 겪는 문제이고, 특히 표현 능력에 한계가 있는 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좌절감을 느끼지만, 우리가 이미 나누었던 것을 다시 되돌아보고 그 의미를 풍성하게 해서 극복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전부 말씀드리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성경 중에서도 그 무게감이 상당한 장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런 장은 아마 없을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장사됨, 부활, 높아짐, 중보에 대해 구약의 어떤 구절보다도 완전하고 깊고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이 보여주는 복합성은 놀라우면서도 압도적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유례가 없는 이 놀라운 여정은 52장 13절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주님과 메시아, 즉 아들 예수님과의 영원한 관계에서 시작해서 아들이 구속 사역을 완전히 완수하신 후에 얻게 될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그 사이에 우리 죄를 대신 지고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통해, 즉 고난주간에 발생한 십자가, 부활, 텅 빈 무덤을 지나 하늘에서의 영광과 지속되는 중보 사역을 통해서 말입니다. 메시아의 생애 전체를 놀라울 정도로 세부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무려 700년 전에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가 기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또한 이사야 53장은 그리스도의 사역, 즉 그리스도의 삶과 성육신 순간부터 중보자가 되기까지 그 사이의 모든 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 종의 본성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잠시 이사야 53장이 시작되는 부분인 52장 13절로 다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으니 돌아가면서 살펴볼 겁니다. 하나님은 종에 대해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시작 부분인 52장 13절부터 15절, 마지막 부분인 53장 11절 하반절부터 12절에서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에는 자신의 종을 소개하시고, 마지막에는 종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를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종을 소개하시면서 종의 본성을 규정하십니다. “보라 내 종이.” 이것이 바로 메시아의 호칭입니다. 이사야는 네 편의 종의 노래를 기록했는데, 이 종은 ‘에베드’,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이사야 42장, 49장, 50장, 그리고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죠. 이 네 장은 메시아를 여호와의 종으로 바라봅니다.
이사야서 앞 부분을 보면, 여호와의 종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반역하는 종이었기에 심판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뒤이어 여호와께 충실한 종인 메시아가 나타납니다. 52장 13절을 보면 메시아의 본성을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는 받들어, 높이 들려서,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동사가 세 개 나오죠. 이 세 개의 동사가 메시아의 본성을 말해줍니다. 받들어, 높이 들려서, 존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신성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에 이 세 동사가 동일하게 등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6장입니다. 6장에 나오는 이사야의 환상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처럼 이사야 6장에서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묘사합니다.
다시 52장 13절로 돌아와서, 이 동사들은 여호와의 종, 여호와의 노예, 메시아를 설명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하나님과 동일하게 받들어지고, 높아지고, 존귀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쓸 수 있는 말을 여호와의 종에게도 쓸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묘사하는 동사들을 조합하여 여호와의 종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라고 말한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의미로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예수님도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따라서 하나님은 네 번째 종의 노래의 첫 부분에서 종이 자신과 동일하게 받들어지고 높아지고 존귀하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종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나님의 종은 다름 아닌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첫 부분에서 높아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인 14절에서 하나님은 종을 다시 소개하십니다. 종은 본질적으로는 존귀하신 하나님이지만, 사람이 되어 낮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부터 14절의 내용입니다. 이 전환은 매우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놀랐지만, 성육신하신 종의 모습에 더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모습이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이 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서 말한 예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7-8).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음으로”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메시아가 실제로 겪으실 끔찍한 십자가형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게 낮아지신 후에, 15절에 따르면 그는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재림 때에 일어날 일입니다.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입을 봉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가 다시 오실 때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고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닫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소개할 때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낮아지신 후에 지극히 높아지실 분으로 말이죠. 13절에 나오는 단어인 “형통하리니”에는 종이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53장을 마무리하시면서 11절부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종, 아들, 메시아에 대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52장 13절부터 15절에서 네 번째 종의 노래를 시작하시면서 메시아인 종의 승리를 내다보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이 승리했다고 선언하며 마무리하십니다. 종은 승리할 것이고, 이미 승리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시작과 끝에서 종이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중간 부분은 53장 1절부터 11절 상반절까지인데, 지극히 높아지기에 앞서 일어날 종의 고난을 묘사합니다. 