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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영광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복음의 영광을 이해한 사람으로서의 바울의 삶을 살피며, 복음이 어떻게 바울의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봤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영광으로 인해 인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난을 견디며 겸손하고 깨끗하게 살아가려 노력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참되고 정확하게 다루었습니다. 영원한 영광에 관심을 기울였고, 일시적인 위안이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의 영광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영광이 지닌 초월성을 이해하자 삶을 바라보는 바울의 관점은 완전히 달라졌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난도 견디며, 결국 순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복음의 본질, 복음의 본성에 대해서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영광스러운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오전에 다룰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에 대해 알려면 로마서 3장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에는 중요한 내용이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은 바로 이 3장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부터 31절까지 읽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오늘 설교는 마치 신학교 강의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문을 두 시간으로 나누어 살펴볼 텐데요, 첫 번째 시간에는 21절부터 25절 상반절까지, 두 번째 시간에는 25절 하반절부터 31절까지 보겠습니다. 주제는 만족시키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죄인과 하나님을 만족하게 합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복음이 죄인을 어떻게 만족시키는지, 그리고 죄인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를 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복음이 하나님을 어떻게 만족시키는지를 다루겠습니다. 좀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첫 번째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두 번째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다루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오전 두 번째 시간에 살펴볼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핵심 단어는 ‘의’입니다. ‘의’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나 ‘디카이오오’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 본문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의’, 때로는 ‘의롭게 하다’로 쓰이는 이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복음의 주제를 이루는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의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욥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욥기는 창조 이후 가장 먼저 기록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욥기 9장입니다. 욥기 9장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이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질문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죠. 계속 읽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하나님을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토록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의로울 수 있단 말이냐? 이토록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의롭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지에 대해 답하려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어린 아이를 데려와 제단에 태워서 바치면 신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가 있었습니다. 아이를 태워 바치면 신의 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죠. 물론 이것은 종교의 본성에 관한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 종교적 노력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신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해서 인간이 어떤 종교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종교를 성취지향적 종교라고 부릅니다. 어떤 방식으로 노력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종교가 몰렉교이든, 바알교이든, 이슬람교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몰몬교이든, 여호와의 증인이든, 로마 가톨릭이든, 일본 신도교이든, 불교이든, 힌두교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소수 종교도 마찬가집니다. 이 모든 종교는 결국 똑같습니다. 신 앞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커다란 거짓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의 거짓 종교가 다양한 이름표를 붙이고 나타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종교들이 제안하는 것은 끝이 없지만, 결국 인간적 노력으로, 인간적 성취로 귀결됩니다. 도덕적 행위나 종교적 의식,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신 앞에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욥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것을 이뤄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도덕적 행위나 종교적 의식,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가장 중요한 궁극적 질문입니다. 누구든 이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영원한 지옥에서의 영원한 정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로마서로 돌아가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과 3장 20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21절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욥이 묘사하고 있는 이 위대한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점을 3장 10절에서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육체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첫 세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세상 전체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정죄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인간에게 적절한 방어 수단은 없습니다. 이 사실은 특히 종교인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세상은 종교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성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루는 쟁점이 바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을 꼼꼼하게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낸 수많은 규정들을 율법에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율법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위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부터 이 엄청난 오류를 제거해 버립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3장 20절에서 주어지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찍부터 이 내용을 선언하셨습니다. 미가서 6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종교 의식이나 예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인이 자신의 기만적이고도 철저하게 사악한 마음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입니다. 죄인은 의롭게 행할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결단코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우리가 읽은 로마서 3장 19절에는 “모든 입을 막고”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심판대 앞에서 아무도 자신을 변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재판관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본성, 도덕성, 종교를 가지고 어떤 논증을 제시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죄인은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참된 종교적 기준이 구약성경에 있지만, 그것에 복종하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 하나를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에 하나님의 본성이 계시되어 있고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야말로 어둠 속 암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해결책이 없다면 인간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만일 바울이 3장 20절에서 본문을 끝냈다면, 우리에게는 깊은 절망만이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갑자기, 이제 제가 읽으려고 하는 21절로 넘어갑니다.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고, 인간의 노력이라는 종교가 철저하게 거부된 것처럼 보일 때, 빛 한 줄기가 어둠을 뚫고 나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빛이 어둠을 뚫고 나옵니다. 1장에서도 어렴풋하게 비췄던 빛입니다. 1장 16절에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처럼 바울은 복음에 드러나는 구원의 실체를 도입부에서는 영광의 빛이 흐릿하게 깜빡이는 것처럼 설명하고, 21절에서는 완전한 빛으로 뿜어져 나오듯이 설명합니다. 죄인의 참혹한 절망 속에서 소망이 뚫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을 여는 “이제는”은 기쁨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1장 18절은 죄의 추악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진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도 아닙니다. 인간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최종적인 진노도 아닙니다. 1장 18절의 진노는 유기의 진노, 즉 내버려 두시는 진노입니다. 이러한 진노는 인간 역사에서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과 나라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 가운데 빠졌고, 거짓 신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부도덕과 남색을 일삼으며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인간 역사는 그렇게 반복하며 흘러왔습니다. 인간 역사는 개인이나 집단의 죄에 대한 심판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1장 18절부터 3장 20절에는 매우 짙고 불길한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기쁨으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소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인간의 의는 어떻습니까? 적절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말합니다. ‘더러운 옷’은 히브리어로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삶에도 이러한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겠습니다. 어제 설교에서 간략히 언급했었는데요, 오늘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에 대해서 시간 순서대로 설명합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누군가 자신의 의를 쌓아 자랑하려고 한다면 바울 자신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파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자신이 전통주의자임을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 자신이 율법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대적으로 간주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겉으로 볼 때 바울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바리새인들처럼 능숙하고 세련된 위선자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것들은 바울에게 유익했던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으리라 스스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자 그 모두가 해로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유익한 것에서 해로운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8절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9절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입니다. 