종은 높아지고 승리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중간 부분은 그가 높아지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께서 뜻하신 대로 행하셨으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일으키사 자기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곧 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를 다시 보내셔서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그러면 세상의 왕들은 충격에 빠지고 깜짝 놀랄 것이며, 모든 영광 가운데 왕국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 즉 전리품을 나누실 것이며, 우주를 다스리는 최후의 정복자요 군주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서론과 결론에서 종이 높아질 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런 후에 중간인 1절부터 11절 상반절은 종이 높아지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이 12절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종이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기까지 자신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종을 높이시려는 이유는 종의 낮아지심과 대리적이고 대속적인 희생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러니까 바울은 이사야 53장을 가져다가 빌립보서 2장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매우 중요하면서도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직접 서론에서는 예언을, 결론에서는 선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날 일이고, 어떤 면에서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 중간 부분은 너무도 비극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없었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을 겁니다. 서론과 결론에는 종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 있고, 중간에는 초림 사역이 있습니다. 서론과 결론에는 종이 통치자이자 왕 중의 왕으로 다시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고, 그 중간에는 종의 초림과 낮아짐이 있습니다. 종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는 이유가 중간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낮아지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가장 악한 범죄자나 노예에게 주어지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11절이 말하는 것처럼 의로운 종으로 오셨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셔서 의롭게 만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핵심이자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제 1절부터 11절 상반절을 통해 이 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3절에 나오는 멸시받은 종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4절부터 6절은 대속물이 된 종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다루게 될 7절부터 9절은 잠잠히 도살당하는 종을 묘사합니다. 지난주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서 중요한 부분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7절부터 9절의 첫 번째 목적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그것은 두 번째 목적이고, 주된 목적은 종이신 메시아의 최종적 승리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이신 메시아가 이루실 최종적 승리는 자기 백성의 구원입니다. 바로 8절이 말하는 바죠.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11절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12절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이 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죠. 이사야 전체가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장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스가랴에 따르면 이 구원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찌른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할 때 일어납니다. 아직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역사를 돌아보며 자신들이 찌른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부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바를, 그때가 되면 이스라엘 전체가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 에스겔 36장은 새 언약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용서하고, 마음에 율법을 새길 것이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예레미야 31장과 스가랴 12, 13장에서 반복됩니다. 은혜와 간구의 영이 이스라엘에게 부어집니다. 미래에 일어날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입니다.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이스라엘은 1절부터 11절에 나오는 고백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백이 될 것입니다. 현재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셔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셔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릇 행하고 각기 제 길로 가는, 본성이 악한 양과 같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고,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기에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형벌이 대속물에 가해졌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미래에 이스라엘은 국가 전체가 이를 깨닫고 과거를 돌아보며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대로 고백할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이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 이스라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보자면 “우리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누가 믿었느냐?”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예수님께 나타났음을 우리 중 누가 믿었느냐?” ‘여호화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누가 믿었느냐?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구원자이심을 누가 믿었느냐?” 매우 소수의 사람들만이 믿었습니다. 갈릴리에서 500명,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120명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전역에서 3년 동안이나 공생애 사역을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신학에는 영광만 있을 뿐 고난은 없었습니다. 메시아의 영광에만 초점을 맞추고 고난은 외면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유대 문헌에서 메시아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죽으리라는 것을 믿었다고 암시하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죽어가는 메시아, 고난받는 메시아는 없었습니다. 오직 영광스러운 메시아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의 눈에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았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인의 영광의 신학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외모도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는 경멸받고 버림받았으며, 슬픔과 애통만이 가득했습니다.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멸시를 받았고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멸시당한 메시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할 순 없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예수는 우리의 왕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멸시당한 메시아였습니다. 그리고 4절부터 6절에서 예수님은 대속물이 되신 메시아로 나옵니다.
미래의 어느 날, 이스라엘은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르게 봅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죄 때문에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성모독과 성령 훼방의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찔림이 우리 허물 때문이고, 그의 상함이 우리 죄악 때문임을 압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제 7절부터 9절입니다. 예수님은 멸시받고 대속물이 된 종입니다. 그런데 7절부터 9절에서는 잠잠히 도살당하는 종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라는 구절을 지난 주에 이어 2주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이 예언의 절정입니다. 메시아는 도살당하는 어린 양으로 오실 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처음 나타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주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절부터 19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대속물로 오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짐승 제사는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이 될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이나 염소, 황소로 드리는 짐승 제사로는 죄를 속하지 못했습니다. 짐승 제사로는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런데 같은 장에 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입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도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따르면 유대인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바울은 자신이 바랐던 모든 것을 천한 것, 쓰레기,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킨 단번의 제사였다는 것,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의 완벽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히브리서 9장은 짐승 제사가 죄를 없앨 수 없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도 이 점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짐승 제사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짐승 제사는 죄를 없앨 수 있는 진정한 대속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킬 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대속물로 선택된 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사람들이 유월절 제사를 위해 자신들의 양을 고른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은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양으로 택하시고, 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바치신 날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한 겁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유월절 양이십니다.
시편 49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야말로 엄청난 진술입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 대가는 금이나 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출애굽기 30장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계수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적들과 싸울 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들의 숫자와 능력, 힘을 믿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벌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0장에서 하나님은 금이나 은으로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시적인 대속입니다.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돈으로는 영혼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이사야 52장 3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물질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최종적인 희생제사가 되었습니다. 같은 장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렇게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모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고 맞았으며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과 저는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언젠가 이스라엘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7절에서 9절을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7절에서 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2주 전부터 우리는 7절을 살펴보았습니다.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 세 절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사건을 가리킵니다. 7절은 그리스도의 재판입니다. 8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9절은 그리스도가 묻힌 무덤입니다. 그 세부적인 내용이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또한 잠잠히 도살당하는 종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기꺼이 순종하며 침묵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 7절에 담겨 있습니다. 10절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을 상하게 하고, 질고를 당하게 하고,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종의 태도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재판 중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면서도, 장사되면서도 잠잠하셨습니다. 그 어떠한 저항도 없었습니다. 7절에서도, 8절에서도, 9절에서도 잠잠하십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53장 전체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장에서 메시아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 장 전체에서 메시아는 말없이 고난을 받으십니다. 특히 7절부터 9절에서 그렇습니다. 상황이 정말로 심각해지는 부분입니다. 7절은 재판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이 ‘곤욕’은 예수님께 행해진 모든 형태의 부당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8절에 또 나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여기에서 곤욕이라는 단어는 심문과 연결됩니다. 물론 심문은 재판에서 사용되는 법적 용어입니다. 따라서 이 곤욕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을 받으면서 당한 고난과 학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말도 안 되는 불공정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으로 고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고, 무죄가 선언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폭행을 당하셨고, 침뱉음을 당하셨고, 주먹으로 얼굴을 맞으셨고, 갈대로 머리를 맞으셨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이 모든 일은 재판과 판결의 일부였습니다.
‘괴로움’ 이라는 표현도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괴로울 때에도.” 문자적으로 보면 이 히브리어 단어는 수동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도록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재판을 받으셨지만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도록 두셨습니다. 바로 이 동사를 두고 바울이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표현을 이끌어 냈을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의미까지 확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도록, 밤에 추적을 당하도록, 감람산에서 체포되도록, 야심한 밤에 불법으로 재판에 넘겨지도록, 거짓으로 고발당하도록 두셨습니다. 고난과 고문과 괴롭힘과 학대를 당하면서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털을 깎이거나 도살당할 때 잠잠한 양과 같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변호하는 말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불의한 재판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는 의로운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불의한 죄인들이 바로 그 의로움의 수혜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7절에서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보고 있는 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잠잠하셨습니다.
8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곤욕”이라는 단어는 7절을 상기시킵니다.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는 전체 재판 과정을 내포합니다. 법적 용어입니다. “곤욕”은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불의한 일을 뜻하며, “심문”은 판결을 뜻합니다. “끌려 갔으나”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에 넘겨졌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모두 사법 절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곤욕은 체포와 구금을 뜻합니다. ‘심문’은 사법 절차와 최종 판결을 뜻합니다. 끌려 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법정과 재판에서 끌려나가 사형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노예를 처형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예수님은 야훼의 종, 노예입니다. 예수님은 노예처럼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8절에 이렇게 묘사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말은 죽음을 뜻하는 유대인식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 여러 곳에 나옵니다. 다니엘 9장 26절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다니엘도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처형당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끊어진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죽임당하실 것입니다. 이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말인 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1장 19절에서 동일한 표현이 예레미야 자신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그러니까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진다는 것은 흔한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시고 어떤 말을 했든지와 상관없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불의가 행해졌고 결국 처형을 당하셨습니다.