앞으로 며칠간 이 문제에 대해서 온전히 살펴보고 알아보고자 합니다.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의를 통하는 것입니다. 빛은 아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면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빛은 위에서 옵니다. 빛은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수준으로 우리 의를 발전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수도사가 되어서, 관조와 단전호흡을 거룩한 행위로 여기면서, 여생을 그러한 행위를 하며 마무리할 수도 있습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살면서 살을 깎아내는 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을 채찍질하거나 십자가에 못박는 고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행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 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다른 의입니다. 이사야 45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얼마나 아름다운 묘사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의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의입니다.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가 완전한 의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의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면 하나님의 의를 소유해야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이자, 하나님의 아들의 의를 소유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다른 의와는 구별됩니다. 완벽한 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의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의를 입증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드러나는 의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동적 의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나는 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완전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대리적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에서 하나님의 의를 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셨고, 그 계명들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율법이 죄에게 요구하는 형벌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러한 완전성, 하나님의 의는 제사 제도에 잘 나타납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유형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 중 세 가지 제사는 특별히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속죄제, 속건제, 번제입니다.

레위기 1장을 보면 번제가 소개됩니다. 번제는 모든 제사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번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사였습니다. 번제는 속죄제, 속건제와 동일한 부분이 있지만 독특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제는 속죄의 본질적인 특징을 상징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간의 의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희생제사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가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러고는 번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십니다. 번제의 예물과 관련된 첫 번째 사실은 흠 없는 수컷이라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라.” 예물에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10절입니다. “만일 그 예물이 가축 떼의 양이나 염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순전하고, 온전하고, 죄없고, 흠없는 제사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죄책, 즉 죄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죄는 무고한 존재를 바침으로써 이뤄집니다. 정말로 놀라운 광경입니다. 동물에게는 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책이 있는 양은 없습니다. 죄책이 있는 소도 없습니다. 죄책이 있는 염소도 없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죄책이 있는 죄인에게 요구되는 제사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죄가 없는 제물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흠 없는 제물, 제사, 대속물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제가 보기에 흠 없는 어린 양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가리킵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능동적 순종이란 용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능동적 순종은 성경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완전한 제사 그 자체였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였음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에 관하여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라고 기록했을 때, 이러한 증언들은 예수님의 완전하심을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죄 없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통해 하나님께 바쳐질 완벽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셨고,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양을 제물로 가져오면, 양에게 혹시라도 흠이 없는지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요구사항은 완전한 제물로서 흠 없는 수컷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번제의 두 번째 특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죄를 범한 자가 번제물에 자신의 모든 죄를 지운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우리가 역사를 통해 알고 있듯이, 사람이 실제로 제물에 다가서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상징적으로 그 제물에 자신의 죄 전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이는 그 제물에게 죄책을 전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이란 대속물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여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앙을 정말로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합니다. 번제의 또 다른 요소는 5절에 있습니다. 이 점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 즉 제물을 드리는 죄인은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했습니다. 대속물의 죽음은 죄에 대한 끔찍하고 치명적인 형벌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절대적이고 엄격해서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번제는 개인적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실제로 그 제물을 직접 죽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집단의 문제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 관한 새 관점’입니다. 하지만 레위기의 제사는 구원이 매우 개인적인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죄인은 자기 손으로 제물을 죽였습니다. 이는 최종적인 대속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선명하게 각인시켰습니다. 우리 각 사람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번제의 또 다른 특징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입니다.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이 또한 죄에 대한 형벌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피로 상징되는 죽음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번제의 다섯 번째 특징입니다. 앞의 네 가지는 모두 속죄제, 속건제와 동일합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는 번제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바로 제물 전체를 불사른다는 겁니다. 6절입니다.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9절입니다.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 번제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무엇을 상징할까요? 하나님께서 그 제물에 만족하셨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다는 것이며, 화평과 화해가 찾아왔음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53장 10절의 진술과도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하나님은 예수님이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는 이렇게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제물, 완전히 의로운 제물을 요구하시는데, 이를 번제와 제사 제도를 통해 보여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의로운 제물을 실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능동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죄인들을 대신해 율법의 형벌을 완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제물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그 의가 영원한 의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잠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해도 영원히 그럴 순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9장 12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우리 스스로 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거나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구원이 우리에게만 달려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구원이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저는 벌써 잃어버렸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잃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미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제 스스로는 구원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제 구원을 보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이 이 구절에서의 핵심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여기까지가 전부 하나님의 의를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이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한 30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아닐지도 모르죠. 어쨌든, 제 메시지는 연결된 소시지와도 같아서 어디서 잘라내든 본질은 똑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몇 가지 요소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는 율법주의와 상관이 없습니다. 몇 가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1절입니다. “율법 외에.” 율법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문구는 강조하는 부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번역본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NASB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강조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율법 외에.” 