하지만 8절의 핵심은 하반절에 있습니다.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누가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누가 메시아가 끔찍하게 처형당했다고 생각했을까요? 누가 나서서 이 모든 일에 대해 항의했을까요? 이런 뜻입니다. “누가 있는 그대로 보았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는 동안 대제사장, 랍비들, 서기관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모두 어디에 있었나요?” 이 일이 일어나기 700년 전의 예언에, 아무도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스가랴 13장 7절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뭐라고 했다고요?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기록했고, 마가도 동일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변호한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의 관습은 달랐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사형 선고 재판의 경우, 판결이 내려진 후에 사람들이 나서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일정한 기간이 주어졌는데, 기본적으로 40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유대 문헌에서 발견됩니다.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되기까지는 40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누군가 나서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재판이 거의 한밤중에 열렸기에 의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그날 오후에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40일은 어디로 간 겁니까? 40일이라는 기간이 지켜졌습니까? 기독교 역사에서 일찍이 제기된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40일을 지키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 답이 산헤드린 성명서에 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성명서를 작성했습니다. 유대 탈무드 43번은 산헤드린 공회의 성명서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전통의 기록이 있다. 유월절 전, 안식일 전날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다. 전령은 그 일이 있기 전 40일 동안 이렇게 외쳤다. ‘예수는 처형될 것이다. 예수는 마술을 행하였고,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예수를 변호할 증거가 있는 자는 앞으로 나와 제시하라.’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제시되지 않았기에 예수는 유월절 전 안식일 전날 십자가에 달렸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바로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전에 40일 동안 무죄를 주장하는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짓 기록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자신들의 흔적을 덮으려고 탈무드 안에 기록한 것입니다. 랍비 울라(Ulla)는 그 기록에 이렇게 주석을 달았습니다. “예수가 무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라고 보는가? 예수는 무죄 탄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는 유혹하는 자였고, 자비로운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라.’” 라고 말이죠. 랍비들은 예수님이 무죄 탄원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이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극단적으로 예수님을 거부했나요? 이 모든 일을 행한 후에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교회가 생기고 성장한 후에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날조된 기록을 탈무드에 넣었습니다. 40일을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이죠.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무죄를 탄원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과 함께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자칭 기독교인들, 그러니까 거짓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대하는 방식은 역사 내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을 이렇게 대하는 방식은 로마제국 초기, 신성로마제국 초기, 즉 로마 가톨릭이 취하는 방식었습니다. 아주 아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극심한 반유대주의가 있었는데, 이 반유대주의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하에서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어졌고, 역사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는, 계몽주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표면화된 것은 히틀러의 만행을 통해서였고, 이는 왜곡된 형태의 기독교와 연결되었습니다. 반유대주의를 오늘날까지 유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무한한 사랑이나 긍휼, 복음 전도의 열정 중 하나가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을 경멸했습니다. 산헤드린 성명서가 이를 증명하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지 정죄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생명을 구해주려고 했지 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기들의 입장이었다고 말이죠.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취급한 것은 자신들이 세운 모든 기준을 어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탈무드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 사악한 자를 변호하기 위해 감히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그 세대 중에 누가.” 당대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 누가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이 처형당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즉 자신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던 것을 그 누가 알았을까요? “내 백성”이라는 표현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40장과 51장, 52장에서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이사야는 다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 중에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차악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로 이스라엘을 위해, 유대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열방의 모든 이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사야 55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모든 나라에 속한 사람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를 두고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신성모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변호할 가치가 없는 신성모독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께 벌을 받으신 것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이었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는 이스라엘 나라 전체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9절의 무덤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이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에는 몇 가지 놀라운 세부사항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왜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양쪽에 한 명씩 있었던 것 기억하시죠? 중죄를 지어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면, 예레미야 25장 33절에 따라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문화는 그랬습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최악의 모독은 길에 아무렇게나 시체를 방치하거나, 제대로 묻지 않고 화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5장 33절에 나오는 대로 말이죠.