이는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계시죠? 의는 그렇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5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의가 아니라 죄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자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율법으로는 의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철저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율법이란 율법 준수를 의미합니다. 신자라면 모두 이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종교의 가장 큰 오류는 사람이 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큰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완곡어법입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이 항상 말해왔던 것입니다. 4장 3절로 가보겠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의 모델과도 같습니다. 그것이 4장 전체의 요점입니다. 2절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5절입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다는 내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이미 그렇게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이는 창세기 15장을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의식이나 예식, 종교 행위는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율법도,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도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비록 바울이 율법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했을지라도 말입니다. 율법은 죽음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맨 처음인 창세기까지 거슬러 가보십시오. 선지자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사야 55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놀라운 장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다시 말해서 의가 없는 자들을 부르고 있는 겁니다.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6절부터 7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여기에서의 핵심은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은 왜 주어진 것일까요?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 18장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바로 팔복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산상수훈 도입부에서부터 바리새인에게 “너는 전부 틀렸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합니까?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합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그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소유합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슬피 우는 사람들이 소유합니다. 그들은 위로를 받고, 하나님 나라를 받습니다. 이것이 항상 성경이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방식은 항상 동일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구약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방식의 구원으로 전환되는 것도 아닙니다. 구약에서 그림자였던 것이 눈에 보이는 완전한 실체로 드러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상관이 없고, 계시에 근거하고 있으며,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로마서 4장 5절로 가보겠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이 의는 정말로 놀라우면서도 너그러운 선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4장 20절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여기에서 무엇이 교환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을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솔라 피데, 오직 믿음,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다음 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네 번째 특징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복습합시다. 하나님의 의는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해준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상관이 없고, 계시에 기초하고 있으며, 구약과 일맥상통하고,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지와 분리되지 않고 우리 의지를 움직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즉, 성령의 중생하시는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죽은 영혼에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바리새파 유대교의 견해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회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면 요나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선지자였고 복음전파자였으며 선교사였습니다. 요나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은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회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이 일 때문에 격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시기를 원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받은 약속에 이방인들이 끼어들었다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배배 꼬인 겁니까? 그래서 22절은 말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칩니다. 다시 말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차별 없음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39절은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한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렇게 질문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로마서 1장 초반부에는 유대인에게 먼저고 헬라인에게 나중이라는 구절이 있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는 시간순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유대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시간순으로 볼 때 복음의 메시지가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언제나 온 세상을 향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2장과 3장으로 잠깐 돌아가보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인해 자만했던 유대인들에게 정죄가 주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부터 26절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율법 준수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 준수가 쟁점이었습니다.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모두 율법을 준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23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가 무슨 의미의 세례인지 아십니까? 당시 행해진 세례는 기독교적 의미의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로의 개종을 표현하는 세례였습니다. 유대 종교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이방인들에게 행해진 세례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대중들, 곧 유대인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너희가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삼키기에 쓴 약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개종하는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별이 없는 동일한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구약의 율법의 복음이 주어졌고, 이방인에게는 은혜의 복음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의 복음, 하나의 구원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이사야 43장 7절은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가 나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죄는 모든 사람을 동일한 상황에 빠뜨렸습니다.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믿는 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상관없이 계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의는 은혜로 주어집니다. 24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두 알고 계시죠? NASB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선물로 받았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도 선물입니다. 받거나 거부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킹 제임스 버전에는 개역개정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NASB가 헬라어를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의’를 의미합니다. 이 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은혜로 주어집니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라는 단어를 수백번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은 맞지만, 매우 값비싼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요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속량으로 성취됩니다. 2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속량이란 무엇입니까? 속량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값을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몸값을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값을 지불하여 몸값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값을 치렀습니까? 예수님이 치르셨습니다. 그 값은 무엇이었습니까? 25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화목제물, 곧 ‘힐라스테리온’으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욥은 “인간이 이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로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아야만 합니다. 율법과 상관 없이, 구약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받는 이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통한 속량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필요를 만족시킵니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복음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기에 적절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믿음이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죄인의 마음에 있는 가장 위대한 질문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답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오늘 아침 성경의 놀라운 부분을 깊이 살펴볼 수 있도록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먹이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주님, 오늘 본문에 담긴 분명한 진리가 우리 심령에 깊이 새겨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더 기뻐하고, 더 자유롭게 예배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이 진리를 더 잘 이해하여 도처에 있는 죄인들에게 선포하게 하옵소서. 더 신실한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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