예수님은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3절과 마태복음 27장 38절이 말해주죠. 로마인들은 의도적으로 십자가형을 받은 시체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남겨진 채 죽어 썩게 될 것이었고, 새들이 얼굴을 쪼아 먹었을 것입니다. 길에서 죽은 사람처럼 버려졌을 것이고, 동물들이 십자가에 기어 올라가 얼굴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일종의 경고의 표시로 시체를 그렇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대항하고 로마의 법을 어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죠. 예수님도 이런 일을 당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썩은 시체로 쓰레기장에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쓰레기 소각장은 힌놈의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사용되지는 않지만 말이죠. 힌놈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쓰레기 소각장이었습니다. 쓰레기를 소각하는 불의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어두운 역사가 있습니다. 배교한 유대인이나 바알 숭배자들, 가나안 신 숭배자들이 암몬의 사악한 우상 몰렉을 위해 자기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역대하 28장 3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7장에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은 몰렉에게 갓난아이를 불태워 바치는 곳이었습니다.
역대하 28장을 보면 아하스 왕이 이곳에서 자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사야는 예언을 마무리하면서 이곳을 가리켜 벌레가 영원히 죽지 않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장에서 이곳을 구더기가 죽지 않는 곳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남은 시체를 던지는 끔찍한 곳이었습니다. 랍비들은 그곳에 던져진 오물과 시체를 태우는 영원한 불이 있는 곳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범죄자들과 함께 처형됐습니다. 예수님은 범죄자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하실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16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부자는 누구였을까요?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습니다. 큰 부자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부터 6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예수님의 시체는 썩어 예루살렘의 쓰레기장에 버려지는 대신, 부자의 사용하지 않은 새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이사야를 통해 계시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이 사실이 왜 중요할까요? 9절 하반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이는 예수님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온전히 거룩하셨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입에는 악한 것, 죄악된 본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악된 본성으로 인한 행위도 없었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듯이 예수님은 거룩하셨고, 흠이 없으셨고, 정결하셨고, 죄인들과 같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흠이 없는 어린 양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이 쓰레기 소각장에서 최후의 모욕을 당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하는 하나님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시기 위한 첫 단계였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시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예수가 더 이상 낮아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의 낮아지심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죽음에, 그것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모든 낮아지심이 끝났습니다. 부자의 새 무덤에 장사되는 것이 높아짐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덤에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날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수님은 무덤 밖으로 나오셨고, 마침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낮아지심이 끝났다는 사실에 대한 달콤한 증언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믿음이 없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렇죠? 사도행전 8장에 따르면 바울은 교회를 향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바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사형 집행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행보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는 길에서 멈춥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실 겁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하시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변화됐습니다.
바울은 일종의 축소판과도 같은 증언을 합니다. 바울의 증언은 유대인들이 미래에 하게 될 증언의 예고편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쓰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6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바울은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형적이고 표준적이고 광적이고 열정적이고 열성적인 반그리스도적 태도를 말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에서 바울의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이제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메섹 도상에 실제로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신자라면 누구든지 바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은 이사야 53장을 염두에 두고 로마서 1장을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바울은 이사야 53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의 다른 서신서에서도 발견됩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은 이사야 53장에 담겨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는 새 언약에 포함되어 있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이사야 53장에 담겨 있는 명료함과 그 능력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제5의 복음서라고 불리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 있는 성경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고대 문서이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모든 세부사항을 담고 있고, 그 하나하나가 완벽히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하나님의 책입니다. 성경은 진리이며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와 말씀과 메시지를 들음으로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다음 구절을 기대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써 얻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음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에게, 아무런 소망 없이 영원한 지옥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이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관점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오늘 이후로 다시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에 관한 진리의 영광 속에서 바라보게 하옵소서.
아버지, 이 진리를 우리 심령에 인치시고 우리 마음에 새겨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오늘 저녁에 다시 모여 미리암에 관한 놀라운 기록을 연구하게 하옵소서. 오늘이 복되고 풍성한 날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신 희생에 대해 더욱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복되신 구세주께서 우리의 허물을 대신해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셨음에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를 온전히 믿으며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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